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왕서방, 무진(3)
무진은 요나와 크림이를 소환했다.
-요나!
-크림이!
둘 다 집에서 먹고, 자고, 놀아선지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특히 크림이는 복스럽게 잘 컸다. 날카롭던 이빨과 발톱을 갈아 주고 로션을 발라 준 효과였다. 요즘은 반려동물 제품들이 많아서 손쉬워졌다.
휘이이잉!
크어어엉!
물론, 변신 전의 모습일 뿐이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제법 성숙해진 요나와 산만 한 덩치의 야생성을 자랑하는 크림이였다.
-정령사도 부족해서 이젠 소환술사였어!
-저건 테이머야, 인마!
-어쨌든 부르면 오는 거잖아. 좋겠다. 집에선 흰둥이도 무시하는데.
-잠깐, 저거 뿔고양이 같은데? 저게 저렇게까지 클 수 있는 거였어?
-평소에 대체 뭘 먹이는 거야?
-고양이 츄르 잘 먹음. 다만, 저 정도면 최소 한 달 400만 원 각이다. 돈 없으면 키울 생각 하지도 마라.
-고양이를 사랑하는 집사치고 못된 사람 못 봤다. 무진이, 좋은 사람이구나.
-뭐야, 이 병신 같은 집사 년은!
무진의 멀티태스킹에 다들 놀랐지만, 하야토는 예상한 눈치였다. 초전박살을 꿈꾸는 이상, 모든 걸 드러낼 줄 알았다. 더욱이 자신을 알리지 못해 환장한 관종병 말기라면 더더욱.
‘오너라.’
하야토는 검을 빼서 자세를 잡았다. 어떤 공격이든 막아 낸 후 받아치겠다는 결사 항전의 태세였다.
대결이 시작됐다.
“크림이, 물어.”
-크림이!
크림이가 쇄도했다.
요나는 크림이를 지원하기 위해 40mm 고속 물총을 발사했다. 입을 잔뜩 부풀린 후 뱉어 내자 기관총이 따로 없었다. 물에 수압과 속도가 생기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주는 예시였다.
슈슈슈슝!
솨악, 쇄액!
마수를 다루고, 정령을 통제한 합공.
무식하게 돌진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크림이의 정면 돌진은 불규칙적이었다. 좌우로 페이크를 걸며, 그 타이밍에 요나의 물총이 쏘아졌다. 물총임에도 방탄유리를 가볍게 뚫어 낼 관통력을 지녔다.
“크림이, 분신술.”
솨솨솨솨솨솨솨!
좌우의 페인팅에 잔영이 발생하며 크림이가 늘어났다. 시간 차를 노리듯 발사된 요나의 물총이 하야토의 시선과 검로를 흩트린다.
파아앙!
배후에서 느긋하게 정황을 살피던 무진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졌다. 하야토의 감각을 흐리고, 균형이 무너지는 타이밍을 노렸다.
우웅!
찌릿!
사각을 봤다. 무진은 놓치지 않고 권극에 권기를 완성했다. 이 한 수로 하야토에게 회생 불능의 치명타를 날릴 심산이었다.
“걸렸다.”
슈우우웅!
피한다고 끝나지 않는다. 직접 타격은 페이크다. 권극에 담긴 권기가 공기와 만나 권풍을 이룬다. 와류를 일으킨 권풍을 받아 내기란 어려웠다.
슈우우웅!
대가리를 노린 권풍이 그대로 투과했다.
파파팟!
절체절명의 순간 하야토의 비영보가 [공간 이동] 스킬과 결합하여 무진의 제공권을 뛰어넘는다.
마수, 정령, 무공의 결합으로 완성된 회심의 일수가 비영보와 [공간 이동]에 와해되었다.
일시에 무진의 제공권이 하야토에게 제압되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압(劍壓)을 발산하며 천검류의 사형 천검단애(天劍斷崖)를 펼쳤다.
스왁!
검압에 일순 경직된 무진이 반으로 쪼개졌다.
마땅히 승리를 기뻐해야 하거늘.
하야토의 결의에 찬 각오가 무너지고 말았다. 쪼개진 무진은 곧 연기처럼 사라졌다. 일전 카즈마가 당한 수법을 고려했거늘, 이해하기 어려웠다.
“……언제?”
“처음부터.”
그러게 함부로 눈싸움을 걸지 말았어야지.
