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오차 범위 내(3)
투귀 정도면 장가를 가도 되었다. 나이는 있어도, 혈기 왕성함은 젊은이들보다 더했다.
앙, 사르르!
얌, 우걱, 우걱!
예의는 무슨.
투귀는 식탁의 요리에 정신이 팔려 수저질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다 정신이 들었는지 무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 공기 더요?”
“소식해야 오래 산단다.”
“다섯 공기나 드시고서 할 소린 아니죠.”
“무인은 원래 그 정도가 기본이잖아.”
“그럼 뭔데요?”
“권왕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어서 사실대로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권왕이 돌아왔을 때 투귀는 AA급 던전을 공략하느라 시간이 없었다. 이틀 전에야 겨우 시간을 내서 권왕과 대결을 벌였다.
대결은 연례행사였다.
권왕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나 몰래 어떤 훈련을 하고 영약을 먹었는지 체크해야 할 사항이었다. 이는 라이벌의 당연한 의무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었다. 웬걸, 심권을 쓰는 데 자유로웠다. 단순히 심권을 쓰는 수준과 자유로움은 차원이 달랐다. 그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믿기지 않아서 세 번 더 덤볐다가 뼈에 사무치도록 처맞았다.
심권무애(心拳無碍)는 고작 한 달 만에 이룩할 만큼 녹록지 않았다. 더욱이 이전과는 격이 다른 기세였다. 한 끗이 아닌 최소 한 단계 이상의 벽을 느끼게 했다.
“기연을 얻었어요.”
“저런, 어떤 기연이기에 사람이 그리 달라져?”
“수행 던전에 들어갔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요.”
“수련이란 게 시작하는 초보자에게나 잘 먹히지, 권왕쯤 되면 수행 던전의 효과가 크지 않아.”
투귀의 말이 정석이긴 했다. 수행 던전은 불특정인 데다가 본인에게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원하는 성과를 얻기도 힘들고.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데, 경험해 보실래요?”
“크흠, 밥 먹고 바로 훈련하면 몸에 좋지 않단다. 충분히 소화하고 난 후라면 모를까. 이런! 요즘 들어 소화가 잘 안 돼서 거북하긴 하구나. 하아아, 언제 소화가 다 될꼬?”
꺼림칙한 기분이 든 투귀는 곧바로 앓는 소리를 냈다. 밥보다 싸움을 더 좋아하는 천생 무인이지만, 무진의 훈련은 부담스러웠다. 승패는 어차피 정해져 있고, 전부 게워 낼 때까지 처맞는 수가 있었다.
“살살 해 드릴게요. 밑져야 본전 아닌가요?”
“본전은 무슨! 너나 많이 해!”
투귀는 저 말이 더 듣기 싫었다. 누가 감히 자신을 앞에 두고 저딴 말을 지껄일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하라고 들들 볶았던 과거를 반성하게 했다.
“그렇게 나오실 줄 알고, 이번에 제가 마도와 환술을 조합하여 의념을 적용한 가상현실을 완성했습니다. 허락만 하신다면 최신 특제 포션도 덤으로 드립니다.”
“……날 실험용으로 쓸 셈이구나!”
노인네가 아주 눈치가 빠르네.
저 나이쯤 되면 생에 욕심이 없어야 하거늘.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삶에 욕심이 없는 경우는 정말로 흔치 않았다. 이제 죽어야지, 하는 말을 달고 사는 노인네에게 진심으로 ‘죽여 줄까?’라고 하면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무진은 선심성 빈말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먼저 쓸 순 없잖아요.”
“너무 솔직해서 할 말이 없구나.”
“아버지가 친동생 같다면서요. 형이 돼서 동생을 위해 그 정도 희생도 못 합니까?”
“난 오대 독자다.”
투귀에게 강권하진 않았다. 알고 싶다고 해서 보여 주려고 했을 뿐이다. 이 수법은 다른 차원에 있는 투신과 무신을 당장은 수행 던전으로 불러올 수 없어서 시범적으로 완성한 술식이었다. 실제 수행 던전을 경험하기 전 일종의 모의 훈련으로 보면 적합했다.
“싫으면 말고요. 어르신 말고도 하고 싶다는 사람 많아요.”
“사업가 마인드구나.”
너 아니라도 일할 사람은 많다는, 강성 노조가 판을 치는 현시대와는 맞지 않는 마인드긴 했다. 노사 모두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지만, 현실은 항상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자와 노동자는 서로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목숨을 구해 주고, 먹고 싶은 것도 다 해 주고 그랬는데, 배은망덕하시네요.”
“사형수도 죽기 전엔 배부르게 먹인다, 이놈아!”
“헐, 갑자기 왜 이렇게 똑똑해지셨데.”
“제자한테 배신을 당해 봐라. 꼼꼼하게 따지지 않게 되나?”
끄덕!
무진도 이번에는 수긍했다. 확실히 사람은 당해 보기 전까지는 대부분 변하지를 않는다. 본인 스스로 돌이켜 봐라. 다이어트가 좋은 예시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고,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이 스스로 변한다면 대단한 사람인 것이다.
투귀의 변화는 좋은 징조였다. 사기를 당한 사람을 욕하지 말라고 하지만, 세상은 좋은 사람에게 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좋은 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사는 편이다. 그러니 스스로 지킬 노력과 꼼꼼함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사기를 당하면 이번 생은 운이 없으니 포기해라.
“밥이나 마저 드세요.”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밥이 넘어가……는구나.”
