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속은 놈이 병신(2)
오싹, 부르르르!
일중의 생도들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연유였다. 당문에서도 방도가 없으니, 자신들이라고 별수가 있겠나. 꼼짝없이 한 줌의 독수가 될 판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생도, 능히 괴짜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녀석이 해독제를 언급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기는 한데,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절박한 현실이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가망이 없다면 모를까, 살 수 있는 방도가 있다면 살아야 했다. 이대로 죽기에는 자신들은 고작 20년도 살아 보지 않았다.
최소한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는 해 봐야지.
“……약이 있으면 어서 내놓지 않고…… 여태 뭘 한 거야?”
“……약을 내놔라, 아니면…… 가만두지 않아!”
“이 악독한, 너희들…… 천벌을 받을 것이다!”
중국, 일본 생도들이 치를 떨며 분노를 표출했다. 해독제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설령 장본인이 아니라고 해도, 저리 여유 만만하게 시간을 끄는 건 도의적으로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후가 맞지 않는다.
한·중·일의 관계를 깨려고 했다면 굳이 해독제를 언급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합리적인 판단을 하자면, 무진이 독을 살포할 가능성은 없었다.
고독이나 만성독이 아닌 이상.
“무진아, 해독제가 있으면 어서 줘.”
“맞아, 쟤들의 행태가 짜증 나긴 해도 죽기를 바랄 순 없잖아.”
“쟤들이 죽으면 우리도 곤란해져!”
우리 쪽 생도들도 다급했다. 어서 빨리 치료제를 건네주기를 바랐다. 저들이 억지를 부리는 게 짜증 나긴 해도, 진짜로 죽는다면 생도 간의 문제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외교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흐음.
모두의 시선이 무진에게 쏠려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오는 가운데서 무진이 머뭇거리고 있자 다들 분노했다. 차라리 없다고 했으면 모를까! 이런 지경에서도 자신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해 왔던 일련의 사태를 보면 능히 그럴 수 있어서 속이 타들어 갔다.
일룡이 마지못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다…… 어째서…… 가만있는……것이냐?”
“그건 그런데, 아깝잖아.”
……?
모두를 공황 상태에 빠뜨리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본인은 대수로울지 몰라도, 어이를 상실하게 했다. 어떻게 저딴 말을 저리 태연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생과 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저런 무책임한 말을 하다니, 인간으로서 최악이었다.
여태 농락했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극에 이른다.
“이…… 자식…… 죽여 버릴…… 테다!”
“화나는 건 이해해. 목숨이 걸려 있는데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는 것도 맞고. 하지만 잘 들어 봐. 이게 sss급 포션이야. 너희들 같으면 내 목숨을 살려 줄 물약을 선뜻 내줄 수 있어?”
“빌어먹을…… 사람이 죽는 판……이라고!”
“어차피 사람은 다 죽어. 하지만, 이 사태를 내가 일으킨 것도 아니고. 나중에 책임은 다른 사람이 질 텐데, 굳이 내가 독박을 쓸 필요도 없잖아.”
“그런…… 무책임한 말을……. 너…… 나쁜 새끼!”
미츠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무진을 저주했다. 한국에 재미난 놈이 나타난 줄 알았는데, 악마 같은 새끼였다. 어떻게 사람이 죽어 가는데, 그 앞에서 난 책임이 없으니 외면하겠다는 말이 술술 나오냐고.
한국 생도들도 뜨악했다. 아무리 친구라도 실드가 불가능한 최악이었다.
“무진아, 그건 좀!”
“그래, sss급의 포션이 아깝기는 해도, 사람을 살려야지!”
“물약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우리 생도들도 무진이 치료제를 내놓기를 바라고 있었다. 잘잘못을 따지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진 몰라도, 이후의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 문파, 길드, 그룹까지 전방위적으로 엄청난 사태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어이구, 성인들 나셨네. 한데 어쩌냐? 쟤들은 구해 줘도, 우리한테 책임을 물을걸. 무조건 우리가 독을 썼다고 할 테고, 자신들이 한 짓은 숨길 테지. 안 그래?”
“……그렇긴 하지.”
