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성장(3)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무진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남매의 성향이었다. 복수할 대상이 버젓이 바로 앞에 있는데,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니 말이다. 권왕가의 불안 요소로서 암중 세력을 끌어들일 매력 포인트가 전혀 없었다.
‘이러면 나 같아도 안 쓰지.’
가주님의 뜻대로 가문 내에 세작을 남겨 두었다. 그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데도, 접근하지 않았다. 그 말은 남매가 그간 나태하게 살아왔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럼 곤란하지.’
복수심을 다시 불태우도록 개조가 필요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하더니.’
역시나 쉽지는 않았다. 몸에 낀 기름기부터 빼 주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권공의 기초인 육체 훈련을 시킨 것이다.
“죽을 각오로 열심히 좀 해라.”
“너 잘났다!”
“남이 해 주길 바라면 결국 꼭두각시에 불과해. 그걸 명심해야 할 거야.”
남매는 답답하고 화가 났다. 원수라고 하기엔 아버지와 오빠가 벌인 일의 죄가 가볍지 않았다. 죽지 않고 유폐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하나,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 알이 되었다.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다.
‘두고 봐!’
‘하면 되잖아!’
이대로 무진의 꾐에 넘어가 꼭두각시가 되진 않는다. 어떻게든 시원하게 반전을 갈겨 주고 싶었다. 당황하는 무진을 내려다보며 비웃어 주리라.
씨익!
그런데 이놈이 되레 웃네!
개새끼!
그마저도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기분이라, 남매는 속으로 쌍욕을 뱉으며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빠르네, 빨라.’
연무장에 홀로 남은 무진은 본격적인 심상 수련에 들어갔다. 남매와의 훈련은 몸을 푸는 스트레칭에 불과했다. 그거 조금 했다고 앓는 척하는 건 무조건 엄살이다.
‘교류전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움직일 테지.’
교류전을 노리기엔 위험부담이 커졌다. 일련의 사태를 돌이켜 보면 암중 세력은 조심스럽게 접근해 왔었다. 모래에 스며드는 물처럼 목적을 위해 움직이도록 했다. 그러니 아무도 암중 세력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것이다.
시스템도 갖추어 놓았겠다, 교류전이 끝날 때까진 개인 훈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교류전의 우승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이 나름 비장의 수를 가지고 있겠지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생도에 불과했다. 구력 만땅의 골드미스를 이기려면 30년도 짧았다.
‘아깝네, 나도 들어가 볼걸.’
수행 던전에서 나온 사부님과 지수의 성취가 놀라웠다. 무공이 성장한 것도 있지만, 미묘하게 어긋났던 심신의 균형이 맞춰졌다.
실제로 사람은 완벽한 균형을 이루기 어렵다. 살아오면서 자주 사용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치우쳐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정도면 거의 차이가 없다고 반문할 수도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미세한 차이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는 않으니까.
하나, 무인은 다르다.
초극에 가까워질수록 더더욱 느끼게 된다. 그 미묘한 차이로 인해 완전히 다른 경지를 논하게 된다는 걸. 경지가 비슷한 초극 무인에게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시스템에 의한 가르침하고는 다르단 말이야.’
대다수 수행 던전은 시스템의 미션을 수행하여 보상을 얻는 식이다. 하나, 단계식 보상은 사부님과 지수에게는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맞춤식이라면 나도 가능할까?’
수행 던전은 사부님과 지수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을 주었다.
딱히 벽을 느끼진 않지만, 무진은 근래에 들어 침체기였다. 듣기에는 이상할 수도 있었다. 침체기는커녕 한도 끝도 없이 강해지고 있으니, 배부른 자의 투정처럼 들렸다.
‘오래가네.’
무공과 마법은 결이 다르기에 9계식에 올랐다고 해서 경지가 높아지진 않았다. 세밀하게 따지면 마법은 무공을 넘어서지 못했다. 앞으로도 격차는 좁혀지지 않을 테고, 최종적으로 무공과 마법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무진의 목표는 만류귀종이었다. 각각의 다른 분야를 하나로 녹여 의지만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지.
