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하나만 걸려라(3)
제자를 잊지 않고 심득을 전수해 주려는 무신 사부의 배려에 지수는 살짝 감동했다. 그런 사부가 준 아이템을 가위바위보로 무진에게 넘겼으니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고마운 일이겠지?’
아니면 말고.
현실로 돌아오기 전 무신에게 다음에도 또 대련을 계속할 수 있다고 했더니, 갑자기 무극권을 지수에게 전수해 주라고 했었다.
-내 친히 확인해 보겠다고 전하거라.
-제가 확인해도 되는데요.
-사부로서 제자의 성장을 보고 싶은 것이다.
-아, 그렇군요. 서로 정이 깊이 들었나 보네요.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아주 죽이고 싶도록 보고 싶어 미치겠구나.
-한데, 왜 인상을 쓰시는지?
-기분 탓이다.
분명 그때 이를 간 거 같았는데, 기분 탓이겠지.
무진은 무신과의 마지막 대결에서 방점을 찍기는 했었다.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 가루로 만들어 드렸었다. 가루에 물을 붓고 찌면 떡이 될 텐데. 불사의 저주로 다시 살아나는 모습이 신비롭기는 했었다.
“어르신이 사부님에게도 전해 달라던데요.”
“무신이라는 작자가 많이 한가한가 보구나. 그래, 뭐라고 하더냐?”
“투신과 만날 날을 고대한다고 했어요.”
“되지도 않는 신소리를, 다시…… 흠! 그렇군.”
제자는 분명 던전을 열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제자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녀석이었다. 투신의 던전도 들락날락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제법 영특한 소릴 했구나.”
“할아버지, 무신 사부의 연치가 150세예요. 한창이신 분이 할 소린 아니죠.”
“크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게야.”
“위로만요?”
무진의 물음에 사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은 긍정이라고 했지, 아마.
용기 있으면 65세 미만으로 반말을 해 보길 바란다.
-투신도 나하고 똑같이 대해 주기를 바란다.
무진은 무신의 신신당부를 되새겼다. 무신다운 배포였다. 타인을 무시하지 않고, 온전히 무인으로 대하는 자세는 본받아 마땅했다.
“투신께서 그렇게 싸움을 좋아한다면서요.”
“나보다 더한 인간은 없을 줄 알았는데, 있더구나.”
“기대가 큽니다.”
“얼른, 갔다 오거라.”
훈훈한 결말이었다.
다만, 듣다 보니 지수는 묘하게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바둑판에서 두어서는 안 되는 악수를 둔 것 같다고나 할까?
‘기분 탓이겠지.’
***
교류전은 3일간 진행된다.
개인전과 단체전이 있으며, 각국에선 20명의 생도가 참가한다. 진행 방식은 개인전은 토너먼트로 가리고, 단체전은 던전의 미션 수행으로 겨룬다.
교류전의 우승은 개인전 순위의 합과 단체전 미션 수행 결과를 합산하여 결정했다. 던전 공략을 목표로 한다면 단체전이 중요하나, 교류전의 꽃은 아무래도 순위 결정전인 개인전이었다.
따라서 개인전에 한중일의 여론이 집중했다. 누가 더 강한가? 원초적인 제목으로 교류전이 있기 며칠 전부터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현재 각국의 수석은.
한국 유지수.
중국 일룡.
일본 다테 하야토.
거론이 되고 있었다.
전력을 숨기려고 해도, 아카데미의 기록이 남아서 불가능했다. 다만, 알려진 정보와 실제를 교묘하게 가려서 전력의 노출을 최대한 막았다.
실제로 이전의 교류전에서 예상되었던 수석이 도중에 탈락하고, 전혀 의외의 생도가 우승하기도 했었다.
특히 중국은 넓은 땅덩어리만큼이나 인구가 많아 정확한 예측이 어려웠다. 등록된 인구와 실제 인구가 다른 것처럼.
한중일 교류전의 당일까지 각국은 전력 노출을 줄이기 위해서 결투를 자제했다. 초대된 중국과 일본은 교류전 당일에 모습을 드러내리라 보았다.
하나, 계획이나 순리를 따지기엔 생도들은 사춘기를 막 지난 열혈 소년 소녀에 불과했다. 대형 사고를 치진 않아도, 생도들 간의 신경전은 있어 왔다.
대회 준비로 어수선한 분위기와 달리 무진은 평온했다.
손수 주도했던 성운맹은 태수 선배와 친구들, 상원이에게 맡겼다. 알아서들 잘하리란,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못하면 알지?
힘이 펄펄 나겠군.
수시로 성운맹 홈페이지를 저글링하며 돌아가는 사태를 눈대중하고는 있었다. 문제가 있거나, 처리가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문자를 보냈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으면 무인도로 따로 불러 교육하기로 했다. 아직 무인도까지는 가지 않았으니, 잘하고 있었다.
