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어우한(4)
교장은 전화를 받을 때마다 확답을 주지 않고, 상대를 애태웠다. 옆에서 본 교감, 마라창, 권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전에는 교장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색안경을 자연스럽게 끼게 되었다.
‘아주 그냥 뽕을 뽑는구나.’
‘당한 것 이상으로 확실하게 갚아 주시는군.’
‘하아, 내년도 교감 확정이네.’
능구렁이 같은 교장이긴 해도, 신뢰는 하고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성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면학 분위기를 위해 성운맹을 전폭적으로 밀어준 교장의 선견지명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8강 생도 대부분 성운맹도였다.
부글부글!
교장의 탄탄대로에 남궁천과 시게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누군 자리뿐만 아니라 생사가 걸려 있는데, 느긋하게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듣다 보니 자신들은 자리에 연연하는 속물이 되어 있었다.
후후후!
교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200세 시대에 벌써 관두면 안 되지. 내 반드시 연금을 모두 타 먹고 뒈지리라.’
교장은 재임 기간에 따라서 복리로 연금이 불어나는데, 액수가 상상을 초월했다. 재연임만 해도 어지간한 대기업 연봉을 가뿐하게 넘는데, 평생 받는다. 모두가 그렇듯 말로는 그만둔다고 해도, 명예퇴직당하면 서운할 수밖에 없다.
‘이놈이 내게는 연금 자산인가?’
화병과 연금이 따라다니는 걸 보면, 세상은 등가교환의 법칙이 확실했다.
“쩝, 아깝다.”
“최선을 다했으면 됐어.”
무진의 옆에 예슬이 앉아 있었다. 상처는 거의 다 회복이 되었고, 마력도 안정화 단계였다. 전력 대결을 벌여 패배하기는 했어도, 단체전에 나가는 데는 지장 없었다.
예슬은 관중의 열광적인 응원에 입맛이 썼다.
환호받는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빙정을 개방했으면 결과는 달랐을걸.”
“구명절초를 공개된 자리에서 내놓는 건 어리석어. 목숨 하나 버리는 꼴이야.”
“앞으로 더 강해지면 되지, 우린 아직 어리잖아.”
“일리는 있지만, 예슬 선배는 지금 탈락한 게 다행일지도 몰라.”
“어째서?”
“지수가 웃고 있어.”
결투장의 광경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지수의 얼굴이 화면 가득히 담겼다. 16k 영상임에도 주름 하나, 잡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하다. 이런 말 하면 욕먹을 수 있으나, 나이가 어린 게 깡패였다.
부르르르!
지수의 자애로운 미소에 예슬은 뒷골이 서늘해졌다. 웃는데, 전혀 웃기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공주 대신 저 앞에 서 있다면. 생각할수록 모골이 송연해진다.
“……끔찍하네! 져서 다행이다.”
“너무 빨리 받아들이는데.”
“하아, 저런 표정은 대체 어떻게 나오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구력이지.”
“구력은 개뿔, 내가 선배야. 너희들이 이상한 거라고!”
웃는데도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문제는 지수의 실체를 대부분 모른다는 사실이다. 대전 상대나 관객은 결투에 자신이 있어 여유를 부리는 줄 알았다.
“쟤는 왜 저렇게 화를 내고 있대?”
“나야 모르지.”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잘 들어 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도 선배도 듣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어제 나는 공주하고 전음 몇 마디를 주고받았어. 그게 다야, 고작 그런 일로 화를 낼 지수가 아니잖아.”
“……?”
예슬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지수를 보았다. 우연이었을까? 마주친 것 같았는데. 과도한 위기감이 뇌리를 스쳤다. 다만, 안전을 위해서 무진과는 약간 거리를 두었다. 괜한 오해는 패가망신과 진실의 연무장행이었다.
그때 지수가 뭐라고 했더라.
손가락이 많다고 했나?
