220. MVP(2)
‘뭐 저런 년들이 다 있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위험하군.’
어째서 저러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상했다. 그 대상이 되는 무진이 부러우면서도 부럽지가 않았다.
원래라면 마땅히 부러워야 하는데, 저 가공할 투기를 마주하니 부러울 수가 없다. 칼로 물 베기라는 부부 싸움이 진짜로 되는 수가 있었다.
꿈틀, 꿈틀!
하야토는 미간을 심하게 찌푸렸다. 감정 없는 인형, 일본이 자랑하는 부동천검의 검객이 저리 동요하다니. 미간만으로 참으로 다채로운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공주가 날 좋아하나? 이놈의 인기는 한류를 초월하는군. 앞으로 강 사마로 부르는 걸 허하노라.”
“개…… 허튼소리 하지 마라!”
“여자는 싫으면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아.”
“호승심일 뿐, 부질없는 기대는 품지 말도록.”
“짝사랑은 고달픈 법인데. 쯧쯧쯧!”
하야토도 무진을 겪어 봤기에 어떤 성격인지 모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약점을 찌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비열한 놈이다. 최대한 무진의 화술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했거늘, 공주님을 언급할 땐 감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그럴수록 점점 깨닫는다. 공주님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하필이면.’
하야토는 골이 지끈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놈한테 걸려서 꼴이 우습게 되었다. 하나, 자신은 천검의 계승자로서 황실의 후예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호해야 했다. 사적인 감정에 흔들려선 안 되었다.
“나는 공주님의 수호검으로서 최선을 다해 보필할 뿐이다.”
“어, 그래.”
무진의 시큰둥한 대답에 하야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장난에, 혼자 진지하게 화답한 꼴이었다. 이 자리에 괜히 나왔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황실의 수호검으로서 임무에 충실하기로 맹세했다.”
“알았다.”
“이 개새…… 아니다. 더는 말 걸지 마라.”
“콜, 천검가가 돈이 없진 않겠지.”
“……(이런)!”
스스로 에누리, 네고를 하지 않겠다니, 무진으로선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뒤늦게 실태를 깨달은 하야토였지만, 말문이 쉬이 열리지 않았다.
“이거나 마셔.”
“후르륵 아뜨! 뜨거우면 뜨겁…… 달콤하군.”
이놈 이외로 놀리는 맛이 있네.
타격감이 아주 좋다.
미츠키가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있었다. 잘생기고, 부자고, 검 잘 쓰고, 명문가고, 아래도 튼실한데 찐따였다.
얼레, 요즘 여자들이 바라는 이상형이네.
멈칫!
무진은 커피를 내주려다가 일룡에겐 다시 물었다. 자칭 무(武)의 본산이라고 떠들긴 해도, 소림사도 어쨌든 불교였다.
중이 커피라니, 아메리카노로 해 줘야 하나?
“카페모카 휘핑 많이.”
“커피에 우유 들어가는 거 몰라? 이래서 땡중은 안 된다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속가다.”
“방장의 직전 제자라고 하지 않았냐?”
“난 바이자 그룹의 차남이다.”
바이자 그룹은 중국 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이었다. 국가의 모든 산업을 문어발식으로 점령하고 있었다. 관치경제의 끝판왕으로 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속세와 연을 끊고 무공만 수련한다고 광고하더니, 실제는 가장 친기업적인 문파였다. 한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속가는 머리를 길러도 될 텐데, 굳이 빡빡 깎고 계인까지 찍는 걸 보면.
콧구멍 없는 외계인이라도 되나?
“그렇단 말이지, 크크크.”
“왜 웃지?”
“알 텐데.”
“……색즉시공 공즉시색, 도루 아미타불!”
무진으로선 천만다행이었다. 소림이 공수래공수거를 실천했다면 1,000억을 받기가 요원할 수 있었다. 물론, 돈 없다고 배 째란 식이면, 탁발까지 모조리 긁어 와야겠지. 채무는 사정이 딱하다고 하여 봐주다간 쪽박 차기 일쑤다.
