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이타주의(1)
허!
분에 넘치게 오래 살았나? 살다 보면 별의별 일 다 겪고, 지나가면 추억이 된다던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어쩐지 조용히 지낸다 했다.
그러면 그렇지.
이놈이 언제부터 조용했다고.
믿음, 신뢰, 신의는 개나 줘 버릴 놈!
널 믿은 내가 병신이지!
아~!
애초에 믿지는 않았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 개뿔!
골이 지끈거린다.
이마를 꾹꾹! 누르며 교장은 깊은 심호흡으로 신경질을 가라앉혔다. 이대로는 제명에 못 죽을 것 같기는 한데. 나 혼자는 절대 못 죽는다.
“어휴, 늙으면 죽어야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긴, 너무 오래 사셨어요.”
“뭐, 인마!”
“살아서 고생할 바엔 먼저 가는 것도 한 방편이죠. 예전에야 몰랐지만, 지금은 각성의 시대잖아요. 누가 알아요, 다른 세계에서 떵떵거리며 황제처럼 살지.”
무진의 자살 권장에 교장은 뒷골이 당겼다.
빈말을 진심으로 받고 지랄인데, 들어 보면 또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전생, 후생이 없다고 단정하기엔 세상이 지나치게 요지경이다.
던전이 열리고, 차원 간 간섭이 벌어지고, 마물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예전처럼 공상이나 망상으로 치부하기에는 한 번 사는 세상이 아닐 수도 있었다.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의 파워가 나날이 강해지는 연유였다. 무신론자도 이제는 흔들렸다.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어! 이후에 불러올 파급력을 가볍게 여기지 말거라.”
“교장 선생님의 말씀 충분히 공감합니다만, 부려 먹을 노동력이 부족할까 봐 억제하는 느낌이 강하긴 하네요.”
“자꾸 비딱하게 굴지 말고, 그냥 열심히 살아!”
“아무렴요. 우리도 무의미하게 한숨만 쉬지 말고, 보다 더욱 건전한 방향을 찾아보자고요.”
이놈이!
내가 한숨 쉬는 것도 아니꼽다는 거잖아.
역린을 세게 처맞은 청룡의 심정이 이럴까? 교장의 이마가 심하게 꿈틀거렸다. 화는 나는데, 말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아 입을 닫아야 할 판이다. 게다가 부정적인 말만 꺼내면 더욱더 비관적이고 참혹한 종말의 아포칼립스를 그렸다.
예로부터 제자는 스승을 보고 배운다고 했다. 내가 이러는 건 전적으로 너 때문이다. 그러니 말 함부로 하지 말라는 협박이었다.
끄응!
교장은 앓는 소리를 냈다.
난 잘못 없다는 듯한 표정 봐라. 냅다 주먹으로 갈겨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명분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금상첨화거늘, 저 등치에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간다.
“그러다 눈알 튀어나오겠네요. 한 대 치시게요?”
“한 대만!”
“안 됩니다.”
“무진아, 어른이 한 대만 그러면 ‘예!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야.”
“교장 선생님도 보통이 아니시네요.”
“너만 할까!”
교장의 권심(拳心)에서 바람이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제자 사랑은 주먹에서 나온다는, 사부님의 가르침과 비슷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스승의 마음이었다. 이래서 한 길 사부님 속은 알다가도 모른다고 하는 건가?
자신처럼 사랑스러운 제자가 어디 있다고.
무진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자고로 제자가 사고를 치면, 사부는 수습을 해 줘야 했다. 그것이 올바른 사제의 관계였다.
그런데 이 답답한 현실을 보아라. 사부는 사고를 치고, 제자는 수습하기 바빴다. 어른들이 사고를 예방하지 않는데도, 문제없이 처리하고 예쁘게 포장까지 해 줬다.
제자가 잘하면 상을 줘야 마땅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완벽히 처리한 무진은 당당히 요구할 뿐이다.
“1,000억을 줘도 부족합니다.”
“겸손은 개나 줘 버린 게냐?”
“제가 나서지 않았을 시 벌어질 사고들의 피해 예상액을 산정해서 알려 드릴까요?”
“됐다!”
교장은 곧바로 손절했다.