무진은 하야토의 집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마수와 정령을 소환했고, 일루전 마법을 걸었다. 그마저도 작금의 구도를 만들기 위한 연계로, 압도적인 역량으로 짓누르려고 했던 것조차 속임수였다.
초전박살은 위장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는 고도의 심리전을 이용한 빌드업 수 싸움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늦었어.”
반응하기에는 무진이 걸어 놓은 환천력이 예상보다 깊게 들어갔다. 카즈마가 당한 걸 보고 술식을 예상했을지 몰라도, 무진의 환술은 강 교관의 죽음을 통해 한 차원 더 발전했다. 사전에 만반의 대비를 했다면 모를까, 시작부터 어긋났다.
퍼어어엉!
하야토는 확실히 일본 생도 중 발군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당황할 법도 한데, 순간적으로 반응해서 충격을 최소화했다.
그럼에도 충격이 예상을 월등히 상회하고 있었다. 온전했다면 더욱 기민하게 대응하여 타격을 최소화했을 텐데.
“……제길!”
“방심한 대가야.”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고 하려던 하야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럴 여력도 없는 상태지만, 무진의 의도대로 끌려갔음을 깨달았다.
‘작은 공격은 막고, 큰 공격은 흘리면 돼.’
한 번 밀렸다고 해서 하야토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력이 부족하긴 해도, 단 한 번 임팩트 스킬을 쓸 기회를 기다렸다.
-요나, 퓨웅, 퓨융!
“굳이 입으로 하지 않아도 소리 난다.”
-크림이, 슈웅, 슈웅!
“입으로 하지 말라니까.”
누가 보면 정령과 마수를 학대하는 줄 알 거 아냐.
나 그런 사람 아니다.
동물, 정령, 마수를 사랑한단다.
누굴 닮아서 저러는지 원, 요나를 빼다 박은 크림이었다. 둘이서 뭔 놀이를 하는지 짐작이 가지만 상상하진 않았다.
“이 공격으로 끝내 주마.”
무진은 요나와 크림이를 정면에 세우고, 빈틈이 있을 때마다 하야토의 요혈에 권격을 날려 주었다.
퍼엉!
크억!
하야토는 간신히 막아 내기만 할 뿐, 전사경이 검신을 타고 들어와 내부를 흔들었다.
“어쭈, 버텨! 이번엔 진짜다.”
라고 말했지만, 무진은 아웃복싱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하야토가 반격할 때마다 약점을 치고 들어가 내외력을 갉아먹었다.
“이번엔 달라, 파워업!”
이라고 말했지만, 여전히 스피드를 이용해서 치고 빠질 뿐. 입으로만 필살기지, 하야토가 원하는 한 방은 날리지 않았다.
그러니 기회를 포착하기도 어려웠다. 워낙 빠르게 치고 빠지는 데다 정령과 마수의 합격이 까다로웠다. 틈이 나지 않기에 일발 역전을 기다리다간 그대로 고사할 판이다.
“설마?”
“또 늦었네.”
무진이 히죽거렸다.
이번에는 하야토도 평정심을 잃고 분노했다. 지금까지 쌓아 온 빌드업의 소산이었다. 사람의 속을 긁는 재주가 신화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빠득!
하야토도 무진의 페이스에 말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상황이 열악했다. 온전한 상태에서도 까다로운 상대를 불리한 형편에서 역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물며 유리한 국면을 더욱 유리하게 이끌 줄 알았다.
“이번에 진짜다.”
무진의 권모술수에 속지 않기 위해 하야토는 반대로 강하게 나갔었다. 한데, 이번에는 분신이었다. 베어 낸 잔상이 사라진다. 급히 방어식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무진이 더 빨랐다.
퍼어어어엉!
쿠다다당, 파앗!
몸을 비틀어 충격을 흘렸으나 하야토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곧바로 추격한 무진이 진각을 강하게 밟았다. 결투장의 바닥에 족인이 새겨졌다. 히어로 랜딩에 버금가는 빌런 워크였다. 영화에서처럼 영웅의 대가리를 밟아 터뜨리는 데 제격이었다.
-요나, 슈웅, 슈웅!
-크림, 솨악, 솨악!
무진의 진각을 피했지만, 하야토는 요나와 크림의 합격에 직격을 당했다. 그 상황까지도 예측했는지, 하야토가 물러서야 했던 공간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예측과 판단력이 완벽에 가깝도록 맞물렸다.
퍼억, 퍼억!
