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속은 놈이 병신(1)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세상이다. 국제 관계에서 타협과 배신은 다반사로. 개인이라면 배신자로 낙인을 찍을 수도 있으나, 국가 간엔 신뢰만큼이나 이해득실이 중요했다.
일례로 신의를 지킨답시고 자국에 손해를 끼치고, 국민을 괴롭힌다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중국과 일본의 협치는 예상을 넘어 당연한 수순이었다. 교류전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애초에 논외 대상이다.
각성자가 국가 경쟁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고, 파워 게임의 원초적인 매력을 무시하긴 어렵다. 너무 일차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경향도 있으나, 도덕적으론 욕해도 강대국이 대우받는 국제 관계를 보면 답은 명확하다.
예견된 결과에 무진이 야료를 부렸다.
밑밥을 지속적으로 뿌려 놓고, 선제적으로 방향을 정해 놓았다. 코너에 몰린 중국과 일본으로선 협공 외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개인전에서 드러난 역량을 외면한다고 단체전에서 승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장과 무진이 끊임없이 도발하며 염장을 질러 댔으니 어떻게든 성과를 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중국과 일본의 중앙 정부의 압박도 무시하기 어려울 테고. 자칫 여론의 질타로 일선에서 물러날 수도 있었다.
‘세상 참 날로 먹기 힘드네.’
협공으로 몰아서 대비했거늘.
계획대로 되나 싶었더니, 의도치 않은 피를 싸고들 있었다. 그나마 칠공이 아닌 객혈이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긴, 절명독이나 참혹의 저주를 썼다면 눈치를 챘을 수도 있다. 암중 세력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타이밍을 노렸다고 봐야 했다.
풍요로운 수확철인 줄 알았더니, 태풍을 만난 격이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주르르르르!
피를 토할수록 한·중·일 생도 전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의혹, 의심, 불신, 분노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표정의 변화가 익사이팅하다. ‘왜?’라는 의문과 언제라는 당혹감이 지배적이었다.
털썩!
쿨럭!
간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르르! 떨던 일본, 중국 생도들은 삼고구배를 하듯 쓰러지며 핏발을 세웠다. 이유는 몰라도 한 가지는 명확했다. 자신들은 쓰러지고, 쟤들은 멀쩡하니까. 한국 생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우리로서는 적반하장에 사필귀정이었다.
자기들이 합공을 펼치다가 되레 독에 당한 주제에 누굴 원망하겠는가. 딴에는 죽일 생각까지는 없다고 포장해도. 결국은 우리는 대의고, 너희는 불의라는 내로남불이었다.
타협 불가능한 대치였다.
‘수를 잘 썼네.’
장소도, 상황도 굿잡이고.
남의 장단에 놀아난 현실이긴 하나, 외면하기엔 우리나라 아카데미의 인공 던전이다. 우리 나와바리에서 사고가 난 이상, 책임 소재는 잘잘못을 떠나 개최국이 떠안는다.
인공 던전의 2차 각성 후 사고가 발생한다면 과연 일본과 중국이 가만히 있을까. 불미스러운 사고의 희생자로 추모하며 한국을 압박할 카드로 금상첨화였다.
우리가 아니라고 주장해도, 가담했다는 증거가 없어도 협상엔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명확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거짓말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한·중·일은 상대국을 신뢰하지 않는다. 서로가 날조, 왜곡, 통수의 국가로 본다.
그러면서 한·중·일 관광객이 가장 많은 걸 보면 참.
‘이대로는 외통수긴 해.’
던전 공략 시 대응 미숙이라면 해명할 기회라도 있지. 중일 생도 전부가 독으로 사망한다면 변명할수록 악화 일로였다. 가뜩이나 서로 물고, 뜯는 앙숙 관계였다. 오늘을 기점으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 딱 좋았다.
“……이런 짓을 하고선 무사할 것 같아!”
“……악독한, 천벌을 받을 거야!”
일룡과 미츠키가 핏물을 쏟아 내며 분노를 표했다. 이 모든 사태를 우리 측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발언이었다. 제삼 세력의 개입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편향적인 시각 같지만, 이해는 되었다. 중독되어 시야도 흐릿하고, 의식도 오락가락하는 판에 이성적 판단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화생방 훈련할 때 애국가 4절을 완창할 수 없는 것처럼.
