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MVP(1)
한·중·일 간 감정의 골은 깊다.
오랜 전쟁, 수탈, 조공으로 인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싸여 있기 때문이다. 현대엔 전쟁을 겪지 않았음에도, 이제는 누가 더 우월한 민족인가로 설전이 번진다. 우월 의식과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서로를 대하니 감정적으로 좋지 않을 수밖에.
이런 가운데 교류전 사태를 사실대로 전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암중 세력의 암수가 실패했음에도, 결과적으론 같은 결말이었다. 한·중·일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후일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힘을 합쳐야 할 때가 있을 수도 있다. 올바른 정의를 내세워 암중 세력의 뜻대로 되도록 놔둘 수는 없는 법이다. 이는 정의가 반드시 이롭지는 않다는 걸 증명한다. 더욱이 국제 관계는 감정만으로 끌고 가선 이롭지 않았다.
공헌한 대로 교장은 한·중·일 언론이 모인 자리에서 조사 자료를 발표했다.
-이번 사태는 알려지지 않은 거대한 세력의 음모입니다. 실제로 한·중·일 교관이 암중 세력에 가담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혼란을 유도할 수도 있으나, 숨겨서 될 사안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안일했던 세상은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의도와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 미지의 세력이 세계를 위태롭게 한다는 걸.
교장은 일본과 중국의 협작과 무능한 대응을 거론하지 않았다. 무진과 합의대로 모든 책임을 암중 세력에 전가했다. 그들을 위험 부류로 놓아, 국가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피력한 것이다.
교장의 공표는 한·중·일 모두에게 가장 합당한 선택이 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작게나마 체면치레했고, 한국으로선 두 국가에 빚을 지웠다.
-교류전의 우승은 한국입니다.
암중 세력의 위험성을 거론하면서도 교류전의 우승을 확정했다. 이는 상징성이 있었다. 외부의 방해에도 교류전이 무사히 치러졌다는 의미였다.
문제가 있었지만, 막아 냈고, 해결되었다는. 희생을 무릅쓰고도, 생도들을 무사히 지켜 냈다는 점이 중요했다.
-시상식은 5일 뒤에 열겠습니다.
통상적으로 시상은 교류전이 끝나는 즉시 치러지지만, 사태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조사를 하느라 어수선하기도 했던 터라, 한·중·일 여론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실상, 알려지지 않은 세력이 자국의 행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암중 세력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조사에 들어갔다.
각국 정부가 암중 세력의 조사에 착수할 때, 아카데미 회의실에 모인 각국의 교관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겉으론 교류전을 망친 책임 소재를 다투는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 정말 이놈…… 생도에게 MVP를 주자는 겁니까?”
“마치 내 제자라서 혜택을 주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먼.”
“……그런 뜻으로 말하진 않았습니다.”
“하면, 어디가 문제인가? 나름 절차대로 평가했는데.”
“그것이…….”
교장의 주관적인 평가라고 하기에는 절차를 따랐다.
개인전 우승에 생도의 목숨을 구했고, 암중 세력의 음모를 해결했다. MVP를 주지 않을 방도가 없을 만큼 완벽한 성과였다. 이보다 훌륭한 업적을 이룬 생도는 아카데미 역사를 찾아봐도 없을 정도로 전무후무한 역대급이다.
‘그래, 훌륭하다. 한데 돈 달라잖아!’
‘1,000억이 누구 애 이름인가?’
‘그 돈을 받고 MVP까지 꿀꺽하겠다니, 날강도나 다름없잖아!’
‘차라리 권후에게 주는 편이 낫겠군!’
문제는 누구도 그 1,000억에 대해서 언급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들 누설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밝히는 즉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태의 경위를 숨겨야 하는 일본과 중국의 교관은 속만 태울 수밖에 없다.
하물며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1,000억이나 받아 처먹었다. 그 천문학적인 액수에 얼마나 황당했던가.
처음에는 전부 다 해선 줄 알았다. 그래도 과하다고 여겼거늘, 인당이란다.
