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4)
‘평소에 대비를 어떻게 하면 이래?’
지수는 눈앞에서 벌어진 사태를 볼수록 점점 더 꽉 잡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절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토템이었다. 또한, 자신도 무진처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태웠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집중해.’
‘알고 있거든.’
모든 일이 그렇듯, 이대로 순탄하게 흐르지 않고 변수가 또다시 발생한다면 무진이라도 완벽한 정리는 불가능했다.
‘운에 맡기는 건 성정에 안 맞아.’
운칠기삼을 맹신해선 안 되었다. 이번 사태는 두 번의 행운이 겹친 성과였다. 물론, 운이 없다고 해도 해결 방법이 없진 않지만, 실력 행사를 해야 했다.
‘지수를 전면에 내세우더라도, 그 이상은 곤란해.’
강환에 옴짝달싹 못 하는 자는 그리드 넘버에 속하는 자일 것이다. 일전에 조던과 비교하면 전투력은 훨씬 높지만, 심계가 약했다. 그리드 내에서도 일종의 행동대장일 가능성이 크다.
순수 전투력만 놓고 보면 칠대 가문의 최고 장로급 이상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 자를 지수가 처리한다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간섭이 들어올 것이다.
‘사부님이라면 사실 만큼 사셨으니 괜찮지만.’
따지고 보면 지수도 회귀하기 전의 나이를 고려하면 순수 연령이 이제는 마흔이 넘는다. 반면 자신은 고작 열일곱 살 생도에 불과했다. 살아갈 날이 구만리인 생도에게 부담을 주어선 안 된다.
그 이전에 사부님이 어디 가서 비명횡사할 만큼 나약하진 않았다. 하나, 확신은 금물이었다. 그리드는 암중 세력의 중간 관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자들이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까지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지수의 말대로 스케일이 세계급이긴 하네.’
회귀자인 지수조차도 암중 세력의 주인은커녕 수뇌부의 실체를 모른다. 빙산의 일각만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세력이라면 작금의 준비조차도 부족한 면이 있었다.
대비를 하면 할수록 첩첩산중이라니.
‘방심했구나.’
자조해야 마땅했다. 교류전을 빼놓고 계산하기가 무섭게 상대는 그 빈틈을 정확히 찌르고 들어왔다.
진짜 전력을 고려하진 않았겠지만, 성패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았다. 잘못했으면 자신의 패를 드러낼 뻔했으니 말이다.
‘가시 없는 장미는 없긴 하지.’
성격은 어떤지 몰라도, 아주 날카로웠다. 이전의 조심스러웠던 조던과는 달리 파격적인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처할 필요성이 생긴다. 상대적으로 대비하기가 까다로워졌다고 봐야 했다.
‘재밌네.’
계획한 대로만 되었다면 흥미가 식었을 텐데.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그 이상으로 되돌려 주어야 했다. 어설픈 짓을 하면 뼈아픈 대가는 인지상정이었다. 누가 더 머리 꼭대기에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기도 하고.
‘그건 다음에 하고.’
목전에 있는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시야를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발밑을 보지 않는 자는 때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
슬슬 피스트킹의 역할이 끝나 가고 있었다.
착.
무진의 신호를 받은 피스트킹이 강환을 멈추고 내려섰다.
무려 5분 동안이나 강환을 발출했다. 속빈 강환이라도 내력의 소모가 엄청나거늘. 흔들림은커녕 호흡조차도 변화가 없자 한·중·일 생도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절대고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그야말로 일인무적의 살인 병기네!’
‘절대경의 고수라고 해도 내력이 무한은 아닐 텐데, 저게 말이 돼?’
‘진짜 로봇인가?’
‘혹, 전설의 신화공령체?’
아는 만큼 보인다고, 경지가 높을수록 권왕의 실체에 소름이 돋는다. 강환의 편린만으로도 자신들 따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앞으로는 권왕가를 가볍게 여길 수가 없게 되었다. 무진과 지수의 약진을 고려하면 권왕가의 미래는 탄탄했다.
크으으으으!