‘살려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잡지 않은 것만 해도, 인정.’
각성자는 웬만한 성인은 나무젓가락처럼 부러뜨릴 수 있었다. 어른이랍시고 생도를 훈계하는 행위는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다.
그러나 강함 이전에 생도는 어리고 미숙하다. 질풍노도의 중2병 환자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육체의 강함만큼이나 정신이 성숙한 경우는 희박하다. 하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인 이상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분노했다. 일룡과 미츠키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 수 있었다.
“……살려 줘, 난 죽고 싶지 않아……. 아, 이 피…… 살려 달라고…… 발바닥에 딥키스라도 해 줄까!”
그래, 이게 원래 정상이다.
역시 장위다.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분노 이전에 살고 싶은 욕구는 필연지사. 자존심만으로 삶에 대한 본능을 억제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독립운동가가 대단한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초개와 같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숭고한 사명감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핵폭격에 의한 독립이긴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세상은 자기를 돕는 자를 돕기 마련이었다. 운도 따라야겠지만, 누가 해 주기를 바란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부르르르!
미츠키, 일룡의 분노와 생도들의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다수의 생도는 삶에 대한 욕구가 더 강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자신들의 가치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가문과 문파를 떠나 국가를 욕먹이는 행위가 되었다.
살고 싶은 간절함과 살아남은 이후의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이 엇갈렸다.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개자식들, 이런 짓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중국, 일본 생도는 삶에 대한 본능과 분노로 점철이 되었다. 그럴수록 내부에서 퍼지는 독으로 인해 점점 죽어 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회복할 희망마저 사라진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흠.
관찰자 시점의 무진은 주변을 살폈다.
인공 던전의 기운으로 인해 흐름이 왜곡되기는 했어도, 확대된 기감에서 벗어나는 기척은 없다. 확신은 금물이나, 변화가 감지되지 않는다면 내부에 적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허를 잘도 찔렀군.’
교류전이 행해지는 동안 지나치게 조용한 면도 있었지만, 성동격서로 빌드업을 짜리라 속단한 탓이 컸다. 더욱이 지금처럼 극단적인 수는 그간의 암중 세력이 보인 행태와 어울리지 않았다.
‘속을 너무 긁었나.’
어디까지 찌르면 화를 낼까, 간을 본다는 게 인내심의 한계를 넘은 모양이다. 이렇게 다 죽자는 식으로 나올 줄 누가 알았으랴.
다만, 성과적인 측면을 고려한다면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전략이 통하기만 한다면 한국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테고. 차후에 물밑 작업을 하기가 수월해질 수밖에 없다.
강대국도 고립되면 곤란을 겪는데, 한국은 수출입 국가였다. 고립된 한국이 과연 얼마나 버텨 낼 수 있겠는가. 그때 손을 내밀며 다가온다면 IMF처럼 외면하지 못하겠지.
‘그건 그거고.’
다 죽이기는 어렵다. 몇 명은 살아야 증명하기가 수월해진다. 아마 예상보다 다른 느낌에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낄 수도 있었다. 전략적으로도 적아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테고. 끝났다 싶을 때 뒤통수 후릴 때도 조심해야 했다.
“젠장, 이거 어떡하지?”
“차라리 협공이나 할 것이지, 씨부럴!”
“빌어먹을, 얘들 진짜로 죽는 거야?”
“이러면 우린 어쩌라는 거야?”
“이 지경인데 교관은 지켜볼 셈인가!”
당황하기는 우리 쪽 생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면에선 중국과 일본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달린 이상, 지금이 좆됐다는 걸 알 수밖에 없다. 변명을 해 본들, 우리끼리만 믿어 줄 뿐 일본과 중국이 믿기라도 할까. 가증스럽다고 욕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저벅!
이번엔 태수 선배를 내세우지 않고, 무진이 앞으로 나섰다. 다들 생도다 보니 변수에 무척이나 약했다.
주춤!