해 보라고 하면 이놈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계산해서 영수증을 가져올 것이다. 설마 스승과 제자 사이에 돈 갖고 치사하게 나오지 않으리란 안일한 생각은 막대한 재정 손실을 초래한다.
호미로 막을 거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수가 있었다. 그러다 디폴트라도 선언한다면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1,000억도 부족하긴 하지.’
최소 조 단위의 피해 예상치가 나온다. 그런데도 원상태로 복구하기 힘든 추정액이었다. 전귀(錢鬼)가 따로 없는 제자긴 해도, 틀린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맞는 말만 하는데도, 속 터지게 하는 걸 보면 타고난 화근덩어리가 분명했다.
“은인자중한다며!”
“그러려고 했는데 세상이 저를 가만히 놔두지를 않네요. 영상을 봤으니 아실 테지만, 저는 분명한 피해잡니다.”
“일부러 도발한 거 모를 줄 알아!”
“그런 저급한 도발에 넘어오는 병신이 있을 줄 전~~~~혀 몰랐습니다.”
궁하면 고양이 손도 빌려야 하는 법. 이번에는 지수의 말을 빌렸다. 가끔, 회귀자도 쓸모가 있었다.
하아!
교장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증거가 워낙 명백하다. 하물며 병신이 아니고선 걸려들지 않을 저급한 도발이었다. 병신이 병신했으니, 무진의 주장은 타당했다. 하나, 의도가 없다고 하기엔, 무진의 과거가 맘에 걸렸다.
‘이 녀석이 누굴 바보로 아나.’
대표단에 장위가 포함된 걸 사전에 파악한 후 도발했을 거다.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장위의 만행은 조사하면 다 나온다. 부모의 빽을 믿고 설치는 철모르는 왕자님이라면 능히 걸려들고도 남았다.
“솔직하게 말하자. 너 알고 있었잖아.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너에게도 좋지 않아.”
“병신 같은 장위가 있을 줄 알고 했다는 말씀이시죠? 이거 인터넷에 올리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교장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죠.”
이런 망할!
병신을 병신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호병호병(呼病呼病)할 수 없는 교장이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야 편하게 말하면 되나, 이게 공식적이면 사달이 날 수밖에 없다.
걔는 병신이야~~~!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교장은 국제 마찰을 피하고자 입을 닫았다. 이게 바로 교장과 생도의 차이였다. 생도는 실수해도 되돌릴 기회가 있지만, 교장이 실수하면 끝장이었다.
그래서 얄밉다.
이놈이 몰라서 그런 거면 가르쳐 주면 되는데, 알고서 이러니 복장이 터졌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하기엔 속은 또 시원하다. 할 말조차 가려서 해야 하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니 오죽하랴.
사이코패스…… 아니 사이다패스 덩어리였다.
“정부에서 얼마나 쪼아 대는지 알아! 중국에서 비공식적으로 협박을 해 왔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인터뷰 좀 해 주세요.”
“싫어!”
무진을 겪은 자와 안 겪은 자의 차이였다. 겪어 본 자는 시작부터 차단하고 본다.
안타깝게도 무진의 집요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네가 안 한다고, 내가 안 하는 게 아니라는.
“속단하지 마시고, 들어 본 후에 선택하셔도 돼요.”
“싫다니까!”
보험 영업처럼 듣다 보면 설득될 것 같았는지 교장은 미리부터 선을 그었다. 이 이상 넘어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철통 경계였다. 그러나 무진의 촌철살인은 매섭고 날카로웠다.
“공식적으로 절 외면하면 됩니다. 아카데미나 정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요.”
“너 또 뭐 하는 개수작이야!”
“사부님도 그리해 주시겠답니다.”
편하기는 한데, 왜 불안하게 실실 쪼개는 거냐?
소외와 외면을 전략적으로 쓰고 있었다. 보통은 화가 날 법도 하거늘, 이놈은 그딴 거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무던하다고 해야 할지.
다만, 지나치게 남발하고 있었다.
“너무 자주 쓰는 거 아니냐?”
“우승하면 사라질 얘기예요. 설마 우리가 지겠어요?”
그렇구나!
교장은 중요한 명제를 까먹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국가 간의 마찰을 거론하기엔 생도의 사소한 일탈에 불과했다. 생도의 실수를 물고 늘어져 봤자, 일련의 사태를 자세하게 광고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중국도 공식적인 요청이 아닌, 비공식적인 루트로 정부에 항의했겠지.
