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어우한(3)
“크흠, 실언을 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머지 본심이 나온 남궁천은 급히 사과했다. 원치 않은 사태의 연속이긴 해도, 대중화의 교관으로서 품위를 잃어선 안 되었다. 공식적인 자리인 만큼 나중에 책잡힐 수도 있었다.
“그 심정은 이해하네. 나도 어른답지 못하게 흥분하고 말았어. 하나, 나이는 민감한 사안이니 예의를 갖춰 주기를 바라네.”
“……그리하지요(꽈득).”
표정들 봐라.
교장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적당히 감추었다. 이럴 땐 참지 못하는 척 웃어 줘야 제맛이었다. 노골적으로 대놓고 웃는 것보다 효과가 좋았다.
‘누차 말하지만, 무진이하고 엮이면 안 된다니까.’
실실 쪼개던 교장은 불현듯 인상을 찌푸렸다.
따지고 보면 무진과 가장 많이 엮인 건 본인이었다. 참혹한 현실을 자각하자, 더는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남이 당할 때는 재밌는데, 내가 당할 걸 상기하니 골이 지끈거린다.
‘아군이라고 방심할 순 없지.’
무진은 적아를 막론하고 속 터지게 만드는 재주를 타고났다. 같은 편이라고 안심하고 있다간, 언제 뒤통수를 오지게 처맞을지 모른다.
‘이런 흐름이라니!’
‘이대론 위험하다.’
남궁천과 시게노의 뇌리에 최악이 스쳤다. 2회전부터는 달라져야 마땅한데, 연거푸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기세가 끝을 모르고 상승했다.
‘이 모든 게 저놈의 수작이었어!’
‘교장과 짜고 친 게 분명해!’
일본과 중국은 무진의 계략에 홀라당 넘어가 승리와 기세를 고스란히 헌납하고 말았다. 집단의 중심이 따로 있고, 무진은 분위기를 끌어오는 페이스메이커가 분명했다.
‘똑바로 하지 못해!’
‘이번에도 지면 다들 각오하시오!’
위기를 자각한 남궁천과 시게노는 생도를 통제하는 교관들을 전음으로 다그쳤다. 더 이상의 패배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나마 주 전력은 남아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승리한다면 한국에 내준 기선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결코, 당신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하야토, 너만 믿는다!’
3회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결이 남았다. 생도는 한국을 대표하는 권후 유지수와 일본의 고귀한 혈통 미츠키 공주였다. 이 대결의 승자가 8강전에 오르게 된다.
유지수는 2회전도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며 손쉽게 올라왔다. 반면, 미츠키는 2회전에서 고전했었다. 1회전을 수월하게 이겨 상대국 생도를 가볍게 여긴 탓이다. 될수록 진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국의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높았어.’
미츠키는 개인전이 한국의 일방적인 우위로 흘러가게 될 줄은 몰랐다. 특히 2회전 상대였던 도예슬은 까다로운 상성을 떠나, 6계식에 오른 상위 마법사였다.
마도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는 동아시아에서 3학년이 벌써 6계식에 오르다니. 마도의 천재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재능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마제라고 했지.’
도예슬은 한국 마도를 대표하는 대마법사의 후예답게 마법의 발현과 연계가 굉장히 능숙했다. 실전 같은 훈련을 병행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마도식이었다.
그녀로선 속성은 물론, 황궁의 비전술식인 탐식까지 꺼내 들어야 했다.
‘당황할 만도 했을 텐데.’
처음 보는 속성과 술식이었다. 백전노장의 경험 많은 마법사가 아닌 이상, 허둥지둥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타이밍이 잠깐 어긋났을 뿐, 곧바로 능수능란하게 대응해 왔었다. 정석, 변칙, 역공, 난전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은 복기할수록 놀라웠다. 술식만 꺼내 들었다면 이 자리에 올라오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 재밌었어.’