이 부분에 관해서는 우리 생도들도 다 같은 마음이었다. 구해 준들, 전혀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되레 적반하장으로 독을 썼다며 교류전의 우승을 박탈하고, 국제적으로 트집을 잡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구해 줘도 욕먹고, 안 구해 줘도 욕먹을 거면, 특급 포션을 아끼는 편이 내게는 훨씬 이득이지. 굳이 그런 욕을 먹으면서까지 구해 줄 이유가 없잖아. 내가 호구…… 호국의 영웅도 아니고.”
국제적인 사태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무진의 언행에 한·중·일 생도들은 조급해졌다. 평소라면 지극히 합당한 말이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약을 줘, 따지지 않을게!”
“……치료제를 주면……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잊겠다!”
미츠키와 일룡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살 수 있다면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더욱이 무진을 비롯한 한국 생도를 보니, 자신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독을 쓴 장본인이라면 굳이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잊으면 곤란하지.”
“……뭐?”
“귀하디귀한 포션으로 치료를 해 줬는데 잊으면 안 되잖아.”
“……무슨?”
이해했다면 이제부터는 의사와 환자로서 대화할 때였다.
다들 실비 보험은 들었지?
도수 치료부터 하자고.
안타깝게도 포션은 비급여거든.
검진은 무진에게, 약도 무진에게. 공정거래와는 상관없으니, 기대는 하지 말아야 했다.
“sss급 만능 치료제의 가격이 얼말까?”
“……헉?”
설마?
다들 기겁했다.
이 와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식견이었다. 최악,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돈으로 흥정하고 있었다. 인간으로선 해선 안 되는 말종 짓을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했다.
“아니, 넌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해야겠어?”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다르잖아. 지금이야 절실하지만, 해독되면 말이 달라지겠지.”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사람 목숨부터 살려야지 않을까?”
“자원봉사를 하시겠다? 우리 상원이가 다 낸다면 아낌없이 베풀게. 참고로 성운 그룹의 진 회장님이 1,000억을 내셨어.”
“……?”
1,000억이란 액수에 목숨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생도들도 말문이 닫혔다. 이 정도면 사람 목숨 수백쯤은 죽여도 될지 모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다만, 돈이 정도(正道)라는 재벌이 1,000억을 냈다면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돈벌레인 그룹의 회장이 아무 이유 없이 돈을 내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것이 부자인 이유이며, 재벌이 되는 연유였다. 빠른 정보와 인풋 아웃풋이 확실했다.
“……주겠다…… 그러니 해독제를 내놔!”
“……줄게…… 내 사비를 털어서라도!”
독으로 인해 말도 하기 힘들어진 일룡과 미츠키는 다급해졌다. 목숨보다 돈이 중요하진 않았다. 그깟 돈 주면 그만이었다. 더욱이 진짜로 그 정도의 효과가 있다면 1,000억이 과한 액수는 아니다.
“모시겠습니다. 호갱…… 고객님.”
***
“결계가 쳐져서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한시가 급한 이때 하필, 결계라니.”
“아무래도 던전이 각성하면서 이중 결계가 쳐진 듯합니다.”
“빨리 해체합시다, 이러다 잘못되면 큰일 납니다.”
교관들은 인공 던전의 2차 각성에 신속히 움직였지만, 결계가 쳐지는 바람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교관들 간에 의견 다툼이 있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시간을 끌기도 했다.
한국 교관의 동선을 알고 있다는 듯, 일본과 중국 교관이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의도했다기보다는 이견 조율을 하는 사이에 던전이 2차 각성을 하면서 생도들과 거리가 떨어졌다.
서로 맞지 않은 의견과 사고가 공교롭게 만났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결계사나, 기관 진법에 능하지 않은 이상 잘못 건드리면 더욱 위험해질 수 있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를수록 결계가 옅어졌다.
“들어갑시다.”
“느슨해지긴 했지만, 섣불리 건드렸다간 위험하지 않겠소?”
“이 정도는 진입할 수 있지 않습니까?”
“혼자 너무 열 내지 말게. 우리라고 다급하지 않은 건 아닐세.”
일본, 중국 교관의 미적거림에 한국의 교관 철혈육좌 차성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결계를 치우고 들어가도 부족한 판국에 시간을 지연하는 느낌이었다.
“설마 시간을 끄는 것이오?”
“그런 말은 조금 불쾌하군. 우리가 왜 그런단 말인가?”
“증거도 없이 모함은 하지 맙시다.”
차성진은 자신들을 찾아온 중일 교관들의 행태부터 의심스러웠다. 자국의 생도들을 관리하기도 바쁠 텐데, 의견을 나누자고 찾아오는 것부터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애초에 인공 던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이렇게나 공교로울 수 있다고?’
