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남자의 로망(3)
그러나 전제 조건인 대악마의 피를 구하기란 요원한 상태였다. 이대로 방치하기는 아까워서 그 대안으로 발칸을 선택했다.
발칸은 마계를 지배하는 마족, 악마와 비슷한 성질이었다. 창황의 육신이 인간이기는 하나, 발칸에게 지배당하는 이상 마족화가 진행이 될 수밖에 없다.
무진은 발칸의 자발적 헌혈로 대마족의 피를 대신하기로 했다. 성공만 한다면 발칸의 지속적인 자발적 헌혈이 있으니, 대천사의 눈물만 찾아낸다면 [신의 정화]를 꾸준히 생산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몇 인용이야?”
“어지간해선 한 방울만으로도 충분한데, 상태에 따라서 한 숟가락 이상도 필요할 수 있어.”
“지속적인 생산이 가능하다면 실험하기도 용이할 텐데.”
“솔직히 회의적이야. 치료 성능이 지나쳐.”
한 모금만 마셔도 모든 병마를 치료하는 포션이 나온다고 상상해 봐라. 그 가치를 경시할 수는 없다. 오히려 너무 뛰어나서 대량생산 했을 때의 부작용이 훨씬 클 수도 있었다.
“그 말은 성능을 낮추면 가능하단 소리잖아.”
“진짜, 너 열일곱 살 맞냐? 뭔 놈의 열일곱 살이 이래?”
“그래서 맞아, 아냐?”
“오크, 오우거, 드레이크, 트롤의 피를 조합하면 얼추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일전에 연구한 자료를 토대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더니 가능하다고 나왔어.”
“성능은?”
“[신의 정화]와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도 안 되지.”
“놀라운데.”
보통은 실망하기 마련이지만, [신의 정화]의 치료 성능이 워낙 사기적이었다. 10분의 1이라고 해도 기존 물약, 포션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
“도후 형, s급 강화 확률이 어느 정도야?”
“절반 정도.”
“그러면 해 볼 만하단 거네.”
“그 절반이 다른 등급도 아니고, 무려 s급이라고.”
“강화력만으로 그렇단 소리잖아. 재료만 충분하면 확률을 훨씬 높일 수도 있을 테고.”
도후 형의 강화술은 국내를 넘어 세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 덩달아 장훈 형과 태천 형도 이전과 비교해서 일취월장했다. 일전에 던전 투어를 통해서 레벨을 급격하게 올린 효과였다.
“버스 투어를 한 번 더 해야 하네.”
“……무턱대고 레벨만 올린다고 다가 아냐. 익숙해지지 않으면 오히려 연성의 균형을 잃는다고.”
“이건 장훈의 말이 절대 맞아.”
“옳소, 지지합니다!”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형들의 반응이 과했다. 이러면 사람 심리가 더 해 보고 싶어지잖아. 자기들 복을 알아서 찾는 재주가 있었다.
“정색하기는. 그냥 해 본 소리야. 일도 끝났는데, 모처럼 술이나 할까?”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는 거 아니냐? 너 생도야!”
“그래서 몰래 마시잖아.”
“애들이 보고 배울까 무섭다.”
“술이 무서운 이유는 도수로 인한 취기 때문인데, 나는 취하지를 않아요.”
“맞는 말이라서, 반박을 못 하겠네.”
술이 강하다는 사람치고 취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무진은 예외였다. 주기(酒氣)를 자체적으로 해독하기에 몸에 들어가는 순간 맹물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술을 마시는 행위에 대한 비난은 할 수 있어도, 법적으로 처벌하긴 불가능하다. 아무리 불어도 혈중알코올농도는 제로였다.
“만드라고라준데 싫으면 말고.”
“누가 또 싫대.”
만드라고라의 독성을 제거하여 술을 담근다면 최고의 자양 강장제였다. 한 모금만 마셔도 집안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런, 장훈 형과 태천 형은 쓸데가 없는데.”
“쓸데가 왜 없어!”
“마시고 뭐 하려고?”
“체력이 있어야 밤새워서 게임을 하지!”
체력은 게임이라니.