혜진과 유정도 무진과는 혹시나 해서 거리를 두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심정이랄까. 평상시의 지수도 만만치 않은데, 화가 나면 어떨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 대결에서 분노한 지수를 보게 될지도.
그럼에도 반쯤은 긴가민가했다. 고작 그런 일로 분노하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일반인과 달리 각성자는 분노 조절에 민감해야 했다. 한순간의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각성자는 빌런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한다.”
보통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하지만, 잘못된 해석이었다.
기대한 그 이상이다.
시작과 동시에 모두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광경이 벌어졌다. 탐색전이나 전초전 같은 단어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공정한 대결을 벌이자고 인사를 한 후, 벌어진 사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유지수 승!
결투장 시스템이 지수의 승리를 선언했다.
……?
대연무장 안에 정적이 흘렀다.
관객들은 눈뜬장님들이 되어 있었다. 시작과 동시에 그다음 장면을 관객들은 보지 못했다.
지수와 공주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땐, 결판이 나 있었다. 승자인 지수는 오연히 서 있었고, 미츠키는 피떡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뭐야, 저거?
-……사람 얼굴이 아닌데!
-……대체 얼마나 맞은 거야?
-……아무리 그래도 저건!
각국 생도들도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공전절후의 대결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치열한 난타전이 이어질 줄 알았다. 막상 뚜껑을 열었더니 치열하기는커녕 눈 한 번 감는 순간에 끝이 나 버렸다.
싱겁다고 하기엔 일본 공주의 상태가 심각해 보인다. 기절한 채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
헐!
예슬, 혜진, 유정도 헛바람을 삼켰다. 관객들과 달리 그녀들은 제3자의 관찰자 시점으로 냉철하게 대결을 지켜봤다.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 흐릿하지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지수는 공주를 때리면서 웃었다.
‘화나게 하지 말자.’
‘반격이 날카로웠는데, 전부 보고 쳤어!’
‘미쳤네, 저게 가능해?’
속도, 정확성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무엇보다 소름 돋는 건 과감한 손속에 있었다. 일순간 상대를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레닌도 울고 갈 평등주의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주었다.
벌떡!
시게노는 자리에 선 채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결투장을 내려다보았다. 흐름이 불리하기는 했어도, 공주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만큼 공주는 고귀한 혈통 이전에 특별한 존재였다.
‘완전히 당했어!’
공주의 전신류는 싸울수록 상대의 전투력을 흡수하여 그 이상으로 강해진다. 무엇보다 공주도 자신의 열세를 받아들여 시간을 끌 목적으로 수세적으로 나갈 계획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방어하겠다고 작정하고 나오면 공주의 제공권은 철벽에 가까웠다.
‘기억 조작과 왜곡을 풀어놓았을 텐데.’
공주의 제공권이 까다로운 연유는 속성과의 연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흐름을 왜곡하여 기억을 지우고 더하기에 공주의 수성을 뚫기가 어려웠다.
‘속성에 흔들리지 않는 정신은 둘째 치고, 모든 방어를 한 끗 차이로 무력화하다니.’
순식간에 끝났지만, 그 안에서 펼쳐진 고난도의 수 싸움이 기가 막혔다. 처음 그 일격만 허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막아 냈을 텐데. 안타깝게도 공주는 권후에게 일격을 허용한 이후로, 반격이 모두 무력화되면서 일방적으로 주먹을 허용하고 말았다.
‘지독한 년!’
설령 그렇다고 한들, 공주를 피떡으로 만들었다. 대일본 제국의 꽃으로 불리는 공주의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승기를 잃었음에도 공주가 포기하지 않아서 더 맞기는 했으나, 회복하기 힘든 차이가 벌어졌다면 손속에 사정을 두었어야 했다.
‘분하지만 강해.’
분노를 제외하고 이성적으로 본다면 권후는 또래에선 완전무결했다. 권공의 완성도를 떠나, 실전에 굉장히 능숙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무인의 고이다 못해 썩은 노련함이었다.