거구의 무진이 다가오자 일룡과 미츠키를 비롯한 생도들이 긴장했다. 독이 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죽은피가 흐르고 있었다. 곧, 육신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가 될 테고, 회복 불능의 돌이키기 어려운 사태로 번질 것이다. 그나마 일반인이 아닌 각성자라 버티고 있었다.
“주변에 결계를 쳤겠지.”
무진의 목소리는 낮은 톤의 저음임에도 모두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살고 싶다는 본능과 시선이 집중되어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스윽!
그러면서 제갈비를 슬쩍 보았다.
제갈비는 끊어지려는 의식을 붙잡느라, 평소와 달리 냉정하지 못했다. 무진과 눈이 마주치자 동공이 흔들리며 분노가 치밀었다. 마치 자신이 이 모든 사태를 주도한 장본인으로 몰아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헛소리……하지 마라……. 그런다고…… 너희들의…… 죄가 사라질 것…… 같으냐!”
“장 모 위 씨처럼 살려 달라고 구걸은 안 하네. 그래도 제갈가의 결계는 맞잖아. 그게 아니라면 교관이 여태 뭘 하고 있겠어.”
핵심을 예리하게 찔렀지만, 제갈비는 당황하지 않았다. 가문의 소소환영진은 시간이 지나면 열리도록 설치했다. 오래지 않아 흔적은 사라질 테고, 증거는 남지 않는다.
무진이 결계의 증거를 남기겠다며 녹화하겠다고 하자, 제갈비는 다급해졌다.
“……우리가…… 죽는다면…… 너희도…… 한국도 무사……치 못할 것이다……!”
“거봐, 너희들이 봐도 이상하잖아.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너희들을 독살하겠어. 더더군다나 이런 눈에 띄는 장소에서. 우리와 너희들을 이간질하려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상식적이진 않잖아.”
“……어설픈…… 변명 따윈 집어치워!”
무진의 말을 부정하고 싶은 바람과 달리, 모두는 부정하기 어려웠다. 이건 누가 봐도 이상하고 뻔하다. 어떤 멍청이가 이따위 조잡한 수작에 걸려 넘어가겠는가. 더욱이 한국은 교류전의 우승이 정해져 있었다. 굳이 독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이성적인 판단은 한·중·일을 흔들려는 세력이 있다고 했다. 하나, 자신들이 죽게 생겼는데, 그따위가 눈에 들어올까? 어떻게든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전가하기 마련이다.
그 대상으로 반감이 강한 한국은 제격이다.
이후의 사태도 마찬가지다.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제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이따위 짓을 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을 대표하는 공주와 엘리트 생도의 죽음이었다.
책임을 질 대상을 찾지 못한다면, 고스란히 본인들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중국과 일본의 정부가 그렇게 되도록 놔두겠는가.
“너희들이 죽으면 설령 다른 증거가 있다고 한들, 우리가 책임 소재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 국민감정상 절대 아닐걸. 공식적으론 말 못 해도, 실제로는 굉장히 싫어하잖아.”
무진의 논리 정연한 설명이 귀에 들어오진 않지만, 맥락을 외면할 만큼 머저리는 없었다. 다들 국가를 대표하는 고르고 고른 엘리트였다.
당연하게도 그 와중에 군학일계(群鶴一鷄)가 있었다.
“……살려 줘…… 발가락이라도 핥을게. 제발, 나만이라도!”
장삼이사의 장위는 다르다.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데, 외국에 내놓다니 중국 주석의 담대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 넓은 땅덩어리 안에서 새도록 놔두었으면 티는 나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내가 아주 신통방통한 포션이 있거든. 아, 그렇다고 너희들이 중독된 독을 해독하려고 만든 치료제는 아냐. 감정 스킬을 써 봐도 좋아.”
무진의 말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태 어떤 신박한 개소리를 하나 듣고는 있었지만, 설마 치료제를 언급할 줄은 미처 몰랐다.
“어이, 당 씨. 너도 중독됐으니까 알 거 아니냐. 독이 꽤 독하지?”
“……시끄럽다, 어서 해독제를 내놔! 아니면 절대 너도, 너희 집도, 한국도…… 가만두지 않아!”
다른 이도 아니고 당우천은 복수무정 사천당가의 직계다. 그가 독에 중독됐다는 사실 자체도 어이없지만, 해독이 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