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남자의 로망(1)
권왕가를 방문했다.
개인전에서 우승했으니, 스승을 찾은 건 제자의 당연한 의무였다. 이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면, 패륜에 후레자식임을 인정해야 했다.
무진은 보무도 당당하게 권왕가의 정문을 넘었다. 따지고 보면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부님의 개인 연무장으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한결 가볍다. 간간이 보인 무인들은 인사를 건넸다. 권왕가의 무인들은 무진과 지수의 대련을 봤기에 개인전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마침 적무대의 대원들이 알은체를 해 왔다.
말을 건 인물은 적무대 부대주 지현일이었다. 백무대의 부대주였던 유지호로 인해서 관계가 틀어졌지만, 오해가 밝혀지면서 무진에게 빚이 있다고 여겼다.
“우승 축하한다.”
“별거 아니에요. 다들 이 정도는 하는 거잖아요.”
“잘난 체는, 아가씨가 정상이었으면 또 모를 일이야.”
“무인은 항상 현재를 살아가죠. 내가 아프다고, 상대가 저를 봐주진 않잖아요.”
“쩝, 맞는 말이네. 그래도 좀 겸손해라. 굳이 사방에 적을 만들 필욘 없잖아.”
“사부님의 제자에겐 어울리지 않는데요.”
지현일과 부대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놈은 글렀다. 겸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한편으로 태생이 이런데, 태상가주의 제자가 되었으니 설상가상이었다.
“다음에 한판 붙어 보자.”
“비공개로 해 드리죠.”
“고양이 쥐 생각 하는 것 같지만, 일단 알았다.”
지현일과 부대원은 부대실로 갔다.
이번에는 한길수 집사장을 연무장으로 가는 길에 만났다. 눈치를 보니 정문에서 연락받고 찾아온 것이다.
“가주님께서 보자십니다.”
“무슨 일이 있나요?”
“그에 대해선 모릅니다.”
“사부님은요?”
“지수 아가씨와 수행 중이십니다.”
“어제의 패배가 마음에 쓰였나 봅니다.”
“그럴 리가요, 털어 낸 지 오랩니다.”
한 집사장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지수였다. 조금 골려 줄 심산으로 흠을 잡았더니, 곧바로 반격을 가해 왔다. 고용 관계를 떠나, 손녀처럼 아끼는 모습이었다.
가주실에 도착했다.
소임을 다한 한 집사는 물러섰다. 궁금할 만도 한데, 집사장은 주어진 일에만 충실했다.
문을 열자 가주께서 막 일을 끝낸 사람처럼 문서에서 펜을 뗐다. 교묘한 타이밍에 도수도 없는 얇은 금테 안경을 벗는 건, 워커홀릭의 전형적인 자세였다.
“바쁘시면 다음에 올까요?”
“누구 때문에 일거리가 늘어서 가족을 돌볼 시간도 없구나.”
“누구 때문에 돌볼 가족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요?”
“우승하더니 말솜씨만 더 늘었구나.”
“우승하기 전에도 말은 잘했어요.”
“아주 그냥 한 마디를 안 져.”
“사부님의 제자라면 언제 어느 때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입니다.”
유경중은 ko패를 인정해야 했다. 부정해 봤자, 아버지를 까는 패륜아가 되어 버린다. 더욱이 권왕가의 가훈대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겠다는데,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 이게 열일곱 살 생도가 맞나 싶어질 지경이다. 무공이야 기상천외로 받아들인다 쳐도, 말하는 것만 보면 연륜과 관록을 잘못 처먹은 책사보다 능글맞았다.
“어쩐 일이세요?”
“가문의 제자가 우승했는데, 선물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저는 성의보다 내용물을 중시합니다.”
“어른이 주면 ‘예, 고맙습니다.’ 하고 받을 것이지, 토부터 달기는.”
속물적인 무진의 태도에도 가주는 담담했다. 애초에 겸손이나 사양의 미덕과는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었다. 어설프게 위신을 세워 보겠다고 허세를 부렸다간, 호미로 막을 거 가래로도 못 막는다.
