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개인전(3)
고귀한 혈통을 선전할 공식적인 대회였다. 방해물이 된다면 그 전에 반드시 치워 버려야 했다. 이대로 승부가 끝난다면 다음 상대는 십검가가 될 테니, 이기지 못하면 내외력을 깎아 놓기는 해야 했다.
남궁천과 시게노는 권후의 승리가 대세에 영향을 주진 않으리라 판단해 안심했지만.
-진태수 승.
-천혜진 승.
-소유정 승.
-도예슬 승.
권후의 승리 이후로 한국의 기세가 완연히 달라졌다. 성운맹주의 승리를 기점으로 연거푸 중국과 일본의 생도를 격파했다. 권후처럼 모두가 압도적인 대결이라고 하긴 어려워도 결국 이겨 냈다.
특히 4인방의 활약이 눈부셨다.
기본적으로 기량이 부족하다고 평가받았지만, 4인방은 기어이 이겨 내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30분을 전부 소모하여 판정승을 거둔 건 실로 압권이었다. 오히려 압살하는 것보다 흥미진진했다.
“명하신 대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주군.”
“수고했어.”
4인방은 승리하기가 무섭게 무진의 앞으로 달려왔었다. 다른 누구보다 무진의 축하를 받고 싶었다. 만약 주군을 만나지 못했다면 언감생심 교류전에 나오지도 못했다. 이 모든 영광을 주군에게 돌려도 아깝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강심장을 얻었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 생겼어.’
‘보이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몸이 반응하다니.’
‘그 무엇보다 우리는 이기는 법을 알게 됐지.’
기량 자체는 압도적이지 않았다. 10번을 싸운다면 반절은 패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다시 싸운다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다.
잘 싸우고 이기는 법을 체득한 것이다. 사실 이게 별거 아닐 수도 있으나 실전에선 가장 중요했다. 기량이 월등히 뛰어나도 이기는 법을 모르면 의외성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린 개인이 아닌 하나야.’
‘우리가 함께하는 이상, 주군을 빼곤 누구도 못 이겨.’
‘주군과 맞먹으려고 한 저 잼미니부터 보내 버리자고.’
‘저 새끼는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4인방이 느낀 경이를 진태수, 도예슬, 천혜진, 소유정도 절실히 체감했다. 무진과 훈련할 때는 쌍욕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버티고 나니 비슷한 또래는 성에 차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우리 몸에 뭘 심은 거야?’
‘몸이 저절로 반응하잖아.’
‘상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안목은 어떻고?’
그간의 훈련 성과가 대결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무진의 훈련에 어지간한 수가 아니라, 모든 수가 함축되어 있었다. 중국과 일본 생도는 이기기 위해서 최선의 수를 썼지만, 무진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동안 우릴 아주 달달 볶았구나.’
‘어떻게 된 게 다 익숙해.’
‘주마등이 괜히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었어.’
‘수 싸움의 괴물이야.’
무진은 부족한 마나흡수력을 기술적인 스킬과 노련한 전략으로 이겨 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이제는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지금의 압도적인 기량보다 이전이 훨씬 대단했다.
이를 무진과 대련을 해 봤던 생도들도 체감하고 있었다. 기량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변수에 대한 적응이 남달라졌다. 또한, 승리를 위한 자신만의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대단한 새끼네, 진짜!’
‘괜히 권왕의 제자가 된 게 아니구나!’
‘그래도 인정하고 싶진 않아.’
‘망할, 정말로 고맙잖아!’
승리한 생도와 대결이 남은 생도의 반응이 갈렸다. 승기를 잡으면서 무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것이 마냥 좋게만 보이진 않은 것이다.
하나, 아카데미의 경쟁자가 아닌 국가를 대표하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이란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이 순간 하나가 되었다.
“또 이겼어!”
“파죽지세가 따로 없구나!”
“십보 전진을 위한 일보 페이크였어!”
“어떠냐, 이놈들아! 이게 바로 k-생도 맛이다!”
“표정 봐라, 아주 기가 살았구먼!”
“이게 다 권후의 1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야!”
“권후! 권후! 권후!”
작게.
상원은 나도 이겼다고 중얼거렸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무조건 권후만을 찬양했다.
‘다 부숴 버릴 테다!’
이 더러운 세상!
“아니!”
“이런!”
한국의 연이은 승리에 남궁천과 시게노의 표정이 찰나 일그러졌다. 한두 번의 승리야 받아들일 수 있으나, 연이은 패배는 예상 밖이었다. 권후의 선전으로 인해 기세가 올랐어도, 기본적으로 기량이 받쳐 주어야 했다.
‘대련보다 전투에 익숙하다.’
‘날카로운 비수를 감추고 있었구나.’
승리한 생도들의 면면을 살핀 남궁천과 시게노는 안색이 굳었다. 한국 생도들에게서 백전노장의 능숙함이 보였다. 적지 않은 실전은 물론, 수많은 대련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었다.
2002년 한국 축구 4강을 이룬 히딩크의 합숙 훈련과 같았다. 그 당시 우리 배가 얼마나 아팠던가. 개최지 이점이 아닌 편파라고 갖은 모략을 해야 했었다.
‘철저히 우릴 속였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교장의 여유가 이제는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교류전을 포기한 척 유유자적 방심을 유도한 것이다. 처음부터 저 정도의 실력을 보였다면 경시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한국이 교류전을 위해 비밀리에 합숙하고, 경험 많은 가문, 길드의 후원을 받아 특별 훈련을 했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처럼 능숙한 기량을 선보이기 힘들었다.
“허허,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지 않겠소.”
