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쥐덫(4)
비록 근래에 평가가 좋지는 않았으나, 창황가의 직계에게 이런 식으로 막 나갈 줄이야. 형제뿐만 아니라 주위의 생도들도 놀란 기색이었다.
“이 자식이 말이면 단 줄 알아!”
“억울하면 결투장으로 올라오든가.”
무진이 결투장을 거론하자, 정우민은 멈칫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적운길과 마찬가지로 무진을 이길 자신은 없었다.
영약을 다발로 처먹은 이상 약점을 공략하기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억울하다. 저딴 놈에게 이처럼 개무시당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이.
“결투를 신청할 용기도 없는 새끼가 발끈하기는.”
“보자 보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정우민은 더는 참기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무시를 당할 바에는 싸워 보기라도 해야 했다.
대화만 들어 봐선 누가 악당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보통은 선악의 대비가 확실해야 하는데. 성운맹을 앞세운 무진은 선이 되고, 반대편은 악이 되는 현실이다.
더군다나 정우민은 여죄가 있었다. 평소에 착하게 살지 않았으니 주변의 평판은 나락이었다. 당연히 동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죄를 짓고 되레 화를 내는 적반하장처럼 보였다.
“그만.”
“……형!”
정우철이 손을 들어 동생을 제지했다. 하나, 정우민은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정우철의 무심한 눈빛에 압도당했다. 표정에 드러나지 않음에도 분노가 전해졌다. 분노가 극에 이르니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원한다면 해 주마.”
“시답지 않게 무게를 잡는군요.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너야말로 혓바닥이 길구나.”
“3연패는 감당하기 힘들 텐데요.”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급작스럽지만 무진과 정우철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2번이나 연달아 패한 정우철이지만, 실력을 의심하진 않는다. 3년 동안 학년 내내 톱을 차지한 걸 운으로 여긴다면, 생도들 스스로 무지함을 드러내는 짓이었다.
“곱게 끝내진 않을 거다.”
“그런 말은 절 이긴 후에나 하시죠.”
정우철은 무진의 여유가 거슬렸다. 본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실력을 과시하곤 있지만, 권왕가가 흔들리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동이었다.
따지고 보면 무진은 지수, 태수의 보조자에 불과했다. 권왕가와 성운 그룹을 빼면 성운맹에 무엇이 남겠는가. 본인 스스로 업적을 남기고 싶은 모양인데, 현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뼈에 사무치도록.
솨아아아!
정우철의 차가운 기세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본인뿐만 아니라 결투장 주변까지도 숨을 막히게 했다.
꽤 많은 생도가 결투장 주변에 몰렸다. 생도들도 대결의 결과에 관심을 보였다. 정우철에게 2번의 흠이 있기는 해도, 상대가 좋지 않았다. 반대로 저학년을 평정한 무진이 정우철에게도 통하는지 보고 싶었다.
“전력을 다해야 할 거야.”
“제가 할 말입니다. 앞선 대결처럼 방심하진 마세요.”
“끝까지 신경을 긁는군. 그것이 너의 목을 조르게 될 거다.”
“누차 말하지만, 충고는 날 이기고서나 해.”
“차라리 이게 더 낫군.”
정우철은 일전의 패배를 반추하여 분노를 가라앉히고, 집중했다. 너무 조급해도, 신중해도 좋지 않았다. 평소처럼 가지고 있는 전력을 최대로 끄집어내야 했다.
슈웅!
타앙!
창과 권이 충돌하며 대결의 서막을 알렸다. 초반부터 불을 뿜으며 역량을 과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긴장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일로일격에 실린 창술에는 정우철의 총화가 깃들었다. 고련한 흔적이 창법으로 나타났다.
파아앙, 투아앙!
빛살 같은 찌르기에 이어 낭창하게 휘어지며 반대 방향에서 횡축으로 옆구리를 노렸다.
무진은 물러서기보다 팔로 막아섰다.
찌이이잉!
