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강태공(2)
말로는 좋게 타이르는데, 하나같이 먹이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이걸 듣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머저리가 분명했다. 그러나 아쉬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틀린 말을 하지도 않았다.
우물을 파야 하는 남궁천과 시게노는 가까스로 분기를 다스리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기경팔맥과 12정경에 대해서는 교관님들도 알고 있을 테니 생략할게요. 우선 경로의 순서와 내력의 강도가 아주 중요해요. 역의 역에 각각의 혈에 주입하는 내력의 양을 조절해야 하거든요.”
“어렵게도 꼬아 놓았군.”
“어렵긴요? 점혈은 원래 풀리라고 있는 거잖아요.”
울컥!
무진의 응수에 남궁천과 시게노는 재차 머리 뚜껑이 열릴 뻔했다. 돌려 말하고 있을 뿐, 너희들이 무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교장도 부족해서, 제자라는 것도 똑같다 못해 판박이였다. 어떤 면에서는 교장보다 더욱 얄미웠다.
팥 심은 데 대왕 팥이 나왔다고 해야 하나.
교장도 한술 더 떴다.
“덕담은 그만하고, 어서 해혈법을 가르쳐 주거라.”
“예, 교장 사부님.”
남궁천과 시게노는 심신을 다독인 후, 무진의 해혈법을 몸소 체험해야 했다. 말로 가르친다고 되지 않기에 실제로 겪어 볼 필요가 있었다.
해혈의 과정을 알아 갈수록.
‘이토록 정교한 점혈법이라니.’
‘이걸 직접 행했다고?’
어째서 점혈을 풀 수 없었는지 해혈법을 체험할수록 깨닫게 되었다. 내력의 정교한 컨트롤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러니 뭘 해도 방도가 없지.
‘이걸 순순히 알려 준다고?’
‘보통 배포가 아니구나.’
점혈법이 거기서 거기긴 해도, 미세한 차이가 결과를 만들어 내고 독문 수법이 된다.
무진의 해혈법은 권왕가의 비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걸 외인에게 가르쳐 주는 것부터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간 열 받게 했지만, 이번만큼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남궁천과 시게노에겐 무진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말이 나오기 전까진.
“아차, 권왕 사부님한테 허락 안 받았는데.”
“이제 와서 그딴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
“에이, 몰라. 저는 허락했으니까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자기만 허락하면 될 일인가, 이런 중차대한 결정은 당연히 가문의 어른에게 허락받고 해야 했다. 무턱대고 가르쳐 준다면 기사멸조였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나중에 사부님한테 허락받으세요. 그럼 되는 일 아닌가요? 우리 사부님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대해처럼 마음이 넓으신 분이세요.”
“……(빠득)!”
누가 마음이 넓어?
자타 공인 천하의 망나니로 소문난 권왕이 마음이 넓다니.
그동안 들어 본 개소리 중 최고였다.
“껄끄러우면 안 배웠다고 하세요. 우리 사부님이 별것도 아닌 걸로 날 세울 분도 아니고요.”
“이……(새끼)!”
이토록 무책임한 놈이라니!
남궁천과 시게노는 생각했다. 이놈이 자신들의 제자였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편으로 다행이기도 했다. 제자였다면 제명에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점혈을 풀었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이놈들, 심령이나 저주 비슷한 금제가 있어요. 잘못했다가는 알아내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보기엔 이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나아요.”
“알고 있으니, 그만해도 된다.”
“하긴, 어련히 잘하실까. 제가 노파심에 그런 거니 맘 상하지 마세요.”
“안 상했다!”
미심쩍어하는 무진의 눈빛이 맘에 들지 않는 남궁천과 시게노였다. 본국에선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대접이었다.
반면 자신들이 어쩌다 이런 한심한 처지가 됐는지 한숨이 흘렀다. 더는 교장실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심문은 이따가 하고, 시장하실 테니 식사부터 하세요.”
“됐다.”
“그러지 말고요. 아~~~!”
“이놈이, 어디다 손을!”
무진이 새우튀김을 가까이 대자, 남궁천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 쳐 내 버리려고 했는데, 튀김의 고소한 향이 뇌리를 강타했다. 더욱이 어제부터 한 끼도 못 먹었었다.
앙, 바사사삭!
스르르르!
의도와는 달리 새우튀김을 먹은 남궁천의 동공이 탕산 대지진처럼 흔들렸다. 튀김 하면 대중화, 대중화 하면 튀김이거늘.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튀김이란 말인가.
미미!
우마이, 우마이!
시게노도 스키야키의 국물 맛에 혀를 내둘렀다. 사안이 바빠서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수저를 놓을 수 없게 했다. 그동안 심력의 소모가 컸는지, 시장한 것도 있었다.
이건 환상의 음식이었다.
요즘 트렌드에 맞추어서 퓨전식 만한전석의 진가였다. 요리를 내올 때마다 접시가 비어 가자 교장도 가만있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쌓인 시게노와 남궁천의 식탐이 폭발하고 말았다.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무인의 신체는 항상 다이어트에 최적화를 이루었다. 요요 없는 완벽한 다이어트를 원한다면 무인의 훈련을 해야 했다.
우걱, 후르륵!
바삭, 사르르!
교장실에 먹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10분이 흘렀을 뿐인데, 만한전석의 100가지 요리가 비었다.
헉!
현실로 돌아온 시게노와 남궁천은 기겁했다. 자신들이 뭔 짓을 했는지 알기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취조를 해도 부족한 판에 배가 터지도록 처먹었다.
꺼억!
이 판국에 나른하고, 졸리다.
“많이 시장하셨나 보네요. 잘 드시니 보기가 좋습니다.”
“……우린 이만 가 보겠다.”