무엇보다 교류전은 단순한 국가 간 역량을 테스트하기 위한 대결이 아니다. 애초의 목적이 퇴색되어 국가 대항전의 의미가 더 강했다. 누가 더 강한가? 이 원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원했다. 교류전이 시작되기 전의 사건 사고는 개전과 동시에 사라질 테고, 결과만 잘 나온다면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을 것이다.
허어!
교장은 알고 있었다.
방도가 없구나.
질 방도가.
무진과 지수가 있는 한, 패배는 거론의 여지조차 없어졌다. 초절정의 무위, 강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다. 백작급 헌터조차 s급 이상의 속성을 가지지 않고선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시작 전에 잡소리를 키우면 이목도 집중되고, 광고도 많이 들어오겠네요. 하하하하하.”
꿩 먹고, 알 먹고.
일거양득이긴 한데, 왜 이렇게 악당 같지? 전생에 심계를 쓰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치는 게냐? 몸만 보면 패왕인데, 머리는 또 와룡이다.
“외면받아도 저는 꿋꿋합니다.”
“망할 놈.”
외면받는 게 아니라 혼자서 전부를 왕따시킬 녀석이다.
***
정부의 요청이 있었다.
중국을 선호하진 않아도 연관이 있는 기업, 개인의 요청을 마냥 무시하긴 힘들다. 중국 쪽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무역마찰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더욱이 이 현안을 국제사회에 끄집어낸들, 중국도 증거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꼬투리 잡히지 않는 선에서. 우리나라 대기업이 하청을 조교 하듯 차일피일 시간을 잡아먹는다. 시간만 끌어도 규모와 자본에서 앞서는 쪽이 이기는 판이니까.
그렇다고 정부에서 대놓고 압박하진 못했다. 곧 있으면 선거가 있었다. 국민감정이 한쪽으로 쏠려 있는데, 일개 생도를 핍박한다면 선거 패배는 자명했다.
-아카데미는 무관하다.
-권왕가는 무관하다.
-무극 길드는 무관하다.
마치 짰다는 듯이 아카데미, 권왕가, 무극 길드의 공식 성명이 있었다. 하나같이 생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여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뉴스에서도 생도의 일탈로 선을 그었다. 어찌 보면 비겁한 선 긋기나, 중국도 흠을 잡기엔 장위의 영상이 지나치게 꼴불견이었다. 거론할수록 중국으로선 쪽팔림을 감수해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개폼 잡는 허슬에선 진심이라 쉬쉬하고 넘어갔다.
-이 새끼! 또 지랄이네.
-지랄은 무슨, 명백한 국위 선양이지.
-국위 선양해도 토사구팽은 국룰 아니냐. 언제부터 국가가 지켜 줬다고. 한국 영사관 가 봐라, 가관이다.
-이번엔 진짜 불쌍한데, 얌전히 있었는데도 건드린 거잖아.
-교류전 출전 생도가 보란 듯이 여자 끼고 놀고 있는데, 이게 도발이 아니라고!
-세상에 어떤 똥멍충이가 그따위 싸구려 도발에 걸려들어!
-누군지 전~~혀 모르지만, 너무 잔인하다. 걸릴 수도 있지. 우리는 그러지 말자.
-우리 무진이 인맥이 왜 저래, 너무 얄팍한데.
-그러게 좀 적당히 나댔어야지. 업보야, 업보!
잘할 때는 우리 식구지만 피해를 보는 순간 남의 식구가 되는, 사회의 냉정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무진의 잘잘못을 떠나서 우리나라 국민이자, 생도였다. 하물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중국에 끌려다니는 아카데미, 권왕가, 무극 길드, 정부의 대처에 아쉬움이 컸다.
부정적인 여론에도 교류전의 인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교류전의 승패에 관심이 쏠렸다.
이번에 출전하는 각국의 생도는 과거의 영광을 뛰어넘을 재능이 있는 데다, 생도 간의 마찰이 국가 간의 감정싸움으로 번지면서 승패가 중요하게 되었다.
중국은 수성.
일본은 재탈환.
한국은 증명.
내세우는 방식은 달라도, 목적은 하나였다. 교류전의 승리로 동아시아의 맹주임을 확인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