교관들이 MVP 선정에 애를 태우는 이유는 또 있었다. MVP가 되면 부상으로 각국의 s급 이상의 정수를 준다. 대대로 교류전의 MVP가 후작급 이상의 헌터가 되는 연유였다.
-맹호불굴.
-불사가호.
-절대신력.
마나의 정수는 종류에 따라서 스텟 각각에 영향을 준다. 그중에서도 s급의 정수는 복용 시 효과 대비 부작용이 적었다. 하급 정수로도 기연을 얻는 예가 있기는 하나, 반작용을 무시할 순 없다.
맹호불굴은 정신력, 불사가호는 내구력, 절대신력은 체력.
최소 한 단계 이상 스텟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성장 잠재력을 올려 주기에 누구나 탐을 냈다.
특히 이미 굳어 버린 각성자와 비교해 성장 잠재력이 높은 생도에겐 천고의 영약이었다.
s급 마나정수는 국가적으로 최고 엘리트에게만 주어지기에 교관들은 난색을 보였다.
지금도 망나니처럼 제멋대로 사는 놈이 마나정수까지 먹어 봐라. 한국을 넘어 일본, 중국에서도 날뛸 게 분명했다. 그런 망나니는 권왕 하나로 족하다.
궁극적으로.
‘이놈이 잘되는 게 싫다!’
‘사고로 부상(副賞)이 없어졌다고 할까?’
‘내가 먹고 말지!’
남궁천과 시게노는 무진이 MVP까지 되어 설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놈은 자신들의 이름까지 팔아 가며 돈을 뜯는 후안무치의 소산이었다.
MVP는 상징성이 강하기에 수상자는 협의를 통해서 바꿀 수도 있었다. 지나친 억지가 섞이면 후일 문제가 될 순 있으나, 속은 시원할 테니.
결론은 간단하지만, 끝이 나지 않았다. 회의가 지루해진 교장은 작게 중얼거렸다.
“별것도 아닌 것을.”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혼잣말일세.”
“다 들렸습니다!”
“귀가 밝구먼.”
자고로 교장과 사부와 제자는 하나였다. 누가 그 나물에 그 밥 아니랄까 봐, 어디서든 난장을 까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로 치부하기에는 규모가 워낙 컸다.
“별것이 아니라니요! 마나정수의 효용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본국을 모독하는 발언입니다.”
“만년삼왕, 대마법사의 특제 마나정수, 드래곤하트.”
“사과를 해도 부족한 판국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는 겁니까?”
“이게 그동안 그 아이가 먹은 걸세.”
이 새끼 대체 뭐야?
하나같이 sss급 영약과 정수였다. 자신들이 주기 아깝다고 했던 정수들과 비교하면 차원이 다르다. 돈이 있다고 구할 수도 없으며, 천운이 따라야 얻을 수 있었다.
천고의 영약들을 혼자서 홀라당 처먹었다고?
아니 그 전에 그걸 왜 줘?
발견 즉시 복용해도 부족한 판국에 엉덩이에 뿔 난 망아지에게 주다니, 한국의 칠대 가문과 길드는 미친 건가?
아끼면 똥 된다는 정확한 사례였다.
“줘봤자 고맙단 말도 못 들을걸.”
“흠, 그러면 안 줘도 되겠군요.”
“맘대로들 하시게. 나는 MVP만 주면 그만이니.”
“지금 말장난하는 겁니까?”
“공정해야 할 교관이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이리 사리 분별을 못 하다니, 이래서야 생도를 바르게 가르칠 수가 있겠는가.”
큭!
교장의 정론에 교관들은 숙연해지기는커녕 울컥! 했다. 저 인간에게 저딴 말을 듣다니. 하지만 지극히 맞는 말이었다. 무진에게 MVP를 주지 않으면 대체 누구에게 주겠는가. 사실 회의에서 논쟁을 벌여 봤자,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나 처먹었으니 우승했겠지.’
‘이제 보니 전부 약빨이었구나.’
‘역시나 한국의 비밀 병기였어!’