“이제부터 정산을 해 보자고, 계약서에 적힌 내용 인정하지?”
채권자로서 무진은 계약서상 내용을 꼼꼼하게 지적해 주었다. 1차로 왕우가 무혈지독을 검증했고, 2차로 역습을 사전에 고지했고, 3차로 피스트킹의 2번째 구사일생에 더해 무공 증진까지. 따지고 보면 4차까지 계약서에 명시되었으나, 생도 DC를 해 주었다.
흐엑!
신음이 동시에 터졌다.
무진의 넓은 아량에도 일룡, 제갈비, 하야토의 안색이 새하얗게 떴다. 알고는 왔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이 밀려왔다. 언감생심 만져 보지도 못한 액수가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3,000억은 너무하지 않나?”
“확실하지 않으면 계약하지 말라는 말 못 들었어? 나는 분명 기회를 준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3,000억은 심하잖아!”
“각국의 엘리트 생도들께서 엄살이 심하시네. 혹, 본인의 목숨값이 3,000억도 안 된다는 건 아니겠지? 암, 그렇고말고.”
체면과 위신을 중시하는 유교의 나라 한·중·일이다.
가오 빼면 시체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체면 상하는 짓은 하지 못한다. 더욱이 중국과 일본에게 한국은 소국에 불과했다.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소국에 굽히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들이 인정한다고 해도, 사실을 알면 국민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소국에 머리를 숙이고, 삥까지 뜯겼다며 두고두고 회자되겠지.
끄응!
일룡, 제갈비, 하야토는 외통수에 걸렸음을 인정했다. 부정하는 순간 저 인간은 계약서를 인터넷에 뿌릴 게 분명하다.
한·중·일의 외교적 결례 따윈 애초에 신경 쓸 위인도 아니다. 자기는 국가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발뺌할 테니 말이다. 체면과 위신을 중시하지 않으니, 한결 자유로웠다. 그걸 증명하듯, 같은 국민에게 욕이란 욕을 다 처먹고 다녔다.
난처해하는 모습에 무진은 희망을 주었다.
“그래도 여지가 없다곤 할 순 없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봐라.”
무진이 협상을 제시하자, 제갈비가 나섰다. 와룡의 후예를 자처하는 제갈비는 어떻게든 3,000억을 깎아야 했다. 던전을 공략하듯, 천천히 마물을 사냥하고 보스룸까지 단계를 밟는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한데, 시작부터 보스룸이다.
그것도 각성한 채.
“봐 달라고 문서화하면 100억 깎아 줄게.”
“……그걸 말이라고!”
“200억.”
“우릴 대체 뭘로 보고 하는 소리냐!”
“400억.”
“그깟 돈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살 순 없어!”
“800억.”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그렇지.”
“……?”
일룡과 하야토는 일갈했던 제갈비를 노려보았다. ‘콜!’을 외쳤어야 한다는 눈빛이었다. 욕심을 부리다가 도로 3,000억이 되고 말았다.
‘빌어먹을! 자기들도 은연중에 동의했으면서!’
독박을 쓰게 된 제갈비는 억울했다.
협상도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어야 합의하지. 일방통행인 데다가 제안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떤 미친놈이 봐 달란다고 100억을 태우냐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액수가 더블로 늘어나자 제갈비, 일룡, 하야토가 반색했었다. 좀 더하면 1,000억으로 땡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쉽사리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욕심이 화를 불렀으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이제 와 자신의 죄로만 몰아가는 행태를 제갈비로선 받아들이기 힘들다.
씨익!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무진의 표정은 최악이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도록 이간질하여 갈가리 찢어 놓았다.
“억울해할 일은 아닐 텐데. 치료 후에 무력이 늘었으면서 발뺌하면 곤란해.”