천검류의 제공권이 흐트러진 빈틈을 여지없이 파고들어 왔다. 권심에 담긴 발경이 내부를 강타하자, 하야토는 기겁했다. 전사력이 내부를 마구 휘젓는다. 오장육부와 기혈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급히 전사력을 흩어 내지만, 무진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바이딩, 홀드, 화염풍.”
이제는 마법까지 동원해서 하야토의 동선을 무디게 했다. 온전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지금으로선 조금만 타이밍이 늦어도 최악이었다. 요나의 물 폭격이 무진의 화염풍과 겹치며, 타는 듯한 수증기가 시야까지 가렸다.
퍼억, 퍽!
무진은 강한 일격보다 빠르고 간결한 잽 위주로 날렸다. 잽이라고 해서 가볍다고 여기면 곤란했다. 가장 완벽한 권로를 그리기에 하야토의 정신을 끊어 냈다.
비틀, 휘청!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기 속에서도 하야토는 끝끝내 버텨 냈다. 포기하지 않는 용기와 끈질긴 집념은 대단했다. 모두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더불어 키도 크고, 스마트하게 잘생겨서 여자들에겐 꿈속의 왕자님 상이었다.
“내 진심이 담긴 주먹을 맞고도 이토록 버티다니 아주 제법이다. 하지만 네 말대로 승부는 승부겠지.”
피 칠갑을 한 하야토를 응시하며 환하게 웃는 무진의 모습은 흡사 지상에 강림한 마왕처럼 보였다. 가지고 놀 장난감을 만나 흡족해하는 유희처럼.
역경을 이겨 내는 용사를 닮고 싶었으려나?
하야토는 포기하지 않는다.
“……올 테면 오너라!”
“그러냐.”
“의식을 끊어 내지 않는 한, 내 사전에 패배는 없다!”
“유언…… 아니 명언이긴 한데, 네가 원한 거다.”
“네놈의 비겁한 수작은 통하지 않아!”
“오냐. 네 용기가 가상하여 이 일격으로 끝내 주마. 지금까지 잘해 줬어.”
하야토의 도발에 응수할 만도 했다. 일격으로 끝내도 될 만큼 압도적으로 유리한 구도였다. 보는 관객들도 이제는 끝을 내 주기를 바랐다.
자기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교류전의 숭고함은커녕 흉계가 난무했다.
퍽, 스왁!
퍼억, 쇄액!
모두가 예라고 할 때, 무진은 아니라고 할 강단이 있었다. 시류나, 대세의 흐름에 따르지 않는 뚝심이었다.
하야토의 반응을 섬세하게 살피며 치고 빠지고, 정령과 마수와 연계했다. 도중에 기회가 생기면 환술을 걸어 혼미한 정신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전투임에도, 저축하는 기분이다. 차곡차곡, 원금과 이자를 복리로 쌓고 있었다.
하아아, 퍼억!
크어억, 퍼억!
호흡이 거칠어질 때마다.
신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무진의 잽과 같은 권격이 적중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우뚝!
아직도 서 있는 것은 하야토의 집념과 실력 때문이다. 그는 3학년 생도를 넘어선 검공과 회피력을 갖추었다.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하나, 출중한 기량이 하야토에겐 불운을 선사했다.
먼치킨이 아니면, 차라리 약한 편이 나을지도. 어중간한 강자일수록 불행했다.
퍽, 휘청!
퍼억, 비틀!
무진은 정신일도 하사불성의 하야토를 집요하게 갉아먹었다. 단숨에 끝을 내도 되지만, 조금이라도 역전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했다. 숨 막히도록 완벽하고, 철두철미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죽을힘을 다해 마왕을 죽였더니, 더 강한 마왕이 999명 남았다면 적당한 비유다.
후후후후!
보통 이 정도로 끈질기게 버티고 일어서면 질리기라도 할 텐데. 무진은 Nothing Better였다. 하야토가 쓰러지지 않고 버티자, 더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도가 지나친데.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쯤 했으면 그만해도 되잖아!
-생도가 포기를 안 하는데, 어떻게 말려?
-쟤도 독하네, 이럴 필욘 없을 텐데.
-일격에 끝내려고 하면 반격을 하니 어쩔 수 없지.
-근데 진짜 숨 막히게 완벽하네. 역공을 가할 타이밍이 아예 안 나와.
-하야토 오빠가 불쌍해, 이 악마야!
-이년은 잘생긴 놈만 나오면 무조건 오빠네. 국적이 대체 어디야? 쪽국으로 꺼져라.
-하마는 닥치고, 아프리카로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