‘우릴 방심시키기 위해서 그랬구나!’
교장이 어떤 말을 해도 이젠 곧이곧대로 듣지를 않았다. 꿍꿍이가 있는지부터 생각하게 했다. 개인전을 시작할 때부터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포기한 척한 것이다.
‘기연 약탈꾼이라? 별명 하나는 기똥차군.’
회의는 계속되었다. 암중 세력은 본국에서 결정할 사안이다. 자신들은 최대한 한국이 얻을 이득을 줄여야 했다.
‘그만할까?’
어째 시간을 벌었더니, 손해만 쌓이는 것 같다.
교장이 말 한마디를 던질 때마다 궁지에 몰렸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선심을 쓴다. 그 꼴이 하도 같잖아서 열 받게 하기엔 충분했다.
‘좋구나. 후후후후.’
교장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후련한 기분이다. 일본, 중국에 갈 때마다 교장들이 얼마나 무시를 했던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졌다.
‘이번에는 내가 찾아가마.’
이런 좋은 먹잇감을 한 번으로 끝낼 순 없지.
너희들도 내 제자 맛을 보거라.
***
한·중·일 교관이 모여 회의하는 동안, 무진은 지수와 함께 일룡, 제갈비, 미츠키, 하야토와 만났다.
사람들이 있으면 곤란하다고 하여 아카데미의 빈 교실에 모였다.
무진은 인벤토리에서 커피 머신, 원두, 우유, 크림, 휘핑크림을 꺼냈다. 차곡차곡 책상 위에 올려놓자, 순식간에 커피 전문점이 되었다.
헐!
일룡, 제갈비, 하야토는 어이가 없었다. 인벤토리에 무기, 장비, 아이템, 포션을 넣는 경우는 봤어도 커피 머신이라니?
미츠키는 당황하는 생도들을 보며 키득거렸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커피를 타는 무진을 보았다. 인공 던전에선 미친놈 같았지만, 돌이켜 보니 재미는 있었다.
“너 정말, 이상하게 웃기는 놈이구나.”
“우리 무진이가 웃기기는 해도, 이상하진 않아.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지수가 끼어들었다.
교관에게 욕했던 걸 다들 들었기에 미츠키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되레 내숭 떨지 않아서 편해졌다. 대중에겐 일본의 공주로서 격식을 따져야 했다.
“너한테 한 말 아니거든.”
“우리 무진이 커피 만드느라 바쁘잖아. 심심하면 한 판 더 할래?”
“다시 붙으면 그때와는 달라!”
“그래?”
지금이라도 붙어 보자는 지수의 제안에 미츠키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자신도 제법 또라이 기질이 있는데, 이년도 만만치가 않았다. 대결에서도 뼈저리게 느껴 봤지만, 보통 독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기세에서 밀리고 싶진 않았다.
“한 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하지 마, 곧 따라잡을 테니까.”
“어느 세월에? 넌 5만 년이 흘러도 나한테 안 돼.”
지수의 도발력이 나날이 늘었다. 듣고 있다 보면 ‘울컥!’하게 만드는 레벨이었다. 상대를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돌려 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게 진짜!”
“해 보겠다고?”
빡친 미츠키가 기세를 끌어 올리자, 지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숨겨 두었던 진심이 발산되며 공간을 장악했다.
잘 걸렸다, 이년아!
아직 덜 맞아서 그런지, 때와 장소를 구분 못 하고 있었다. 자고로 임자 있을 남사친을 건드리면 재앙이 오는 법이다.
하물며 여자의 복수는 10년도 짧다고 했다. 고작 이 정도의 도발에 넘어오다니, 아직 멀었다, 이년아!
“가자, 결투장으로. 쫄리면 뒈지시고!”
“좋아, 그런다고 누가 겁먹을 줄 알아!”
지수와 미츠키의 강렬한 투기에 일룡, 제갈비, 하야토는 식겁했다. 개인전에서 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때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고난과 역경을 겪을수록 강해지는 케이스가 있다고는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