무진은 간단한 허공섭물로 어르신의 입속에 고기 경단을 넣어 드렸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만큼, 아버지는 식사에 전념하고 계셨다. 어르신이 오공 시대에 머무는 가운데, 아버지는 육공 시대를 마무리했다.
“제기랄, 해 보거라.”
“할 거면서, 귀찮게 튕기지 좀 마요.”
충청도 스타일이신가?
투귀도 하기는 싫다. 그러나 자그마치 심권무애의 경지다. 어떤 수련을 했을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는 길드에도, 경호에도 집중하기 어려울 듯싶었다.
‘이 녀석의 술법도 궁금하고.’
일반적인 상식 따위는 애초에 논외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무진의 기행을 알고 있었다. 생체 실험을 당하는 기분이기는 해도, 무진이라면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을 능력이 되었다.
‘얘가 안 되면 답 없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무진 만능설을 투귀도 인정했다.
“제 눈을 보세요.”
“눈을 본다고 심권무애 할 수 있으면 개나…….”
무진의 눈을 마주한 순간 투귀는 밥상머리에서 정지되었다. 의식이 무진이 만든 가상현실로 쏘옥! 빨려 들어간 것이다.
칠공 시대를 끝낸 아버지가 오랜 침묵을 깨셨다. 오늘따라 회장이 달달 볶아서 평소보다 두 공기는 더 드셨다.
아버지는 투귀의 눈앞에서 손을 휘저으며 상태를 살폈다. 누가 온 줄도 모르고 기절한 것 같다.
“이래도 되는 거냐?”
“바이탈 체크처럼 의식의 흐름을 살피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한, 5분 정도 걸리겠네요.”
“확실한 거냐?”
“오차 범위 내예요. 저 못 믿으세요?”
“믿기야 믿지. 하지만 네 일 아니라고 너무 막 하는 것 같아서.”
“저도 누가 좀 수련을 시켜 줬으면 좋겠네요. 혼자 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요.”
본인이 본인한테 걸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굳이 해 봤자, 아는 영역에 불과했다. 이 모든 수법은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다. 그걸 아버지가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느냔 말이다.
“하긴, 석천 형님이 역경에 굴복할 사람은 아니지.”
“저도 어르신을 믿고 하는 거예요.”
“부작용은 없겠지?”
“주화입마만 아니면 된 거죠.”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실전의 달인인 투귀가 정신이 무너지지는 않을 테고, 몸 상태만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부르르르!
잔경련이 일어나곤 있지만, 대단치는 않았다.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흐르는데.”
“집이 덥나 보네요.”
그렇다고 하기엔 보일러를 켜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부자(父子)는 한독불침을 예전에 이루었다. 일반인 친척이나 손님이 오지 않는 이상 보일러를 켤 이유가 없었다. 간혹, 온수를 걱정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삼매진화는 다용도였다.
세계는 에너지 절약과 환경보호를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마정석이 화석연료를 대체해 나가고 있으나, 여전히 많이 쓰였다. 미래 세대를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최소한 무공은 절정, 마도는 3계식까지 익혀야 한다. 나 하나쯤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이야말로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의 지름길이었다.
투드득, 투득!
3분쯤 지나자 투귀의 육신에서 골격이 변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된 거 같은데?”
“아시잖아요, 이거 환골탈태예요. 기연이란 한순간에 찾아온다고 하더니, 어르신은 천운이 따르네요.”
아들의 주둥이가 모처럼 길어졌다.
“하아, 너도 예상 못 했구나.”
“맛만 보라고 한 건데, 쩝.”
5분이 흘렀지만, 투귀는 가상 세계에 있었다. 다행히 환골탈태는 멈추었다. 식탁에 노폐물이 나오진 않았다. 투귀의 경지가 워낙 높아 육신의 최적화를 조금 더 이루었을 뿐이다.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가 예상을 상회하는군.’
시간 계산은 실수였다.
10분 후에 투귀의 동공에 생기가 깃들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투귀는 밥상머리에 앉아 있는 자신과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산하와 무진을 번갈아 보았다.
헉!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는 걸 자각했다.
“너 이 자식!”
“왜요?”
“왜요? 이딴 짓을 하고 그런 말이 나와!”
“누가 보면 100년은 지난 줄 알겠네요.”
“그래, 씨발. 100년이었다고!”
“괜찮아요, 10분 지났어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가상공간에서 투귀는 투신과 만났다.
같은 투씨라고, 괜한 개그를 치는 바람에 지옥이 되었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자지 않고, 투신과 싸우기만 했다. 그걸 자그마치 100년 동안 했다고 상상해 봐라. 지금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분당 1년으로 한다는 게 그만. 그래도 오차 범위 내라서 다행이네요.”
“뭔 놈의 오차 범위가 그래!”
5년에서 100년 사이를 오차 범위 내라고 하면 너무 엉성한 것 아니냐고. 세상에 믿을 놈이 없다지만, 밥 먹다가 100년이 흐르는 건 너무하잖아.
“강해졌으면 된 거 아닌가요.”
“그래 봤자 가상현실이라며, 변화가 있을 리 만무…… 응?”
몸 상태를 점검한 투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육신의 성능이 개선되었다. 여기에 가상현실에서 깨달은 오의를 섞는다면?
“권왕에게 가 보겠다.”
“그러세요.”
“그 전에 밥부터 먹자.”
“방금 드셨잖아요.”
“난 100년 전이었다고!”
“호오, 소화력이 좋아지셨네요.”
누차 말하지만, 업소용 밥솥이라 35인분은 너끈했다. 하는 김에 간단히 6첩 반상을 더 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