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개인전(4)
‘오너라.’
공격이 제일의 방어긴 하나, 카즈마의 검역과 속성은 후발제인의 카운터에 최적화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들어오는 상대의 공격 루트를 파악하고, 빈틈을 공략했었다.
막 대결 신호가 울리던 차, 무진이 카즈마에게 말을 걸었다.
“정면으로 쇄도했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후, 아래에서 위로 어퍼를 날릴 거야. 이걸 피하면 무진보로 간격을 좁혀 권영을 완성하겠어.”
“……!”
감정의 고조가 없는 냉면(冷面)의 카즈마로서도 예상치 못한 선전포고에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자신을 상대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경우를 본 적이 없기에 신경이 쓰였다.
곧, 심신을 가라앉혔다.
‘격장지계다.’
카즈마는 무진의 신상 내력과 결투 영상을 바래지도록 살폈었다. 압도적인 괴력을 선보이며 원패턴의 단순한 전투처럼 보이나, 실상은 수 싸움으로 빈틈을 노리는 노련한 싸움꾼이었다. 이제까지는 심리전이 통했을지 모르나, 자신은 달랐다.
응?
무진의 화술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했던 카즈마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가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어째서?’
검역과 [예측 시뮬레이션]의 종합적인 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예측한 대로 대응하여 카운터를 노리면 되었다. 문제는 노림수가 무진이 말한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단한 놈이구나.’
카즈마는 홋카이도의 냉검이며, 부동심의 화신으로 불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냉철한 판단을 내려 왔다.
허!
지금은 순간적으로 감정의 기복이 전해졌다. 상대가 자신을 가볍게 여긴다는 걸 알자, 자신도 모르게 투기가 발산되었다.
‘그런 조잡한 수는 통하지 않아.’
검역과 속성의 예측은 정확하다. 부동심을 깨트려 반응이 늦도록 유도했겠지만, 카즈마는 냉철한 이성을 유지했다. 하나가 통하지 않으면 이중 삼중으로 덫을 놓았던 무진의 전투 스킬을 되짚었다.
쐐액!
사전 예고한 무진이 정면으로 쇄도했다.
카즈마는 발도술의 자세를 취한 후 기다렸다. 분기점이 되어 오른쪽으로 투로의 각을 트는 때를 노린다.
스왁!
명검류 2형 명천뢰(明天雷).
검집에서 나오는 타이밍에 명화기를 발산, 빛의 포화가 생성되었다. 일순 눈을 멀게 하는 세상으로 화하다, 공간을 가르는 검뢰가 목표물을 베어 나갔다.
스왁!
오른쪽으로 각을 튼 무진의 신형이 반으로 쪼개진다.
“……아니!”
“너 뭐 하냐?”
표정의 변화가 없었던 카즈마의 냉면에 당혹성이 그려졌다. 오른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목표를 갈라냈다.
반면, 무진의 실체는 왼쪽에 있었다. 반대쪽에 검을 휘둘렀으니, 허공에 대고 삽질한 격이다.
당황했던 카즈마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검역과 속성의 예측대로 방향을 틀었다.
뻐어억!
어퍼를 예상하고 고개를 젖혔던 카즈마는 휘어져 들어오는 무진의 레프트 훅에 제대로 걸렸다.
쐐애애액!
쿠다다당!
카즈마는 결투장의 투명 결계를 향해 날아갔다가 튕기며, 바닥을 굴렀다. 하늘을 이불 삼고 눕게 된 카즈마의 눈에 억울함이 깃들었다. 예측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검역과 속성이 아닌 감각을 믿었다면 피하거나, 흘렸을 수도 있었다.
“속성에만 의지해선 안 되지.”
“알고 있었군…… 꼴까닥!”
화가 날 만도 할 텐데.
카즈마는 끝까지 냉철함을 유지한 채 기절했다. 기절할 때까지도 자신의 패착을 복기하는 것 같았다. 아마 꿈속에서 복기한 대로 반격기를 연습하고 있을지도.
-강무진 승.
와아아아아아아!
무진의 승리가 선언되자, 고막이 찢어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일련의 과정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다들 어안이 벙벙하지만, 여하튼 자국의 승리를 자축할 따름이었다.
대결장에 설치된 초고속 카메라를 통해 무진의 승리를 다시 확인했다. 돌진하여 방향을 튼 후, 일격을 선사한 장면이 반복 재생되었다.
-속도 지리네, 누가 힘캐라고 했어!
-정면으로 쇄도할 때 사라진 것 같았는데, 왼쪽에서 나타났잖아.
-얼마나 속도 차이가 심하면 아예 다른 방향으로 검을 휘두르냐.
-레프트 훅성으로 휘두르는 주먹이 정확히 들어갔네, 저거 맞으면 못 일어나지.
-방향을 예측하지 못한 탓도 커!
-외형만 봐선 무식하게 싸울 것 같았는데, 졸라 스마트하잖아.
-허세는커녕, 실력은 진짜였어.
무진의 원패턴은 제법 많이 알려져 있었다. 짤과 밈으로 반복 동작이 연속 재생되어 조회 수가 상당했다.
특히 원패턴에 당하는 생도의 심정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알면서도 당하니 얼마나 복장이 터지겠는가. 보는 사람들도 자신을 대입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 황당할 뿐이었다.
무지막지한 피지컬로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 결국에는 한 방을 날리는 패턴이 무진의 정석이었다. 결투장이라는 정해진 구역 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대로선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짜증 나긴 해도, 승리가 보장된 전술이었다.
국가전에서도 같은 전술을 보여 줄 줄 알았는데, 스피드와 페이크로 일격에 끝을 냈다. 원펀치, 원패턴은 단어는 비슷해도, 대결 방식은 전혀 달랐다.