‘당장은 무리겠지.’
보통 사람과 다른 존재임은 알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단계를 밟아야 하는 경지였다. 단번에 오를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다.
무진의 고민은 누구와도 교류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인간으로선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전인미답이기에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
그렇기에 아쉬웠다.
무신과 투신이라면 조금의 방향성이라도 제시해 주지 않겠나.
“너답지 않게 웬 고민이냐?”
“그러게요. 얘는 고민을 하면 안 돼요.”
무진이 심상 수련을 하는 동안 사부님과 지수가 연무장으로 돌아왔다. 근래에 들어 둘이 작당모의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수행 던전의 기연으로 할아버지와 손녀가 의기투합한 것이다.
“나는 고민 좀 하면 안 되냐?”
“네가 고민할 게 뭐가 있어, 다 떠넘겼으면서.”
“적을 속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어.”
“전략적 선택 좋아하시네, 그냥 귀찮았을 뿐이잖아.”
지수답지 않은 예리한 통찰력이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통하는 면이 있기는 했다. 너무 많이 알면 신상에 이롭진 않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제자야, 네가 그러면 우린 어쩌란 게냐?”
제자에게는 나태함이 필요할 때다. 뺑이 치며 뒤따라가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멈췄을 때 뭐가 보이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이는 것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투신 던전에서 얻은 투신결을 바탕으로 하여 소기의 성과가 있었거늘, 제자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사부님은 전보다 훨씬 강해지셨으면서, 저도 지금보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양심은 갖다 버렸구나!”
“할아버지, 얘가 이렇다니까요!”
경지에 이를수록 침체기는 당연했다. 인플레이션은 경기 침체로밖에 막지 못하는 것처럼. 그걸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보통은 생고생이 기본이었다. 그래도 못 넘고 좌절해야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당연한 순리임에도 권왕은 제자를 탓하진 못했다. 강해지겠다고 노력하는 녀석에게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쉬엄쉬엄하거라.”
“그럴 순 없지요. 같이 덤비세요.”
“이놈이,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과욕이 심하구나!”
“훈계는 저를 이기고서나 하시고요.”
무진의 비릿한 조소에 권왕과 지수가 발끈했다. 누가 봐도 선을 넘은 행위였다. 사부를 대하는 제자의 눈빛에 공경이 아닌 불경이 가득했다.
“이번엔 안 봐준다.”
“아이템도 쓰세요.”
수행 던전에서 사부님과 지수는 무신의 혼과 투신의 혼을 얻었다. 놀랍게도 진화하는 귀속 아이템이었다. 레벨에 따라서 최소 2배 이상의 전투력을 강화해 준다.
일전에는 순수 무공과 속성만으로 싸웠었다. 아이템이나 스킬도 전투력의 중요한 요소긴 해도, 대련에서만큼은 무인으로서 싸우고 싶었다.
마지막 자존심마저 짓밟는 발언이었다.
“쫄리세요?”
“그딴 저급한 도발은 통하지 않는다!”
“제가 이기면 무신결과 투신결을 알려 주세요.”
“처음부터 목적은 그거구나!”
“어차피 주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순순히 넘겨주세요.”
“내가 깡패를 키웠구나!”
“할아버지, 깡패가 아니라 강도예요! 노상강도!”
적당히 처맞고 내놓든지, 혹독하게 처맞고 내놓든지.
선택은 사부님과 지수에게 달려 있었다.
무진은 무신결과 투신결이 탐났다.
제자이자 친구라면 욕심 좀 부려도 괜찮겠지. 나름의 설득력 만땅인 개연성이었다. 예로부터 좋은 건 콩 한쪽도 나누어 먹으라고 했다.
“뺏을 수 있으면 뺏어 보거라!”
“가르침이란 좋은 말이 있습니다.”
“이런 날강도가!”
“얼마면 되겠니?”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무진은 사부님과 지수를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했다. 그러니 무신결과 투신결에 대한 지분이 있었다.
이럴 줄 알고 연무장의 결계를 전보다 2배 이상으로 강화했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절대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순순히 무가지보를 내놓으면 된다.
무신결의 지수.