장훈과 태천은 괜히 슬퍼지려고 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되새겼으나, 겨울이 깊어질수록 옆구리가 시렸다. 대체 언제까지 옆구리를 방치하게 될지, 서글픈 현실이었다. 더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제인 길드장마저 나 부장에게 빼앗겼다는 것이다.
“도후 형은 그만 제인 누나하고 화해해.”
“화해라니,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잘 지내다가 갑자기 화를 내는데, 도후로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뭘 잘못했는지 모르니 되레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무진은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듣다 보면 이해하겠지.
“그깟 깻잎 좀 잡아 줬다고 이 난리를 피우는 게 말이 돼? 너희들은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냐?”
“그렇게 싫으면 헤어지십시오, 나 부장님!”
“맞습니다. 제인 길드장님이 아깝습니다!”
모두가 솔로라면 받아들일 수 있으나, 자신들만 솔로란 사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더욱이 비슷한 줄 알았는데, 혼자만 잘나가면 참을 수가 없다. 똑같이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싶다. 나 부장이 잘되는 꼴은 사촌이 땅을 사는 것보다 더 배가 아프다.
“이 새끼들 말하는 것 보소! 누구 좋으라고 헤어져! 무진아, 네가 봐도 이건 말이 안 되지, 응?”
“허공섭물을 썼어야지.”
“……그런 방법이 있었네.”
“그러니까 형이 하수라는 거야.”
무진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대답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젓가락을 쓸 때부터 하수라고 광고하는 꼴이다. 절대고수라면 허공섭물로 완벽한 연애를 꿈꿀 수 있었다.
‘저게 맞는 거야?’
‘하수가, 그 하수가 아닌데!’
어쨌든 둘은 여자와 만나고 있었다. 반면 태천과 장훈은 주말에도 연구실에 처박혔다.
‘연성이 왜 잘돼!’
‘야장술이 왜 늘어!’
좋은 일인데, 일거리가 늘어서 서글프다.
***
무진은 무극 길드에 들렀다 성운 그룹에 도착했다. 진 회장이 주기로 한 성의가 남아 있었다.
예상대로 진 회장은 인상을 구겼다. 자기 손자의 우승을 기대했는데, 애먼 놈이 차지했으니 편치 않았다.
“사업가는 표정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하지 않나요?”
“너 같으면 반기고 싶겠냐. 양심이 있으면 오지를 말았어야지.”
“그러니까 계좌 이체하라고 했잖아요.”
“한두 푼도 아니고, 100억이 우스워! 땅을 파 봐라, 돈 100원이 나오나.”
“장위가 100억 주기로 했습니다. 한데, 약속을 안 지키네요.”
내기로 100억은 과해도 너무 과하다. 통상적으로 주지 않아도 그만인 계약이나, 무인의 약속이었다. 여론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하기 좋은 소재였다.
한국과 중국의 설전에서 여태 주지 않은 걸로 약 올렸다. 실제로 무진은 받는 즉시 인증하기로 했었다. 100억 인증을 올리지 않을수록 장위의 평판은 물론, 중국까지 싸잡아서 깎이는 중이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평생 따라다닐 흑역사였다.
그런 장위와 동급이 된 진 회장이었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만약 무진이 이걸 트집 잡아서 인증샷 놀이라도 한다면 두고두고 욕을 먹을 일이다. 개인사가 성운 그룹 전체로 퍼지는 수가 있었다.
“아니 무슨 내기를 하기에 100억을,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큰 거 아니냐.”
“혹시 주기 아까워요?”
“아깝다기보다는, 내기로는 과하다는 거지. 이런 식으로 돈을 받으면 그것도 나중에 문제가 돼요.”
“쩨쩨하긴.”
“뭣이라!”
“혼잣말입니다.”
“다 들리잖아!”
이 요망한 녀석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지만, 진 회장은 한숨을 내쉬며 분기를 다독였다. 애하고 싸워 봤자,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입이 방정이지! 손자를 위해 100억을 부른 게 화근이었다. 1억만 해도 세후 순수 벌 수 있는 직장인의 월급으론 고소득이거늘.