“받은 선물이 맘에 안 들어서 집에 처박아 두거나, 중고 장터에 팔아 버린다면 받은 사람도, 준 사람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 테지요. 둘 다 만족하면 금상첨화겠지만, 받는 사람이라도 기분이 좋다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을까요?”
“입은 달렸다고 말은 아주 청산유수구나. 하지만 어림도 없느니라. 난 내가 주고 싶은 걸 줄 거다.”
“자존심도 없나.”
“뭐라?”
“혼잣말이에요.”
“다 들려!”
사람 혈압 오르게 만드는 재주는 타고났다. 말을 해도 이런데, 말을 하지 않아도 열 받게 만든다. 일례로 장위가 걸려들어 개망신당했었다.
“참고로 교장 선생님께서는 보고 이용권 5장을 흔쾌히 양도해 주셨습니다.”
“밤중에 풍신이 전화해서 얼마나 징징대던지, 원.”
교장의 천기누설에 무진은 입맛이 썼다. 남의 영업 비밀을!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음을 실감했다. 정당한 대가임에도 이리 나온다면, 다음부터는 불공정한 거래가 될 수밖에 없다.
“불신이 가득한 세상이네요.”
“잡소린 그만하고, 이거나 받거라.”
가주께서 던져 준 물건은 반지였다. 맘에 들진 않았다. 무인이 손가락에 반지를 끼는 것도 불편하고, 반지의 재질과 형태가 아름답지도 않았다. 뭐랄까,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짭 같았다.
응?
가주님의 성의를 봐서 손가락에 끼었더니.
[무한 변형기, 잠김]
-마나 소모형.
-무한 변형.
-절대 내구력.
-스텟 보존.
-낙장불입.
이름과 나열된 특성은 둘째 치고, 특이하게도 아이템에 등급이 없다. 이게 대체 뭔가 싶어 내력을 주입해 보았다.
10년의 공력을 넣었다.
우웅.
반응하지 않는다.
30년의 공력을 넣었다.
우웅.
반응하지 않는다.
어이가 없어진 무진은 오기가 발동했다.
사람들이 먼치킨을 너무 많이 봐서 30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반 갑자의 내력이면 철판을 가볍게 뚫어 버릴 수 있었다. 알아듣기 더 쉽게 얘기하면, 지법으로 당신의 두개골을 두부처럼 뚫는다.
그뿐인가, 이미 먹은 내력은 합산하지 않고 꿀꺽해 버렸다. 그 말은 한 번에 원하는 양의 내공을 주입하지 않으면 내력만 소모하게 된다는 뜻이다.
낙장불입이 왜 나왔나 했다.
후후후!
가주께서 흐뭇해하는 꼴이 무진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쩐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선물을 주더라니. 더더군다나 개떡 같은 아이템을 던져 주고, 선물이라고 하면 사람 빡돌지.
“가주께서도 보통이 아니시네요.”
“너만 할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호승심은 인간의 본능이다. 도전 정신을 이용하여 무진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니, 가주로선 성공적인 선물이었다. 하물며 자존심을 은근히 건드려 주었다.
무진은 1갑자를 퍼부었다.
우웅!
반응하지 않는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심정이 이럴까? 100년 공력을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이만한 공력이면 족히 절정의 초입은 되어야 하거늘.
이 망할 놈의 아이템이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들고 있었다. 어디서 이런 괴상한 아이템을 얻은 건지, 어째서 자신에게 건네주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거 도입부가 어디서부터예요?”
“모르겠느냐? 알려 줘?”
“공력 잡아먹은 귀신도 아니고, 벌써 2갑자나 처먹었다고요.”
“사내자식이 쪼잔하긴, 다시 채우면 되잖느냐.”
“그깟 2갑자야 한 호흡이면 땡기지만, 사람 약 오르게 하잖아요.”
“그래서 말해 줘, 말아?”
“됐거든요.”
“나도 됐다.”
유경중은 태연한 척했지만, 내심 기겁했다. 2갑자를 물 쓰듯이 쏟아 내고도 기도가 변하지 않는다. 그것도 놀라운데, 한 호흡으로 2갑자를 다시 채우다니.