쳐 낸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창대의 흔들림이 가시지를 않는다. 창대를 잡은 손아귀에서 아픔이 전해지자, 정우철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이!’
창과 권의 격돌이었다. 단련된 무인의 육체가 쇠보다 단단하다곤 해도, 실제로 권공은 날병기를 사용하는 무인보다 불리했다.
방금 격돌로 정우철은 방심해선 안 된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무진의 육체는 극도로 단련된 병기 그 자체였다. 맨손이라고 하여 방심했다가는 잡아먹힐 수 있었다.
타앙, 부르르!
창과 권이 기교 없이 집중된 역량으로 부딪쳤다.
그럴수록 역량의 차이가 드러난다.
정우철은 창대로 전해진 반진력에 치를 떨었다. 지수의 아래로 평가받는 무진이 어째서 아카데미를 활보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내공이 부족하더라도, 무시하기 힘든 외공이었다. 수련하기 어려운 외공을 이만큼이나 쌓아 올렸다면 경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질 수 없어!’
정우철은 내력과 속성을 개방해 전력을 쏟아 냈다. 다시는 지지 않겠다는 결의가 창격에 전달되었다.
‘확실히 재능은 있어.’
무진이 보기에도 정우철은 태수 선배와 비교해 부족하지 않았다. 그때의 일격 패배는 만에 하나의 경우였다. 다시 싸운다면 그런 식으론 흘러가지 않는다.
파앙, 번쩍!
무진과 정우철의 격돌은 범인의 눈으로 따르지 못할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길 때마다 파공성이 뒤를 따랐다.
슈슈슈슉!
창극, 창신, 창파, 창영이 결합하여 천극창의 오의가 되었다. 정우철의 공세는 대단했다. 창의 기본에서 절기로 이어지는 흐름이 생도답지 않게 완벽해 보인다. 속도의 가감을 통해 페이크를 주기도 했다. 일전의 대결을 복기하며 융통성 없는 부분을 보완한 것이다.
꽈아아, 퍼어엉!
무진의 대응도 생도들의 눈을 개안하게 해 주었다. 창의 원거리 공격을 무조건 피하지 않고, 최선의 거리에서 최대한의 파괴력을 냈다. 눈이 따르지 못할지라도, 완벽에 가까운 수준 높은 공방일체였다.
퍼퍼퍼퍼펑!
일진일퇴가 이어졌다. 누가 더 우위에 있다고 하기 어려워 보였다. 순식간에 100초가 지나갔다. 생도들은 숨을 쉬는 것마저 잊고 빠져들었다. 당장 깨달음이 오지 않더라도 뇌리에 화인처럼 박혔다.
허억, 허억!
모두가 팽팽한 격돌로 바라볼 때 정작 정우철은 간담이 서늘했다. 이번에는 다르리라 자신했건만, 속성까지 꺼내 들었음에도 결판은커녕 밀렸다.
“본전이 바닥났나 보군.”
“……닥쳐!”
본인 딴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바뀌진 않는다. 정우철은 남아 있는 여력을 끄집어냈으나, 무진의 권에 족족 막혔다. 초식을 완성하기는커녕 무진이 주먹을 뻗을 때마다 창로의 맥이 속절없이 끊어졌다.
찌이이잉, 크윽!
내력이 창에 온전히 실리기도 전에 권경이 선점하자, 반진력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부에 쌓인 권경이 내외력의 흐름을 막아섰다.
타아앙, 휘청!
무진의 권로는 단순해져만 갔다. 절초 따위는 애초에 필요 없다는 듯, 기본 권형으로만 상대했다. 그런데도 정우철은 풍랑 위의 배처럼 흔들렸다.
부르르르!
이를 악물며 막아섰던 정우철은 결투장의 가장자리까지 밀리고 말았다. 다시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서 맹렬히 쇄도했지만, 주먹 한 방에 떨어져 나가는 형국이었다.
파앙, 쿠다당!