다만, 각성자의 평균 연봉이 워낙 고소득이라, 1억이 돈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장비나, 아이템만 해도 부르는 게 값이기도 했다. 헌터의 능력치인 좋은 장비와 아이템을 얻으려면 돈을 모으긴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모은 돈도 꽤 되지 않느냐. 평범한 직장인은 평생 모아도 쉽지 않을 텐데.”
“돈이야 많을수록 좋고, 젊을 때 많이 벌어야죠.”
“넌 젊은 게 아니라, 어린 거지.”
“어쨌든 저는 태수 선배의 품위를 지켜 드렸습니다.”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다, 요놈아.”
“지수에게 부탁했으니, 제가 한 거나 마찬가지죠.”
“그랬으면 적당히 싸웠어야지.”
“기권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잖아요. 교장 선생님이 그럴 줄 누가 알았나요.”
진 회장은 혹여 이놈하고 교장이 짜고 치지 않았나, 의구심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교장이 뭐가 아쉬워서 생도와 야합한단 말인가. 자신이 생각해 봐도 터무니없는 모략이었다.
‘고정관념이 이래서 무섭지.’
무진은 내막을 말하지 않았다. 오해할수록 계략을 펼치는 데 효과적이니 말이다. 적을 속이라면 아군을 속이라는 격언을 따랐다. 어쨌든 같은 편인 진 회장이 이렇다면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 이사가 용돈을 안 주냐?”
“나이가 몇인데 아버지한테 용돈을 타요. 제가 쓸 돈은 제가 법니다.”
“……자립심이 훌륭하구나.”
“일단 요리부터 드세요.”
무진의 18첩 반상이 탁자에 올랐다.
인벤토리에 만들어 놓은 요리를 두다니, 진 회장은 어이가 없었다. 더욱이 요리로 자신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다른 건 몰라도 입맛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외국의 전문 요리 평론가조차 혀를 내둘렀었다.
허!
그랬는데, 왜 맛있어?
믿기지 않지만, 천상의 맛이다. 수저를 멈춰야 한다는 의도와는 달리 쉬지 않았다. 화려하지 않은 요리임에도 극상의 진미였다. 맛의 극한으로 끌어들이는, 요리의 대가만이 가능한 만류귀종이었다.
“전에도 그렇고, 네가 한 게 맞느냐?”
“의심 많으신 회장님을 위해서 영상으로 찍어 놨습니다.”
영상의 편집 없이 휴대폰으로 보여 드렸다. 자로 잰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이 먹은 요리가 완성되었다. 모양과 위치까지 똑같아서 빼박이었다.
끄응!
이렇게까지 하니 부정하긴 어려웠다. 애초에 의심 많다고 밑밥을 깐 것부터 계획적이었다. 이래서 기획 사기에 사람들이 자주 당하는 것이다.
쓰벌, 100억이 허공으로 날아가는구나. 100억을 기부하면 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거늘.
“주마, 됐느냐?”
“계약을 하나 더 하죠.”
“뭔 놈의 계약? 아주 돈독이 올랐구나!”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러니 하실래요?”
“하지 않겠지만, 들어는 주마.”
“회장님의 10년은 얼마죠?”
진 회장은 호통을 치려다가 흥미가 돋았다. 설마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해 올 줄은 미처 몰랐다. 모처럼 밥 잘 먹어서 유해진 건 절대 아니다.
“내 시간은 분 단위만 해도 억이 넘는단다. 10년이면 얼마겠느냐? 네가 그만한 가치를 가진 계약 조건을 내밀 수 있다곤 보지 않는다.”
“10년의 젊음이면 가치 있는 계약이 아닐까요.”
“사기꾼이나 할 소릴, 됐으니 그만하거라.”
“요즘 들어 허리도, 무릎도 예전 같지 않으실 텐데요. 약을 먹어 봤자 효과도 없고. 포션이나 물약은 이제 내성이 생겨 효과도 미미할 테고요.”
진 회장은 나이에 비해서는 건강한 편이다.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하여 유지할 수는 있으나, 실제는 몸에 좋은 갖은 영약을 섭취했다. 사업하기도 바쁘니, 돈으로 건강을 산 것이다.
하나, 나이가 들수록, 영약이나 물약을 많이 먹을수록, 내성이 생기는 건 불가항력이다. 효과가 점점 떨어지는 대신, 복용해야 할 약만 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