“어서 가 보세요. 바쁘신 분들을 붙들고 있었네요.”
“언제든 오늘 일은 갚아 주마.”
“대접받자고 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다, 갚겠다. 대신, 외부에는 발설하지 말았으면 한다.”
“아무렴요, 저처럼 입이 무거운 사람도 없답니다.”
“……고맙구나.”
남궁천과 시게노는 급히 일어서서 교장실을 나갔다. 대화를 나눠 봤자 속만 뒤집혔다. 잘 먹은 음식을 토하고 싶진 않을 테니 서둘렀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자신들이 교장실에 한 짓도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되었다.
“어떨 것 같으냐?”
“죽겠죠.”
“큰일 났구나.”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이상 어쩔 수 없어요.”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저들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거잖아. 암중 세력의 의심을 지울 필요도 있고.”
“그런데요?”
무진의 낯짝 두꺼운 뻔뻔한 대응에 교장은 허탈한 웃음으로 때웠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정신은, 시대를 막론했다.
그리드 넘버를 순순히 남궁천과 시게노에게 넘겨준 연유가 있었다. 관리자급이라 중요 정보를 알고 있을 순 있겠지만, 조던에 비해 전투력만 강할 뿐 서열은 낮았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 내에서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욘 없었다.
암중 세력이 순순히 속아 주지 않아도 남궁천과 시게노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 줄수록 시선을 돌리는 데는 제격이었다. 저들도 생각이 있다면 자신과 지수를 의심하진 않을 테니까.
불필요한 연기는 끝났다.
교장의 표정이 굳었다. 이번 사태는 예측하지 못한 변수의 연속이었다. 무진의 설명을 들었을 때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여 일본과 중국 생도가 죽기라도 했다면, 그 책임은 오롯이 아카데미의 몫이다. 자리보전은커녕 국가적인 위기를 초래한 역적이 될 수 있었다. 하물며 마지막에 등장한 자는 생도들을 전멸시킬 힘을 지녔었다.
“내부에 동조자가 없이는 불가능할 일이에요.”
“그렇겠지. 하나 심증만으론 처리할 수 없는 사안이다.”
“알고 있어요. 지금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수사를 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래야 어떤 식으로든 주고받을 테니까요. 이후에는 증거를 확보하는 즉시 처리하면 됩니다.”
“너는 가차 없구나.”
“적이잖아요.”
“사람이라면 그간 쌓인 정을 하루아침에 버리긴 어려운 일이야.”
“정을 쌓는 건 쌍방이어야 하죠. 다른 쪽은 이용하기 편한 관계일 뿐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지.”
“그렇다고 봐주진 않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본인 목숨을 버릴 수 있나? 개인적인 사정을 일일이 봐주다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유 불문, 동조했다면 무관용의 칼날이 필요했다.
“네 가족이 그래도?”
“아니요.”
단칼에 부정해 버리자, 교장은 말문이 막혔다.
남의 일에는 칼같이 처리하면서, 자기 가족에게는 관대했다. 이를 두고 내로남불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고민도 없이, 너무하는 거 아니냐.”
“제 아버지가 그럴 리도 없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한들 아들이 아버지를 외면할 순 없잖아요.”
무진은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아버지가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 세상에 절대란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렇다면 불의를 처단하면 된다. 자신은 정의롭지 않더라도, 아버지를 외면하진 않는다.
처리할 수 있으면 해라.
선택은 자유지만, 책임은 자유롭지 않을 거다. 아버지 왈, 이왕 할 거면 최선을 다하라고 하셨으니.
“그런데 진짜로 권왕이 오신 것이냐?”
“사부님은 집에 계신데요.”
“그럼 그건 뭔데?”
“피스트킹이라잖아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냐?”
“아무튼 저하곤 상관없습니다.”
교장은 긴가민가했다.
아닌 것 같은데, 또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허황되었다. 하나, 권왕이 인공 던전에 개입했다면 후일 빌미가 될 수 있었다. 굳이 권왕의 개입을 인정할 필욘 없다. 그러니 이 녀석도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것이 분명하다.
“저는 생도들의 안정을 위해서 나가 보겠습니다.”
“차라리 눈에 안 띄는 편이 나을 듯싶구나.”
안정은커녕 무진을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나, 불행하게도 코가 꿰인 지 오래였다.
***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사내는 샤워 후,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간단한 안주와 맥주 캔으로 피로를 달랬다. TV를 틀어 보니, 아카데미 소식으로 뉴스가 시끄러웠다.
흠.
뉴스는 촬영된 영상을 편집하여 내보내고 있었다. 돌아가는 정황에 대한 뉴스의 평가가 채널의 성향에 따라 달랐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지만, 단편적인 영상만으론 사태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아카데미에서 내막을 숨기려 한다는 음모론이 대세라, 한·중·일 여론은 대단히 시끄러웠다.
밝혀진 정황상 교관이 체포되었고, 신분을 감추려는 의도가 짙었다. 생도들을 관리하는 교관의 신상 명세가 알려지며 의혹은 점점 부풀었다.
오늘도 이런데, 내일만 되면 의혹은 일파만파가 될 테고, 중국과 일본에선 거센 항의와 질타가 쏟아질 것이다. 한국으로선 내막을 밝히고, 공평무사히 사건을 처리해야 했다.
‘완전히 실패했군.’
지금만 해도 온통 아카데미 인공 던전 사건으로 떠들썩하지만, 그가 보기엔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한·중·일은 다시는 온전한 관계로 돌아오지 못한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의 집중포화를 받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야 했다.
‘그리드 상위권인 마이트와 썬더가 당했을 줄이야.’
교관과 생도로는 그리드 넘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부 달려들어 봤자, 하루살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