크레이터 속, 미약한 신음을 내며 숨을 헐떡인다.
마이트가 살아 있었다.
그 엄청난 강환의 폭격에서 생존하다니, 또 다른 의미로 놀라웠다. 원폭에서도 살아남을 쇠심줄보다 질긴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끄륵, 끄륵!
다져 놓은 털 빠진 고깃덩어리가 된 상태에서도 꿈틀거리며 재생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놀라운데, 원래대로 돌아오려고 하다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지 않으면 끝나질 않을 질긴 생명력이다.
착.
허공에서 내려선 피스트킹은 고깃덩어리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보통은 질릴 만도 한데, 투구 사이로 비친 광망은 로봇처럼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극강의 부동심이 되레 소름을 돋게 했다.
크으으으으!
후으으큭!
겨우 살아남은 마이트는 힘겹게 숨을 몰아서 쉰다. 성대마저 녹았는지 숨을 쉴 때마다 거친 쇳소리가 난다. 신체가 재생되고는 있지만, 생체진기마저 소모되어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지경에도 마이트는 노려보며 쥐어짜듯 독기를 발산했다.
“……권왕…… 비겁하구나…… 부끄럽지도 않더냐……!”
“나는 피스트킹이다. 또한, 전장은 승자의 권리를 행하는 곳, 패자는 구차한 변명을 할 뿐이다.”
피스트킹이 손을 들었다.
그 한 수로 끝장을 내려는지, 손끝에 강기가 맺혔다. 회복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아메바가 아닌 이상 머리가 잘리면 그걸로 끝장이었다.
“멈춰!”
일대를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
아?
아무도 당황하진 않았다. 목소리가 익숙하다 못해 이제는 질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쟨 또 언제 저기에 갔데.
무진이 피스트킹의 배후에 있었다.
위험에 가장 먼저 반응하여, 가장 멀리 있었으면서. 막타를 칠 기회가 생기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존재했다.
누구보다 빠르고, 기민하며, 철면피였다.
요즘을 살아가는 현대 직장인의 인간 군상처럼. 얄밉지만, 이런 얌체들이 승진이 잘된다. 우직하게 능력만 믿고 설치면, 사내 정치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피스트킹께서는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제가 책임을 지고 마무리할 테니, 어서 고우 백 홈 하세요.”
저런 미친놈!
볼 장 다 봤으니, 필요 없다 이건가.
게다가 스승을 스승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한영어를 남발하고 있었다. 서로 짜고 친다고 해도, 도저히 봐 주기 힘든 꼴불견이었다.
저런 버릇없는 제자에겐 따끔한 훈계가 있어야 했다. 권왕의 분노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그러겠다고?
왜?
위험에 처한 제자를 구하고, 막타를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저걸 가로채는 건, 차려 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겠다는 도둑놈 심보였다.
화도 안 나?
‘권왕이 저런 대인이었어?’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잠깐? 손녀는?’
‘일전의 일로 제자에게 부채감을 느끼는 건가?’
‘가문을 위해 제자를 외면한 건 조금 그렇지.’
‘아니면 서로 딜을 한 건지도.’
‘계약 사제, 충분히 의심스러운 부분이야.’
이해되면서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화룡점정은 중요했다. 이대로라면 모든 공을 무진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권왕의 개입은 비공식적이었고, 눈 가리고 아옹이긴 해도 정체를 숨겼다.
권왕이 직접 아니라는데, 공적을 누구에게 주겠는가. 결국, 줄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슝!
머무른 자리도 아름답게.
피스트킹이 귀신처럼 사라졌다. 눈앞에서 사라졌는데도, 어디로 갔는지 모를 지경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스피드였다.
피스트킹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무진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두의 기대를 아무렇지 않게 초월해 주었다.
“결국, 내가 다 했구나.”
……저런 날강도, 날먹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본인의 공으로 돌려세우는 무진의 행태에 다들 혀를 찼다. 우리의 눈이 옹이구멍도 아니고, 저래도 되나 싶을 만큼 뻔뻔하다.
헐!