미츠키는 고전했지만, 낙담하진 않았다. 반대로 투쟁심이 끓어올랐다. 여린 외모와 달리 강자를 꺾고 이겨 내는 쾌감을 즐기는 호전적인 스타일이었다. 더욱이 그녀의 진의 전신류(戰神類)는 싸울수록 강해지는 무공이었다.
‘세상의 모든 무공을 탐식하여 나만의 전신류를 만들고 말겠어.’
전신류는 형식이 정해지지 않았다. 바탕을 세우는 기본일 뿐, 나머지는 본인의 무공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대종사의 재능을 갖추지 않고서는 감히 전신류를 익힐 수 없었다.
‘이번에는 권왕가의 무공을 나의 무공으로 만들겠어.’
전력상으론 권후의 우위였다. 실력도 뛰어나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올라왔기에 전력을 온전히 보전했다.
미츠키는 물약과 스킬로 최대한 회복하긴 했어도 완전하지는 않았다. 이는 온전한 전력으로 싸우지 못하는 토너먼트의 단점이었다. 전력에서 압도적인 우위가 아닌 이상, 위로 올라갈수록 뜻하지 않은 전력 손실과 부상을 당할 수 있었다. 토너먼트에선 실력과 운이 받쳐 줘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오지 않았다.
불리한 흐름임에도 미츠키는 자신 있었다.
‘날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만면에 여유롭고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지수를 향해 미츠키는 투지를 불태웠다. 어떠한 역경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전신류를 믿었다. 대결을 치를수록 전신류는 빛을 발할 테고, 마지막에 서 있는 자가 승자였다.
-권후와 공주의 대결이라 흥미진진하네.
-둘 다 엄청 센데, 미모가 장난 아니다.
-혈통, 무공, 외모 다 가졌어.
-어쨌든 이번 대결은 권후의 압승이지.
-일본 공주도 잘하던데. 2회전에서 우리나라 마법소녀를 이겼잖아. 마법소녀 예슬도 6계식이면 천재지.
-만전이면 모를까, 쉬는 시간이 너무 짧아. 회복한다고 해도 온전한 전력이 아닐 거야.
-이럴 땐 전력이 비슷해야 재밌는데. 그래야 이겼을 때 일본이 찍소리 못 하지. 이것들은 지면 꼭 딴소리를 한단 말이야.
-토너먼트에서 대진운도 무시 못 하긴 하지.
교류전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유는 다른 거 없다. 우리나라 생도들의 승리가 이어지고 있어서다. 연전연승에 여유가 생겼다. 교양 없이 상대를 비방하거나, 욕하지 않는 아름다운 교류전이었다.
-우리의 무진 공께선 이미 8강에 갔느니라.
-하다 하다 별걸 다 하네. 그건 그냥 운이 좋은 거잖아.
-단순히 운이 좋아서 8강 갔다고 하면 떨어진 중국, 일본 생도들은 어쩌라는 거야.
-우리까지 생도들에게 부담을 주진 말자고.
-다들 대인배들 나셨네, 이러다 연패하고 우승 뺏기면 그때도 지금처럼 위로하자고 할 수 있겠냐!
-무진 가라사대, 본좌가 곧 법이니라.
-컨셉이 뒤죽박죽이잖아, 차라리 네가 응원하는 녀석처럼 일관성이라도 있어야지. 이건 뭐 재미도 없고!
한국은 개인전 8강의 네 자리를 확보한 상태였다. 권후마저 올라가면 8명 중 5명이 우리 생도가 된다. 토너먼트는 타 국가와의 대전을 전제하지만, 수가 맞지 않으면 한국 생도 간의 대결이 벌어지게 된다.
즉, 전략적 선택이 가능해진다는 뜻이 된다. 중국과 일본은 많이 불리해진 형국이었다.
‘빌어먹을,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공주님, 제발 이겨 주십시오!’