“그렇긴 하지요. 하나, 다음부터는 다를 겁니다.”
“이제는 우리도 방심하지 않습니다.”
남궁천과 시게노는 어설프게 감정을 드러내거나 분노하진 않았다. 다만, 교장의 의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아직은 참을 만한가 보군. 껄껄껄!’
한계치는 사람마다 다양하지만, 바닥을 보일 때 비로소 본인을 자각하게 된다. 1차전 경기가 끝나지 않았고, 중국과 일본의 주 전력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2차전이 시작되면 어떤 표정일지 교장은 심히 기대되었다.
와아아아아아!
대결이 이어질수록 교장의 예견대로 남궁천과 시게노는 감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중국과 일본도 몇 번 승리하긴 했지만, 시작할 때와 달리 반절도 되지 않았다. 한국 생도들의 분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방심하지 않고 전력 대결을 벌이는데도, 승패를 반복했다.
“허허허, 우리 생도들이 대결을 통해 많이 배운 모양이오.”
이제는 교장의 말도 거슬렸다.
명백한 기만책이었다.
남궁천과 시게노는 드러나지 않게 분기를 삭이면서도, 패배한 생도들을 노려보았다. 대중화, 대일본의 기개를 보여도 시원찮을 판국에 한국의 기를 살려 주고 있었다.
그들이 겪어 본 한국은 기세가 오르면 기고만장함이 끝을 몰랐다. 원래 그런 민족성이기에, 패배감을 심어 주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해야 했다.
1회전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강무진 vs 카즈마.
다음 대결에 시게노는 안도했다.
명검가의 카즈마라면 신뢰하고도 남을 기량을 갖춘 일본 아카데미의 신성이었다. 십검가의 생도 중에서도 서열 3위에 드는 실력자였다. 특히 이제까지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지 않은 점은 칭찬해야 마땅했다.
‘분석이 되지 않은 이상,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한국 생도들의 승리 중 절반은 전투의 능숙함과 적재적소의 상황 대처에 있었다. 교장은 안 그런 척했지만, 본국에 관한 분석을 철저히 해 온 것이다. 분석이 되지 않은 카즈마라면 좋지 않은 작금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었다.
화들짝!
와아아아아아아!
대연무장이 떠나갈 듯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함성의 강도는 의외로 권후보다 훨씬 컸다.
결투장으로 올라선 무진이 관람객을 위해 손을 흔들었다. 이 대회의 주인공인 것처럼 한껏 자신감을 드러냈다.
-나는 권후보다 이 녀석이 더 궁금했어.
-따지고 보면 성운맹도 이 녀석이 만들었지. 지금 2회전에 오른 생도들을 봐 봐, 전부 성운맹도야.
-이 대결을 보려고 내가 해남에서 왔다고!
-넌 그냥 땅끝마을로 꺼져.
-일단 중국을 엿 먹였으니, 이번에 못해도 까방권 획득이지.
-저 거만한 태도를 봐라, 이게 바로 흔들리지 않는 사나이의 뚝심이지!
-어떻게 싸울지 솔직히 존나 기대된다!
교류전 전부터 화제성으로 따지면 무진을 따라올 생도가 없다. 칠대 가문, 대형 길드 소속이 아닌 일반 생도가 이런 식으로 모두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웠다.
호감도가 높았다면 지금처럼 관심이 쏠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두둔하는 부류와 반감을 산 부류가 극단적으로 나뉘어서 전국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반감과 호감의 치열한 대립이 관심을 끄는 요인이었다.
관람객도 두 부류로 나뉘었다.
와아아아아아!
우우우우우우!
응원과 야유가 심하게 교차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이겨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무진은 우리 생도였다. 일본 생도에게 패배하여 기가 죽기를 바라진 않았다. 무진의 기를 죽이는 건 우리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태웠다.
‘광대가 따로 없군.’
‘저놈만은 가만둘 수 없지.’
관객의 환호성이 커질 때 시게노와 남궁천의 시선이 교차했다. 찰나, 서로의 마음이 통한 것이다.
특히 중국은 무진의 볼썽사나운 패배를 기대했다. 대진표를 조정할 수 있다면 자국 생도를 붙였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중국으로선 장위의 국제 망신을 되갚아 주어야 했다. 그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무진은 중국의 척결 대상 1순위였다.
착!
무진과 카즈마가 마주했다.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카즈마를 안중에 두지 않는 무진이었다. 그에 반해 카즈마는 절도 있는 예의를 차렸다. 무진의 무례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절제력을 보여 주었다.
‘나는 방심하지 않는다.’
카즈마는 냉철한 시선으로 무진을 살폈다. 광대놀음을 즐기는 무진의 태도는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으로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진의 육체는 평범한 수련으론 쌓아 올리기 어려웠다. 외공이 내공에 비해 천시받지만, 경지에 이른다면 무시할 수 없었다.
‘전력을 다해 상대해 주마!’
카즈마는 시작 전부터 [예측 시뮬레이션] 속성을 개방했다. 단계를 넘어설수록 다음을 예측하는 정확성이 높아졌다. 이미 자신과 비슷한 또래에서 [예측 시뮬레이션]을 벗어나는 경우는 세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마저도 예측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기에 자신하고 있었다.
우웅!
명검가의 신공 명화기(明火氣)를 7성까지 끌어 올린 후, 카즈마는 검역(劍域)을 완성했다. 검역이 펼쳐진 이상, 변칙적인 수에는 당하지 않는다. 검역과 [예측 시뮬레이션]을 합일한 후, 후발제인의 검류로 반격할 때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