‘공령지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흡입률이잖아.’
자연과 소통하여 천기만물의 흐름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하는 융통무애의 경지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시전하는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우우웅!
그러는 동안 무진은 3갑자를 반지에 태웠다.
[무한 변형기, 활성화]
그제야 아이템이 반응하며 등급이 나타났다. 아이템의 등급이 예사롭진 않았다. s등급의 아이템이면 제법 쓸 만한 수준이었다. 반대로 3갑자나 처먹고 어중간했다면 용광로행 당첨이었다.
“최소 3갑자라고 알려 줬어야죠.”
“절대 내구력을 가진 아이템의 가치는 s급 이상이란다. 게다가 천년삼을 10뿌리나 줬잖아.”
유경중도 처음 발견하고선 아이템을 활성화하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었다. 2갑자까지 테스트하다가 그만두고, 창고에 박아 두려고 했었다.
이왕지사 해 보자는 심정으로 가진 내력을 꼬라박고 나서야 3갑자가 기본임을 알아냈다. 아주 지랄맞은 아이템이긴 해도, 한 번 3갑자 이상의 내력을 주입하면 소모될 때까지 내구력과 속도를 유지해 준다.
“내력을 제외한 보존 능력은 둘째 치고, 흡수한 공력이 전부 소모되면 원래대로 돌아오잖아요. 소유권 종속도 아니고. 딱히 쓸모를 모르겠는데요. 정 없으면 몸으로 때우면 그만이고.”
“어떤 형태로도 변할 수 있지 않냐. 혹시 알아. 메카닉도 가능할지.”
“호오, 그렇군요.”
한데, 메카닉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고 나온다. 3갑자로는 냉병기로만 변형이 가능했다. 검, 도, 창 수준이면 발칸의 헬소드나 투귀 어르신의 여의봉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저런, 등급 제한이 걸려 있나 보군. 하지만 꾸준히 수행하여 내력을 쌓다 보면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때까지 언제 기다려요. 바로 16갑자로 하겠습니다.”
“뭐?”
무진은 방법이 있는데도 미적지근하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내력이 탐난다면 먹여 주는 수밖에.
배가 터지도록.
16갑자, 천년의 내공이 반지에 스며들었다.
우우우웅!
무지막지한 내력이 반지에 전달되자, 반응력이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게걸스럽게 처먹처먹한 반지는 은은한 현기를 발산하며 존재의 가치를 증명한다.
sss등급.
그 위로도 등급이 존재하긴 하나 현존하는 최고 등급의 아이템이 되었다.
[무한 변형기, 무한 활성]
-완전 소유.
-마나 무한.
-무한 변형.
변형 무기를 완전히 소유하게 된 무진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s등급에선 마나의 소모가 끝나면 원래대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제는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천년 내공을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데다, 죽지 않는 이상 소유권이 무진에게 완전히 귀속되었다. 소유주가 원하지 않으면 아이템의 이전은 불가능했다.
아~!
유경중은 눈앞에서 벌어진 기현상에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보고도 믿어지지 않은 광경이다. s등급의 진화형이라고 적혀 있기는 하나,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이템의 등급이 높을수록, 무인이 겪는 벽과 비슷했다. 보통은 등급 상향을 위해 강화술사를 동원하는 편이지만, 이조차도 조건이 까다롭다. 등급이 높을수록 소모되는 재료도 많고, 실패 확률도 높았다.
그 어려운 일을 무진은 아무렇지 않게 해 버렸다. 단숨에 2단계나 점프를 해 버린 것이다.
‘천년 내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유경중도 무진이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한 녀석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한계를 규정하고 있었다는 걸 인정했다. 설마, 융통무애한 내력이 천년에 이르렀을 줄이야.
‘완전 소유권이라.’
아이템이 아깝지는 않았다. 천년 공력을 가진 무인은 한국은커녕, 세계에서도 찾기 힘들다. 3갑자만 있어도 쓸모는 있을 테지만, 자유자재로 사용하려면 최소 천년 공력이 필요했다. 결국, 반지의 소유자는 무진 정도는 되어야만 한다. 어중간한 절대경에겐 그림의 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