암중 세력도 견제하지 않으니 무진은 한가로운 나날을 보냈다. 교장의 부탁대로 은인자중하며 아카데미 생활에 충실했다.
하나, 드러난 부분에서만 그렇다.
무신 던전과 투신 던전을 다녀온 후, 지속적인 던전 수행을 위해서 연구 중이다.
‘어렵네.’
수행 아이템의 재질은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차원석이었다. 그뿐이면 말을 안 한다. 차원석도 차원마다 다르며 수명이 정해져 있었다.
다른 성질을 가진 차원석에 출처 불명인 불가해의 마력을 복원해야 했다. 흐름을 파악했기에 간단한 줄 알았는데, 모인 단서를 조합하니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다른 차원이 형성될 줄이야.’
수행 던전인 줄 알고 들어서자마자 괴물들이 우글거렸다. 재미는 있었다. 시간도 전과 다르지 않아서 괴물들을 몰살하는 선으로 가볍게 끝냈다. 불사의 저주가 온전히 펼쳐졌다면 꽤 곤란할 뻔했다.
‘완전한 9계식에 올라야겠어.’
9계식 마스터, 대마법사에 오르지 않고서 섣불리 손댔다가는 지금처럼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너무 쉽게 보고 달려든 패착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열일곱 살 생도는 실수 좀 해도 된다. 그러면서 배운다고 들었다.
반성은 하고 있었다.
사부님에게 권능을 만능처럼 쓰지 말라고 한 지가 엊그제거늘, 정작 본인이 그 짓을 하고 있었다. 물론, 권능이라고 해서 똑같진 않았다. 사람마다 다르고, 배우고 익히는 과정과 결과에 따라서 성질이 달라진다.
솨아아!
좋다.
무진은 아카데미의 잔디밭에 누워서 햇살을 맞았다. 교류전이 끝난 이후로 바빠질 테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하나, 피부가 금강불괴에 이르지 않으면 자외선을 조심해야 했다. 남자나 여자나 피부는 목숨과 같았다.
푸슥, 푸슥!
내력과 파동으로 잔디 주변의 벌레들을 전부 쫓아냈으니, 진딧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유난 떤다고 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는 수련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벌레의 기척까지 파악하면 기의 세밀한 컨트롤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그런 자세한 사정을 친구들이 모른다는 점이다. 잔디에 누워서 세월아 네월아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대체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야?”
“난 누워 있으라고 한 적이 없는데.”
“교류전은 신경 안 쓰여?”
“별것도 아닌 일에 고민하지 말지.”
무진의 지척으로 지수, 유정, 혜진, 예슬이 나란히도 아니고 마름모의 포위 진형을 갖추었다. 머리와 머리를 맞추고, 발과 발을 닿게 하여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구도였다.
되게 이상한 광경이라, 무진의 태평함과는 엇박자의 부조화를 이루었다. 지나가던 생도들은 헛바람을 삼키고 다른 길로 돌아갔다. 미친년들 옆에 있으면 미친놈 취급받을 수밖에 없다.
‘저게 대체 뭐야?’
‘잔디밭이 아니고 꽃밭인가?’
‘좋은데, 좋지 않아.’
‘부러운데, 부럽지 않아.’
‘이게 무슨 감정이지?’
남녀 생도들은 지나가면서 몰래 사진을 찍는다. 좋아 보여서가 아니라 이상해서다. 저런 구도를 훈남선녀들이 하고 있으니 더 이상하다.
미쳐도 곱게가 아니라, 고와서 미친 건가?
차라리 아카데미의 못난이들이 그랬다면 별난 연놈들이라고 하면 그만인데. 저 다섯은 아카데미의 중심이자, 이번 교류전의 핵심이었다.
‘저건 너무하는 거 아닌가?’
‘요새 의협단은 바쁘지 않나?’
‘피의 잼미니가 수석 조장이라며.’
‘가는 곳마다 혈투로 점철되고 있지.’
‘쟤들은 훈련하는 거 아니었어?’
‘의욕을 잃은 건가?’
아카데미를 들었다 놨다 생도들에게 멀미를 유발하며 광폭 행보를 보였던 무진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저 부처와 같은 자애로운 미소를 봐라. 평온한 마스크와 그렇지 못한 육체가 묘하게 어울린다. 생도복인데도, 맨몸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가진 자의 여유구나.’
‘사방이 편해 보이긴 한다.’
‘아랍도 아니고, 너무 이기적이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말이야.’
‘양심적이라고, 너한테 가진 않아.’
‘안 생긴다, 다들!’
질투와 시기로 화가 날 만도 하거늘, 감히 시비를 걸진 못했다. 의욕이 꺾이고, 기가 죽어 얌전해졌지만. 여전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주제를 망각하고 달려들기에는 무진의 화려한 전적이 앞을 가렸다. 대다수 생도는 슬쩍 쳐다보다가 제 갈 길을 갔다.