다 같이 봤는데도, 그 앞에서 당당하게 아니라고 우겼다. 그러나 누구도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하는 답답한 현실이었다.
구명지은의 무진을 욕할 수는 없으니, 다른 타깃을 찾았다. 어차피 욕하나, 안 욕하나 병신이기에.
“장위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
“저런 녀석을 왜 도발한 거야? 미치지 않고서야. 대체 무슨 자신감이래!”
“장위가 괜히 당한 게 아니었어!”
“난 장위가 병신인 줄 알았지. 깊이 반성한다.”
멀찍이 있었던 장위도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적에서 벗어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공적에 대한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았다.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지척 간격은 유지해야 했다.
‘이것들이 날 어떻게 보고!!’
장위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못 들을 욕을 듣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괘씸한 발언을 한 것들을 처리하고 싶었지만, 남의 나라 생도였다.
게다가 지금까지 한 행동을 돌이켜 봐야 했다. 괜한 소릴 했다가는 콩고물은커녕 공적이 되는 수가 있었다. 도망치진 않았다는 흔적이 필요할 때였다. 그래야 아버지한테 할 말이라도 생긴다.
그럴수록 장위는 주목을 받는 무진이 못마땅했다.
‘저 자리가 내 것이어야 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무진이 부러웠다. 저 자식이 모든 공적을 다 가지고 갈 것 같아 배가 아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생도들도 같은 처지였다.
회복 중인 마이트는 머리를 굴렸다. 권왕이 사라졌으니, 조금 더 시간을 번다면 빠져나갈 방도가 생길 것이다. 애송이들이야, 권왕만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제가 쌍으로…… 비겁하구나. 사실이 알려지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으냐…… 헉!”
“점혈할게.”
“……잠깐…… 이러고도 네놈이 무인이더냐! 자긍심……조차 버린 것이냐!”
“응, 이기면 장땡이야.”
“……제자나 사부나!”
권왕가 비전으로 소개한 점혈법으로 마이트의 마나로드를 콕콕 찔렀다. 어찌나 정교하게 찔렀는지, 단숨에 흐름이 끊어지며 실낱같은 마나마저 사라져 버렸다.
“……네놈이…… 사내라면…… 풀어라!”
“혹시, 정정당당 뭐, 이런 거 좋아하는 거였어? 참, 염치가 없네. 그런 걸 좋아했으면 애초에 독을 쓰지 말았어야지. 한·중·일을 이간질하려고 별짓 다 한 주제에 적반하장이 기본 컨셉이냐.”
“……이놈…… 어서 풀지…… 못해!”
“얼레, 독을 품고 있었네.”
“……허튼소리를…… 허억…… 뭘 하려고?”
설마!
한·중·일 생도들은 무진의 다음 행동을 알기에 습격자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긴 했다. 그나마 익숙해져서 아까보다는 충격이 덜한 편이었다.
크아아악!
앞니를 뺐다.
송곳니를 뺐다.
어금니를 뺐다.
그냥 다 빼고 있었다. 독단의 유무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다. 이빨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고, 정 필요하면 틀니와 임플란트가 있었다.
마이트의 재생력이라면 이빨이 또 날지도.
“이…… 악마 같은……!”
발음이 새는 마이트였다.
무진은 신속히 마이트의 목을 쳐 기절시켰다. 또한, 일전에 경험했던 구속구로 마이트의 육신을 꼼꼼히 잠갔다.
푸욱, 푸욱!
마지막으로 마나 핵에 말뚝을 박았다. 그 집요하고 철저한 손 속에 생도들은 혀를 내둘렀다. 저 정도로 했으면 설령 괴인이 탈출한다고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저기서 대체 뭘 더해야 탈출을 막는단 말인가.
휙!
일을 마친 무진이 생도들을 둘러보았다.
움찔!
개인전에서 우승하기는 했어도, 무진을 두려워하진 않았었다. 그러나 단체전을 통해 드러난 무진의 심기와 악랄함은 일반적인 범주를 아득히 초월했다. 일반 생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능숙해,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내가 3번이나 살린 거 잊지 마.”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