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강태공(3)
인공 던전의 2차 각성 이후 촬영이 되지 않아서 내막을 알기 어려웠다. 아카데미에선 교관과 생도를 통제해 정보가 새는 걸 방지했다.
‘내 삼대지독인 무혈지독을 단시간 내에 해독할 방법이 있단 건가? 엘릭서라도 있지 않고서야. 이럴 줄 알았으면 일대지독을 쓸 걸 그랬나?’
가장 큰 의문은 일본과 중국 생도의 생존이었다. 무혈지독에 중독된 이상, 생존은 불가능했다. 설령 엘릭서가 있다고 한들, 전부를 구하기는 어렵다. 그만한 양의 엘릭서를 평소에 가지고 다니진 않을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인공 던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기는 해야 했다. 하나, 섣불리 접선해선 안 되었다. 한국을 뒤흔들 대형 사고에도 아카데미의 대응이 생각보다는 느슨했다.
일전에 풍신은 허허실실의 계책을 펼쳐 뒤통수를 쳤다. 그 일로 인해 아카데미에 심은 하수인을 대거 잃었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는다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자칫, 자기 발등을 찍을 수 있기에 신중해야 했다.
‘골치 아프게 하는군.’
의심하지 않는다고 자신하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교장의 정보력이 보기보다 대단했다.
그래서 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풍신의 이력을 고려하면, 그는 실전에 강한 스타일로 전략적이진 않았다. 이번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계획을 방해하는 존재가 드러날 줄 알았다.
‘당장은 지켜봐야겠군.’
주변의 감시가 없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평소대로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풍신이 또다시 꾀를 쓰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이상, 불필요한 의심을 살 필욘 없다.
‘암고양이의 인내가 폭발하겠는걸.’
그건 그거고. 당장은 조용히 지낼 심산이다. 조직에 대한 충성보다 연구가 더 중요했다. 특히 이번 삼대지독의 해독은 알아봐야 할 문제였다.
***
2일간의 심문.
취조실에서 나온 남궁천과 시게노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돌아가는 사태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를 뒷받침 하듯 취조실은 선혈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군.”
“이토록 지독한 심령 금제는 처음이네.”
최악을 고려했더니, 현실은 더한 최악이었다.
사로잡은 배신자를 잃은 것도 부족해, 함께 심문했던 자마저 머리가 터져 버렸다. 처음 심령 금제가 발동하자, 가문의 비전인 창룡후와 금혼술식을 동원했었다. 이제는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정체를 묻기가 무섭게 칠공에서 피를 토하다 머리가 터졌다.
알아낸 거라곤 배신자의 배후에서 교류전을 망치고, 한·중·일을 이간질한 암중 세력의 존재 여부가 전부였다. 그들이 어떤 단체이며,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여전히 베일에 싸였다.
‘심상치 않은 놈들이다.’
‘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 거지?’
심령 금제의 지독함뿐만 아니라, 한·중·일 아카데미 전체에 마수를 뻗쳤다. 정체를 모른다고 해도, 간과해선 안 되었다.
쯧쯧!
휙!
혀를 차는 소리에, 남궁천과 시게노가 고개를 돌렸다. 벽에 기댄 채 고개를 작게 흔드는 녀석이 있었다. 정체를 확인하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꼴 보기 싫은 녀석을 이런 상황에서 마주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염려가 돼서 왔는데, 결국 다 죽였네요.”
“염려? 의도한 바는 아니고?”
“찔러보시는 거면,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
남궁천과 시게노는 불리한 형국을 타개할 방도로 적반하장을 시전했다. 생도라면 예상과 다른 대응에 당황할 줄 알았다. 하나, 어쭙잖은 수작은 씨알도 안 먹혔다. 곧바로 속내를 간파당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순순히 받아들일 순 없다. 남궁천과 시게노는 최대한 물고 늘어졌다.
“이따위 말도 안 되는 금제였으면, 미리 언질을 줬어야지.”
“역시 호의가 계속되면 호구가 되네요. 정 그렇게 못 믿겠으면 이대로 발표하면 됩니다. 옳고 그름은 한·중·일의 공정한 여론이 판가름하겠죠.”