[신의 정화]를 복용한 생도들은 내외공의 순도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전까지 쌓이고 쌓였던 불순물이 온전히 내력으로 갈무리되어 단계를 높였다. 애초에 1,000억 이상의 가치를 지닌 최상급 포션이었다. 그런 가운데 배신자를 색출하고, 목숨을 2번이나 구원받았다.
3,000억이 천문학적인 액수긴 하나, [신의 정화]가 가진 진정한 가치를 고려한다면 적정한 액수였다. 단순히 돈만 있다고 살 수 없는 물약을 마시고서 먹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몰염치한 행위였다.
사면초가에 지부작족 당한 제갈비는 손을 들었다. 따지고 보면 염치가 없었다. 가격을 후려쳤다고 하기엔 정가였고, 구명지은과 기연을 얻었다.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라도 3,000억은 무리야. 가문이나 문파에서 계약 내용을 알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지금부터 말하는 조건을 수용한다면 1,000억은 일시불로 하고, 2,000억은 할부로 해 줄게.”
무진의 제안에 제갈비, 일룡, 하야토는 인상을 찌푸렸다. 계약 조건이 무리하진 않지만, 무진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나, [신의 정화]가 가진 가치를 논하면 1,000억이면 싼값이었다. 3,000억의 정가를 1,000억으로 계약하고, 2,000억은 재량껏 갚아 나가면 되었다.
2,000억을 숨겼으니, 일룡, 제갈비, 하야토로선 최소한의 체면을 지켰다고 볼 수 있었다.
“이자를 받겠다고?”
“그럼 이자도 없이 원금을 맡기라고? 게다가 시중금리를 고려해도 2%에 불과한데 엄살은 그만 부려.”
과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합리적이었다. 그저 생도의 신분으로 당장 갚기에는 액수가 너무 컸다.
2%라고 해도 원금이 어마무시했다. 한 번에 갚지 않는 이상, 이자를 갚기에도 빠듯했다. 아카데미를 졸업 후 던전을 공략하지 않는 이상, 채무에서 벗어나긴 요원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립무원이 아니던가!’
‘당장 거절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무서운 놈!’
‘공주님! 이자는 단순히 재밌는 자가 아닙니다.’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철저히 무진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왕 교관을 필두로 배신자를 색출해 낼 때, 자신들은 불신했었다. 조국과 교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역으로 이용하여 유리한 계약을 이끌었다.
실제로 배신자가 아니었다면, 배신자가 직접 치명적인 독임을 증명하지 않았다면 모든 대가는 무상이었다.
처음부터 밝혔으면 되지 않느냐는 반문도 불가능했다. 사건이 터지기 전 배신자를 콕 집어서 밝혔다면 과연 순순히 믿었을까?
모함이라며 꼬투리를 잡아 한국을 압박했을 것이다. 배신자를 통해 내부 사정이 훤한 암중 세력도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을 테고.
드륵!
교실 문이 열리고, 지수와 미츠키가 돌아왔다.
희비가 엇갈려서 승패를 짐작하기는 수월했다. 콧구멍 2개를 휴지로 막았고, 입술은 터졌으며, 눈두덩이는 부어서 울긋불긋 물들었다. 치료, 재생으로 회복은 되고 있으나 꼴불견이다.
“우리 미츠키가 맷집이 참 좋아. 다음에도 콜?”
“닥쳐, 이 마구니 사탄 같은 년아!”
“호오, 아직 갱생이 덜 됐구나. 더 좋아.”
“미친!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지수가 주먹을 들자, 미츠키가 움츠러들며 물러섰다.
하야토로선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여리디여린 공주처럼 보여도 실제는 포기를 모르는 승부 근성을 지녔다. 그런 공주가 순간적으로 질린 기색을 비쳤다. 전신류를 익힌 공주의 무서운 집념마저 꺾어 낸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렇다 치고 이미 한 번 골병이 들도록 팼으면서 또다시 패다니, 지독한 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