-힘만 세다고 하지 않았나?
-마나 극복한 지가 언젠데, 만년삼왕하고 드래곤하트를 복용했다고!
-둘 다 sss급 영약이잖아, 그거 먹고 극복 못 하면 그것도 이상하긴 하네.
-그래도 운은 타고났나 봐. 기연이란 기연은 혼자 독차지하잖아.
-내가 먹었으면 저것보다 더 잘했어!
시작과 동시에 끝나서 김이 샐 수도 있었지만, 관객은 우리나라의 승리에 무조건 환호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과 별개로, 상대가 일본과 중국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중국과 일본도 한국을 짓밟으면 환호하지 않던가. 한·중·일의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어, 논리적인 설득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부릅!
카즈마의 패배가 전광판에 새겨지자, 시게노는 눈을 의심했다. 무진의 속도가 빠르긴 했어도 대처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홋카이도의 쾌검수인 카즈마가 전혀 대응하지 못하다니. 수 싸움에서 완벽히 밀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경우는 술법뿐인데.’
카즈마의 속성을 역으로 이용해서 함정을 팠다는 얘기가 되었다. 마도를 익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주술과 환술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빌어먹을, 제대로 당했군.’
다른 수도 아니고 술법에 당했다면 망신이 따로 없었다.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한국은 술법에는 연구도, 투자도 거의 하지 않았다.
처음에 말을 걸어 혼란을 준 것도 환술을 걸기 위한 빌드업이 분명했다. 그 짧은 순간 암시를 걸어 대응하지 못하도록 속였다면, 가볍게 여겨선 안 되었다.
시게노는 허허로운 교장의 태도가 갈수록 얄미워졌다.
“이런 말 하면 편애로 보일 테지만, 내 수제자나 다름이 없는 아이라오.”
“……훌륭한 제자를 두셨습니다.”
의례적인 말도 이제는 왜 이리 얄미울까? 그렇다고 제자를 칭찬하는 스승을 욕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 강직했던 풍신도 나이가 들어선 능구렁이가 되어 버렸다.
‘우리 무진이 맛이 어떠냐, 요것들아! 나만 당할 순 없지.’
교장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전법으로 시게노와 남궁천의 속을 얄밉게 긁어 댔다. 평소 무진이가 자주 써먹던 화법으로. 당할 때는 속 터졌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고소한지.
크흠.
시게노는 끓어오르는 화를 다스려야 했다. 말을 나눠 봤자 속만 쓰렸다.
남궁천은 연신 헛기침하며 탐탁지 않아 했다. 십검가라고 해서 내심 기대했거늘, 꼴사납게 일격에 당하고 말았다.
‘장위가 당할 만했군.’
장위가 멍청하긴 해도 무능력하진 않았다. 그걸 증명한 일전이기는 한데, 진짜 실력을 볼 사이도 없이 끝이 나 버렸다. 결국, 놈과 대결할 때까진 약점을 공략하긴 어렵게 되었다.
‘빌어먹을 놈, 대진운까지 좋구나.’
무진의 대진표는 명검가의 카즈마를 제외하면 다른 조와 비교해서 무난한 편인 데다 부전승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남궁천은 무진이 5회전까지 올라오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대진표대로라면 4회전에서 남궁의 직계와 붙는다.
부르르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분노하는 인물이 있었다. 복수를 다짐하며 비약을 사용했다. 놈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두들겨 팰 수 있다면 수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복수자가 되었던 장위는 분통을 터뜨렸다. 무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패배를 거론도 하지 않았거늘, 1회전 시작과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허무한 복심이 되었다.
대중화산 최신형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약점을 분석하고, 천극단까지 공수해 왔거늘. 복수도 최소한 2회전에는 올라간 후에나 할 수 있었다. 1회전에서 탈락하고 복수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대뇌 망상의 어불성설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개인전에서 이루지 못한 복수를 단체전에서는 반드시 갚아 주겠다고 다짐하는 장위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장위는 주먹을 불끈 쥐며 2회전에 올라간 무진이 부럽……지가 않고, 복수를 천명했다.
찌릿, 찌릿!
장위가 하도 노려봐서 당사자도, 그 주변도 외면하지 못했다. 사실 모른 척하기도 어려운 원한 관계였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다 알고 있었다.
헐!
가장 어처구니없는 건 무진도, 관객도 아닌 예슬이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장위의 1회전 상대가 예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무공도, 속성도, 정신머리도 어정쩡했다.
“쟨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거야? 한 번 당한 걸로는 성이 차지 않나.”
“놔둬, 중국이잖아.”
각성자 이전부터 이후까지, 중국의 무인들이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는 꼴은 보지 못했다. 꼭 패하면 공기의 질이 나쁘거나, 귀신이 나타났다거나, 생각지도 못한 핑계를 대서 얼버무렸었다.
실상, 예슬은 공으로 1회전을 먹고 들어갔다. 복수에 눈이 멀어 상대를 경시한 탓도 있고.
예슬은 마법사답게 장위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시작과 동시에 장위를 바인딩 트랩, 아이스 홀드로 꼼짝 못 하게 한 후 블랙 아이스를 걸어 결투장 밖으로 밀어 버렸다. 투명결계가 있다고는 하나, 5초간 벗어나지 못하면 자동 패배가 된다.
“강한 것도 아니고, 멍청하기까지 하던데.”
“그게 바로 장위의 매력이야.”
“또 무슨 꿍꿍이야?”
“교섭의 기본을 지키려는 거지.”
예슬은 물론, 지수까지 미간을 찌푸렸다. 장위만을 노리지 않았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런 것도 모르고 열심히 복수심을 불태우는 장위가 불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