정신 나간 놈인 줄 알았거늘.
무진의 대응은 지극히 정석적이었다. 왈가왈부 언쟁을 벌여 봤자 답이 없는 평행선이라면 여론의 판단에 맡기자는 것이다.
남궁천과 시게노로선 가장 최악의 결말이다. 당연히 날조와 왜곡을 선호했다.
궁지에 몰리자, 궁색해졌다.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고선, 사내대장부라면 신의를 지켜야 하느니라!”
“제 말을 믿지도 않았으면서 신의부터 보이라니. 욕심이 과하시네요.”
“……믿는다. 그러니까 이쯤 하자.”
“병만 주고 자가 치료하라는 건가요? 제 여린 마음은 이미 난도질당해서 아픈데요?”
여리긴 누가 여리단 거냐?
남궁천과 시게노는 어이가 없었지만, 반문하지 못했다. 갑을 논쟁에서 자신들은 철저하게 을이었다. 저 요망한 녀석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순간 국가의 역적이 되는 수가 있었다.
또한, 저 짜증 나는 놈을 전적으로 믿어야 하는 현실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다 엎어 버릴까?
남궁천과 시게노는 격렬한 충동을 느꼈다.
무진의 브리핑을 듣기 전까진.
“서로 짜고 합공하려다가 함정에 빠져서 이용당하고, 증거물을 잡아서 갖다 줬더니 다 죽였다고 하면 정확하네요.”
“……우리가 잘못했다!”
저대로 발표하겠다고? 그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다.
문장의 어디를 봐도 빠져나가기 힘든 함정이었다. 협작을 하다가 암중 세력에 이용당하고, 배신자를 색출했더니 심문하다 죽였다고 한다면 과연 세상이 자신들을 어떻게 볼까?
차라리 상황이라도 주도했다면 그나마 낫지. 알지도 못하는 세력에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밥상을 차려 떠먹여 줬는데도 토해 낸 격이다.
무능 그 자체였다.
자초지종이 밝혀지는 순간 자신들은 한·중·일의 역사에서도 가장 무능력한 인물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차라리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말지, 그 꼴을 대체 어떻게 본단 말인가.
‘외통수에 걸렸구나!’
‘교장실을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어!’
교장실에 영상 녹화기가 있다고 했다. 점혈을 풀지 못해서 교장을 찾았다가 과식(過食)하고 돌아간 일까지 더해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지 남궁천과 시게노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누구는 라면 먹다가도 잘리는데.
찰나, 살인멸구를 떠올렸지만, 상황을 더욱 악화하는 수가 있었다. 이 집요하고, 영악한 놈이 대비하지 않았을 리 만무했다.
“권왕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져서 좋을 건 없지 않느냐.”
“사부님은 가문에 계신다고 말했을 텐데요.”
실제로도 사부님은 가문에서 웨이트 중이었고, 조사해 봤자 알리바이는 확실했다. 의혹만으로 사부님을 걸고넘어지지 못한다.
남궁천과 시게노는 이놈이 다른 꿍꿍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발표하면 그만인데, 굳이 찾아와서 주저리주저리 떠들 필욘 없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귀국의 생도와 맺은 계약을 보증해 주세요.”
“무슨 계약인 줄 알고, 보증을 서?”
“아시다시피 귀국의 생도들이 무사한 게 자기들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제가 치료제를 적시에 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타국에서 불귀의 객이 됐을 겁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무인의 협이다. 설마 목숨값으로 흥정하겠다는 것이냐?”
“그런데요. 혹, 공짜 좋아하세요?”
남궁천과 시게노도 생도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무진의 치료제가 아니었으면 위험했다고. 그래도 그렇지, 목숨을 가지고 거래하다니 파렴치한 행위였다.
이를 거리끼지 않고 밝히는 무진의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사람이라면 수치스럽게 여겨야 함에도 태연했다.
하나, 무진으로선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다. 기껏 백신을 개발했더니 세상을 위해서 공짜로 베풀라는 심보와 다르지 않았다.