정우철의 창공은 무진의 권공에 완벽히 가로막혔다. 갈수록 일방적으로 밀리더니, 어떤 공격을 취해도 꼴사납게 튕겨 나갔다. 창을 타고 비집고 들어간 권경이 내력의 운용에도 타격을 주었다.
허억!
정우철은 사방이 폐쇄된 방에 갇힌 기분이었다. 점점 공간이 좁아지더니 더는 창을 휘두르지도 못했다. 간격을 무진에게 전부 잡아먹힌 것이다.
“……이럴 순 없어!”
지수와 태수에게 패했던 때보다 더 치욕스러운 결과였다. 자신의 모든 초식이 낱낱이 간파당하며 나아가지 못했다.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 무력감에 치가 떨렸다.
털썩!
내력이 실린 권경, 내가중수권에 내상을 입으면서 정우철은 무릎을 꿇었다. 차라리 패배할 때까지 싸우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면 모를까, 의식은 또렷했다.
“빌어먹을, 어째서냐고?”
“그만 항복하지.”
“너희들 때문에, 내가 어떤 수모를 겪었는…… 커억!”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정중히 권유했으면 받아들여야지, 무진은 시간 낭비하지 않고, 정우철의 목을 쳤다. 의식을 부여잡으려는 정우철의 손짓은 허공을 가를 뿐이다.
꽈당!
결투장 바닥에 볼품없이 고꾸라지면서 대결이 끝이 났다. 숨이 막히도록 팽팽했던 결투의 끝치고는 허무하나, 생도들도 보는 눈은 있었다.
“보통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정우철을 꺾다니!”
“단순한 승리가 아니야, 완전히 제압했어!”
“나는 정우철의 비통한 심정을 알 것도 같아!”
“지수와는 다른 의미로 대단해!”
단순한 패배를 넘어서 정우철의 창술을 파악해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마치 네가 뭘 해도 안 된다는 절망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오늘의 패배를 거울삼아 다시 일어선다면 또 다른 모습을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이 쉽지 않음을 생도들도 직감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정우철은 벌써 3연패를 당했다. 3학년 동안 패배를 몰랐던 과거를 상기하면 단기간에 연거푸 패배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란 말처럼 간단하진 않았다.
부르르르!
빠득!
창황가의 미래를 본다면, 뼈아픈 패배의 연속이었다. 이를 가장 먼저 체감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정우민이다. 형은 자신에겐 우상과도 같았다. 그런 형이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으니 분노가 치밀었다.
정우민으로선 받아들이지 못할 현실이었다. 자신과 형은 창황가의 직계혈족으로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이런 식의 비참한 패배를 당해선 안 되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까지 우리 앞길을 막는 거냐고?”
“말을 이상하게 하네. 내가 막은 게 아니라, 너희들이 알아서 멈춰선 거지. 혹시, 주제 파악을 하고 알아서 비켜 주기를 바란 거냐?”
무진의 반박에 정우민은 그렇다고 하려다가 움찔하고 말았다. 비록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드러내선 안 되었다.
선민의식은 본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잣대가 된다. 더욱이 결투는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았다. 그 앞에서 아니라고 했다가는 아카데미를 대놓고 부정하는 꼴이 된다.
“나는 아카데미의 생도로서 승부에 임했을 뿐, 사적인 감정 따윈 애초에 없었어.”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너희들이 뭐라고.”
“이 자식, 감히 본가를 모욕해!”
분노가 치밀었지만, 정우민은 이쯤에서 멈췄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가문을 내세우는 순간, 창황가는 일개 생도를 위협하는 무뢰배 집단으로 낙인이 찍힌다.
무엇보다 자신은 창황가를 대표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언제까지 맘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놈의 끝도 좋지 않을 거다!”
“실력으론 안 되니 저주를 퍼붓는 건가.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받아 줄게.”
무진은 같잖다는 듯 돌아섰다.
부들부들!
패하더라도 결투장에서 싸웠어야 했는데, 정우민은 도전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다. 결국, 오늘의 굴욕을 삼키며 형을 부축해서 결투장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