충분히 의심이 가고도 남음에도, 차성진은 섣불리 중일 교관을 자극하지 않았다. 자신 혼자 따지고 든들 문제가 해결될 리도 만무하고, 불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이 작당한 이상, 의혹이 사실이라도 바둑 치팅처럼 제기하기 어려웠다.
‘진짜로 협공을 했나?’
가장 타당한 결론은 일본과 중국의 협잡이었다. 교관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그동안 결계를 쳐서 시간을 버는.
만약 그렇다면 제대로 허를 찔렀다.
교류전이라고 해도, 국제대회였다. 협잡을 대놓고 펼친다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나, 한국으로선 문제를 제기해도 중국과 일본이 작당하면 방도가 없었다.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와도 해결은커녕 속만 썩겠지.
‘빌어먹을, 너무 안일했구나.’
개인전 성적이 워낙 좋아서 단체전은 요식행위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마음 한편이 느슨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 빈틈을 중국과 일본이 예리하게 찔렀다.
‘예상 못 한 나의 실수로다. 하지만 생도들에게 위해를 가했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교류전의 우승을 내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생도들만 무사하다면 넘어갈 수 있었다. 하나,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철저하게 파헤쳐 죄를 물을 것이다.
우웅, 팟!
드디어 결계가 열렸다.
기실 해체했다기보다는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봐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계가 열릴 때의 파장이 크지 않았다.
협공당했다면 생도들이 상태가 심각할 수도 있기에 차성진은 교관들보다 서둘렀다.
쐐애애액!
목적지를 향해 차성진은 전력으로 경공을 시전했다. 저들이 또다시 수를 쓰기 전에 신속히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음.
순간, 기이한 느낌을 받기는 했으나 던전의 2차 각성의 흔적으로 판단했다.
멀지 않은 목적지에 도착한 차성진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멈칫하고 말았다. 협공으로 인해 피해를 본 줄 알았는데, 되레 쓰러진 쪽은 중국과 일본 생도들이었다.
그 중심에 선 무진이 차 교관을 맞이했다.
“오셨어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혹시?”
“협공은 아니고요. 얘들! 독에 당했더라고요. 살려 달라고 하기에 인류애를 발휘해서 치료를 해 주고 있었어요.”
“독공이라니, 그럴 리가? 아니 그 전에, 치료를 어떻게 한 거야?”
“오늘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 거죠. 다행히 제가 해독제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나마 다행이구나. 하면 대체 누가 독을 살포한 것이냐?”
“저도 모르죠. 다만, 독으로 얘들을 죽인 후 그걸 우리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것 같긴 해요.”
“……뭐라고?”
무진의 차분한 설명에 차 교관은 대경실색했다. 우리 생도들이 협공으로 인해 피해를 보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거늘.
예상과 달라서 잠시 안도했지만, 그 이상의 핵폭탄이 숨어 있었다. 만약 무진의 말대로 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만큼 끔찍했다.
‘도대체 어떤 자들이?’
인공 던전은 전적으로 아카데미의 소관이었다. 내부 인사가 관련되지 않고서는 애초에 일본과 중국 생도를 중독시킬 수가 없다.
‘일전에 다 솎아 내지 못한 건가?’
정협검을 필두로 하여 암약하던 배신자를 찾아냈었다. 더는 없을 줄 알았거늘, 독버섯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활약하고 있었다.
무진이 해독제를 가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아카데미를 떠나 우리나라는 외교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생도들도 무사하니 차성진은 사태를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다. 이 문제를 공론화해 봤자 좋지 않았다.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 좋은 게 좋은 일로 마무리되기엔 본 사람이 있었다.
“감히 대중화의 생도를 중독시키고도 한국이 무사할 것 같소!”
“한국을 믿었거늘, 어찌 신성한 교류전에서 더러운 암수를 쓸 수 있단 말이오!”
중국과 일본의 왕우 교관과 시마타 교관이 불같이 화를 내며 한국의 비겁한 행위를 규탄했다.
“아니, 그것이 아니지 않소!”
“아니긴 뭐가 아니오! 잡아뗀다고 죄가 사라질 거라 보는 건가?”
“때마침 해독제가 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지!”
차 교관은 아차! 싶었다. 우리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한들, 저들이 믿어 주기나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