일단 사람부터 구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지만, 살았으면 돈은 내야 할 것 아닌가. 누군 땅 파서 장사하나.
“그래서 얼만데?”
“1,000억이요.”
‘얼마면 되는데!’를 외쳤던 시게노는 입을 닫았다. 남궁천도 예상을 웃도는 액수에 기겁했다. 헌터의 수입이 일반인과 비교하면 크긴 해도, 1,000억은 가볍지 않은 액수다. 그 정도를 벌려면 일단 이천 억은 벌어야 세금 떼고 가져갈 수 있었다.
“전체겠지?”
“개당인데요.”
40명이면, 4조다.
남궁천과 시게노는 전귀(錢鬼)를 보고 말았다. 1,000억만 해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4조라니! 남궁세가의 한 해 영업이익에 필적했다.
하나,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린 치료제였다. 가치를 논한다면 가볍지 않았다. 그렇다고 액수 그대로 내어 주었다간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었다.
일단 깎아 봤다.
“2조!”
“4조.”
“2.5조!”
“4조.”
“3조!”
“4조!”
이런 조같은 새끼가!
1조만 해도 하루에 1억씩 써도 나중에는 돈이 불어나는 기적을 맛볼 수 있었다. 국가의 기간산업 단위의 투자에 실패하지 않는 이상, 평생 놀고먹다 배 터져 뒈질 액수였다.
“정녕, 4조를 다 받을 셈이냐?”
“성운 그룹의 진 회장님이 보증하는 정가예요. 제가 더 받는 것도 아니고, 귀중한 치료제를 날렸는데 당연히 받아야죠.”
“국제적인 문제가 될 수 있어!”
“사적인 일입니다.”
“사람을 구하는 데 이해타산은 옳지 않아!”
“속물인 저와는 다른 분들이셨군요.”
울컥!
무진이 자신을 한없이 낮추자, 남궁천과 시게노는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들이 한 짓이 있기에 인지상정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되레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다.
“적십자도 돈이 있어야 운영이 됩니다. 하물며 공짜는 늘 빚으로 남기 마련입니다. 그런 불편한 관계를 원하세요?”
“……아니다.”
“……보증하마.”
남궁천과 시게노는 빠져나가기 힘들다는 걸 깨닫자 패배를 인정했다. 선의로 치부해 버리면 대중화와 대일본은 공짜만 밝히는 수전노 국가가 된다.
허허!
무진이 계약서를 꺼내자, 남궁천과 시게노는 허탈하게 웃었다. 철저한 준비성을 논하기에는 내용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맞는다. 이놈의 세 치 혀에 완벽히 놀아난 것이다.
하나, 이제 와 거절해 봤자 무의미했다.
한편으로 궁금하다.
“굳이 우리의 보증까지 필요한 것이냐? 그 아이들은 본국의 중요한 인재이자, 명가의 자손들이다.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는다.”
“저도 이 계약서를 꺼낼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살아 보니 순리대로 되는 경운 많지 않더군요.”
남궁천과 시게노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정하고 싶으나,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기도 했다. 결국, 계약서의 공개 여부는 생도들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부디 소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마.”
“그러면 치료는 없던 일이 될 겁니다.”
협작과 중독만 내막에서 사라진다면 남궁천과 시게노도 할 말이 생긴다. 최소한 작당 모의를 했거나, 무능하단 소린 듣지 않는다.
“아, 보는 눈은 저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망할 놈!”
일본과 중국 생도들이야 국가, 가문, 문파의 명예가 걸려 있으니 입을 다물겠지만, 우리 생도들은 달랐다. 아무런 이득도 없이 공짜로 입을 닫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고 알력 행사를 하다간 무진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감당하기 어렵다.
‘양심도 없는 놈. 아주 등골을 빼먹는구나!’
‘돈이야 많을수록 좋다지만, 지독한 놈이다!’
이 정도면 가히 국가급 등골 브레이커였다. 앞으로도 엮이지 않는 편이 신상에 이로웠다.
한편으로 무서운 놈이기도 했다. 세 치 혀로 세상을 쥐락펴락할 간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