더욱이 무진에게 당하면 소문도 악성으로 난다. 성운맹의 일선에서 빠졌다곤 해도, 조직의 무서움은 남아 있었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무진은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생각하고, 떠드는 건 자유였다. 그것이 손해를 불러올 확실한 행위를 했을 때라면 모를까.
무진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머릿속으론 차후의 일정을 고민하고 있었다.
‘상원을 걱정할 필욘 없겠지.’
의협단을 전적으로 상원에게 맡기진 않았다. 4인방을 보조로 두어 언제든 교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빈틈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너희들이 수석 조장이라고 해 놨다. 풀어 주면 나태해지는 상원이라, 가두리양식처럼 꾸준히 관리를 해 줘야 했다.
자연스럽게 침묵이 길어졌다.
자연 광합성이 따분해진 유정이 소식통을 자처하며 나섰다. 따지고 보면 특이하다.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는 원래 말수가 적고, 자연적인 걸 선호하는 편이다.
그에 반해 유정이는 얼리어답터에 백색소음을 즐겼다. 설상가상으로 고기 킬러임에도 정령력이 높았다. 더러운 세상답게 정령사는 노력보단, 천성이었다.
“중국은 소림, 일본은 천검가가 주의해야 할 대상이야. 이거 알아내기 무지 어려웠어. 너희들은 나 같은 정보통이 옆에 있는 걸 축복으로 여겨야 해.”
주저리, 주저리.
유정은 정보통을 자처하나, 자세히 들어 보면 인터넷에 나와 있는 내용을 짜깁기하고, 간추린 것에 불과했다. 누구나 알지는 못해도, 생도라면 빠삭할 가벼운 지식을 대놓고 자랑한다. 이러다 깊이 들어가면 무식이 탄로 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얼굴 믿고 막 나대는 것 같기는 했다.
서글픈 진실은 얼굴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저 얼굴로 뭔 얘기를 해도 재밌게 들을 남자 생도가 수두룩했다. 가장 먼저 상원이도 어장 안의 구피 정도는 되었다.
‘세계수가 나온다고 했지.’
지수의 예측이 맞는다면 내년 초였다. 시기에 맞춰 유력한 지역을 중심으로 던전을 모조리 사들이거나, 따내야 한다. 설령 다른 가문, 길드와 마찰을 빚더라도.
이를 위해서 쉐도우 길드가 사전 조사에 들어갔다.
‘누나의 정보력이 나날이 예리해지네.’
유정의 수다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쉐도우 길드의 정보력과 비교하면 거의 기레기 수준도 안 되었다.
일례로 국내 생도들이 중국과 일본에 매수되었다.
‘아주 대놓고 찍는군.’
자기들이 나서기보다는 아카데미 생도를 이용해서 교류전에 참가하는 우리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릴 신경 쓰고 있진 않다는 의미가 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기고 있었다.
걸려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
최근 들어 중국과 일본이 우릴 어떻게 보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보란 듯이 무진은 잔디 위에서 광합성을 즐기는 것이다. 너희들이 우릴 무시하는 만큼, 우리도 너희를 잡것으로 보고 있다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듯, 무시당했으면 그 이상으로 갚아 주어야 했다.
‘동방예의지국은 버려야지.’
깡패국이 훨씬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국제 관계에서 예의란 강대국과 약소국을 나누는 잣대에 불과했다. 강대국치고 약소국을 예의로 대하는 일이 흔치 않았다. 세계의 시선이 있기에 겉으로는 예의를 차려도, 막상 자국의 이익이 걸리면 언제든 뒤통수를 갈기곤 했다.
미국의 달러패권.
중국의 일대일로.
러시아의 전쟁광.
다들 내세우기는 세계의 평화를 원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달랐다. 결국, 자국의 국력이 강하지 않으면 언제든 단물을 빼앗긴 채 빈털터리가 되었다.
‘조금은 보여 줄 필요가 있겠지.’
기가 죽고, 사기가 떨어지고, 나락으로 빠졌던 실패자가 다시 일어서는 스토리는 어려운 시기의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었다. 진부하지만, 이런 역경을 딛고 일어선 스토리가 잘 먹힌다.
일례로 오디션 프로그램은 단순히 노래, 댄스, 연기만 잘해서 뽑히진 않는다. 나는 여기서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스토리가 받쳐 줘야 했다.
‘과목도 빼 줬겠다, 쉬어 보지 뭐.’
교류전에 관한 관심을 아예 껐다. 수업을 땡땡이치고, 영화 보고, 코인 노래방 가고, 술은…… 집에서 마셨다. 들키지만 않으면 모범 생도였다.
너희들 따윈 쉬고, 먹고, 놀아도 상대할 수 있다는 오만함.
유치하긴 해도, 이런 도발이 잘 먹힌다.
‘곧 오겠지.’
국적이 중요하지, 숫자는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