허!
남궁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실로 놀라운 완성도다. 선수와 후발제인의 절묘한 연계가 일수유에 펼쳐졌다. 첫 일격으로 선공의 이득을 챙기고, 반격하는 공주의 반응을 보면서 전부 보고 쳤다. 무식하고 일방적인 난타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서로의 수가 촌음 단위로 이어진 것이다. 뛰는 공주 위에 나는 권후였다.
‘소림이 해 줄 수 있을까?’
권후의 강함이 예사롭지 않은 줄은 알았지만, 지금 보니 그마저도 여력을 감추고 있었다. 소림의 저력을 온전히 믿기에는 권후가 지나치게 막강하다.
‘이 노괴물이 자기 손녀도 괴물로 만들었구나!’
권왕의 손녀를 제물로 삼으려다가 도리어 제물이 되는 수가 있었다. 더욱이 대진도 한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수적으로 5명이라, 1명이 2명을 상대해야 했다. 한국이 교류전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전략적으로 나온다면 더더욱 골치 아파질 것이다.
와아아아아!
한동안 이어졌던 고요함이 깨지며 환호성이 터졌다. 스크린을 통해 슬로모션으로 상황이 설명될수록 관객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순식간에 끝나서 싱거운 줄 알았는데, 그 짧은 순간 몇 번이나 수 싸움을 한 거야?
-일방적으로 졸라게 처맞았지만, 그걸 버텨 내고 반격하는 것도 대단하네.
-권후의 첫 일격이 컸다. 그때부터 쪽빠리 공주는 모든 타이밍이 어긋났어.
-이게 생도 간의 대결이 맞아? 어른들도 쟤들은 피해 가야겠다.
-권후와 공주가 양아치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
-권후의 작전이 잘 먹혀들어 간 것도 있을 거야. 선수에 전부를 걸어 최대한 빨리 끝낼 심산인 것 같아. 결승을 노린 포석이겠지.
-카와이 공주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지. 권후가 너무 강했고, 전략도 잘 짰어. 그래도 그만하면 당황하지 않고 잘 버틴 거지.
-코피 흘렸으면 진 거지. 그것도 두 줄긴데.
관객들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대결을 복기했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판단이라 이상할 수도 있지만, 승자의 여유였다. 이겼으니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권후가 코피 터지고 일방적으로 당했다면, 정확한 평가는 불가능했다.
공주는 응급조치를 마치고 들것에 실려 내려갔다. 결투를 벌일 때는 몰랐는데, 왜소하고 어려 보여서 안쓰러웠다.
반면 무지막지한 폭력을 사용했다고는 믿기 힘든 권후의 초지일관에 다들 아연실색했다. 방금 대결을 끝마쳤다고는 보기 힘든 평온함이었다. 기식이 변하지 않고, 어깨의 기복이 평소대로였다.
-대결 전과 똑같은 것 같은데, 왜 섬뜩하냐?
-사람을 피떡으로 만들어 놓고, 저래도 되나?
-모르는 소리, 권후의 관대함이셔.
-대결은 항상 최선을 다해야지, 반칙을 쓴 것도 아니고.
-반칙은 아닌데, 약자를 괴롭힌 것 같아서 좀 그래.
-생도를 일반인이 걱정하는 거냐! 게다가 쟤들은 한 나라의 대표라고. 우리는 한주먹거리도 안 돼.
-봐주는 것보다 훨씬 낫지.
-이렇게 보니까, 권후의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다.
대연무장 전체를 압도하는 지수의 기도였다. 차기 한국을 대표하는 권후다운 모습이다.
중국, 일본의 생도들은 지수를 보며 긴장한 기색이 완연했다. 차후, 자신들의 앞길을 막을 최강의 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수는 결투장에서 내려와 무진이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예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 의자, 내가 데워 놨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