투신결의 사부.
무진류의 무진.
무진은 마도, 주술, 잡술 등등을 철저히 배제하고 순수 무공만으로 사부와 지수를 대적했다. 2 대 1에 아이템까지, 불리한 상황에서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보였다.
“누가 보면 우리가 유리한 줄 알겠네!”
“너는 정말로 창피함이 없구나!”
역경을 이겨 내는 용사처럼 투지를 불태우는 무진을 할아버지와 손녀는 어처구니없이 쳐다보았다.
“무인은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입니다.”
무인의 싸움은 주둥이로 하지 않는다. 무진은 대화가 아닌 주먹으로 대신했다.
꽈아앙!
사부와 지수도 주먹을 들었다.
아는 처지에 얼굴 붉히는 짓은 하지 말자는 건 원론적인 예우에 불과했다. 무진, 사부, 지수는 가리지 않았다. 치명적인 약점을 대놓고 노렸다.
퍼퍼퍼펑!
화아아앙!
혈투는 장장 1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무진의 공수를 사부와 지수는 합격으로 막아섰다. 일대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대결이 이어질수록 익숙해졌고, 약점이 노출되었다.
‘무신결과 투신결은 깨달음의 총화였구나.’
무공 초식과는 다른 무신과 투신이 살아온 무(武)의 집합체를 가다듬어 완성한 총화였다.
무진은 사부와 지수에게서 무신과 투신을 투영했다. 그들이 살아온 발자취가 사부와 지수의 심혼에 새겨져 있었다.
“일단 80세부터 하죠.”
“……이 새끼가!”
무진의 담담한 발언에 사부와 지수의 눈이 돌아갔다. 도저히 묵과하지 못했다. 무신과 투신은 확실히 대단한 무인이지만, 그에 필적할 만큼 성깔도 더러웠었다.
그 후로 정확히 3시간이 지났다.
거짓말 같은 현실이 펼쳐진다.
“무신군림!!”
“투신강림!!”
권왕과 지수는 연무장 벽면에 기대어 겨우 앉아 있었다. 내외력을 극한까지 쥐어짠 상태라 전신이 땀에 찌들어 천일염으로 뒤덮였다. 몸 상태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무진의 확고한 컨셉, 병 주고 약 주고였다.
권왕과 지수는 넋 놓고 보고 있었다. 말문이 막히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무신결과 투신결은 무공 초식이 아닌 깨달음이라, 전수하려면 가르침이 필요하다.
할아버지와 손녀는 무진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이기려고 발버둥을 쳤을 뿐.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알았기에 작당모의를 했었다. 무진의 빈틈을 노렸고, 회심의 일격을 선사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럼 뭐 하냐고?
회심의 일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수행 던전에서 얻은 비결을 고스란히 헌납했다.
권왕과 지수의 앞에 무신과 투신이 강림한 것이다. 무공이 극의에 이르면 만류귀종이라고는 하나, 듣기 좋은 호사가들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실제는 무공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었다.
하물며 무의 끝판왕 격인 무신과 투신이다.
그들의 무공 총화가 3시간 만에 탈탈 털릴 만큼 가벼울 리 없었다. 평생을 익히고, 수련하고, 깨달음을 얻어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였다.
“무신결 무극경천.”
“투신결 필즉혈사.”
아주 그냥 무신 나고, 투신 났다, 그래.
이쯤 되니 권왕과 지수는 허탈함이 밀려왔다. 괜한 호승지심이 아니었나, 멘탈이 바사삭 부서지는 기분이다.
권왕과 지수쯤 되니 이만큼이나 버틴 것이다. 보통 멘탈로서는 무진과 이 정도로 맞짱을 뜨긴 어렵다.
“그거 한번 써 볼까?”
“딱 한 번밖에 못 쓰잖아요.”
“어떨지 궁금하지 않느냐?”
“그렇긴 해요.”
어차피 한 번밖에 못 쓰는 스킬이고, 안 써도 그만인 데다가 하나는 남는다.
대신, 둘 중 누굴 선택할지가 고민이다. 가장 현명한 한국적인 방식이 있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