남궁천과 시게노의 안색은 까맣게 죽어 가고 있었다. 이미 표정 관리를 할 범주는 벗어나 버렸다. 처음부터 일이 꼬이더니, 하나같이 엉망이 되었다.
어떻게든 한국의 선전을 막기 위해서 자국의 교관과 생도를 독려했지만, 무의미한 짓이 되었다. 되레 부담을 느꼈는지, 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말렸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결승에 올라가야 해!’
‘우승해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살길이다!’
개인전은 한국에 내어 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결승을 기준으로 하여 아래로 서열을 정하고, 점수를 산정하는 방식이었다. 다수의 한국 생도가 올라온 이상, 인원당 정해진 가산점까지 받는다.
설령 중국과 일본이 우승해도 개인전 점수는 한국이 더 높았다. 하나, 우승에 대한 가산점과 상징성은 무시하기 힘들다. 아무리 높은 점수를 받아도 우승하지 못하면 팥소(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했다.
‘개인전을 우승하고, 단체전에서 뒤집는다.’
‘제갈세가의 기관진법술이 있는 이상, 단체전 우승은 충분해.’
개인전에서 잃은 점수를 만회하려면 단체전에서 점수를 벌리거나, 한국이 점수를 얻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그 전에 체면치레를 위해서라도 개인전 우승이 필요하다.
‘공주님이라도 필히 올라가야 합니다.’
‘이번엔 일본 공주가 올라오는 편이 낫겠지.’
권후가 올라온다면 상대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의 무위는 한국 생도 가운데서도 으뜸이었다. 최소한 전력 약화나 부상이라도 당해야 했다.
조급한 남궁천이나 시게노와 달리 교장은 여유 만만이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생도들이 잘해 준 거지요.”
-대단한 일이지요. 우리 역사에 남을 쾌거입니다. 생도들만 잘했다고 되는 일입니까?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축하를 받기엔 개인전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교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알지요. 하지만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이야말로 참된 교육자십니다. 다음에도 부탁드립니다.
“물러날 때를 아는 사람이 현자라고 했습니다.”
-큰일 날 소리를 하십니다. 반드시 재임하도록 제가 힘을 쓰겠습니다.
개인전 우승자가 가려지기도 전에 교장의 휴대폰이 시도 때도 없이 울리고 있었다. 사전에 어떻게든 공적을 쌓고, 만회해 보려는 시도였다.
교장은 한 번에 받지 않고, 시간을 끌면서 받았다. 예의에 어긋날 수도 있으나, 교류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교장 자리를 위태롭게 했던 자들의 전화였다.
물론, 대놓고 말할 만큼 교장은 어리석지 않았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상대방을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누가 갑인지 깨닫게 해 주려는 의도였다.
이 판국에 당신 아니어도 할 사람 많다고 하기엔 교류전 8강에 우리 생도가 많이 올라왔다. 10년 내내 개인전에서 좋지 않은 성적을 냈던 걸 상기하면 정부로선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실상, 교장이 자진해서 그만둬도 문제가 된다.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지만, 정부는 여론의 눈치를 보며 교장을 압박했었다. 성적이 시원치 않거나 어중간하면 갈아 치울 명분이라도 있을 테지만, 예상치를 상회하는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특히 정부의 헌터를 관리하는 행정안전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은 불똥이 떨어질 걸 염려했다. 다음 선거와 인사를 위해 교장에게 미리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교장은 성급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고, 결과도 자신의 편이었다.
“당장은 모르겠습니다.”
-풍신께서 교장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제가 단단히 말해 놓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저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도, 더 나아가 국민을 위한 일입니다. 힘에 부치시겠지만, 심사숙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처럼만 하시면 되는 일입니다.
정부로선 대통령까지 교류전에 관심을 드러내자 어떻게든 교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야 했다. 더욱이 여론도 하루 사이에 반전하며 교장을 추켜세우기 바빴다. 교장을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삽시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