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쥐덫(3)
“네 얼굴이나 보고 그딴 말을 해! 그리고 70살은 부족해.”
화르르르!
갑자기 치솟는 불길에 투신의 시야가 가려졌다. 무공으로만 승부를 보려고 했던 투신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술을 부렸겠…… 헉!
“사술이고 나발이고, 이기면 장땡이지.”
제자에게 얻은 화염마도를 이용해서 빈틈을 찾았다. 권왕은 간극을 놓치지 않고 찔러 넣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지고 나서 변명해 봤자, 패자의 구차함이었다.
푸스스스!
일격을 허용한 투신의 신체가 사라졌다.
곧 다시 나타났다.
-맞는 말이구나.
“처맞는 말이지.”
-누가 처맞을진 두고 보면 알겠지.
“100살 전까진 안 돼.”
-호오, 심권에 이르렀군.
투신도 경시하진 않았다. 심권에 이른 무인은 자신의 세계에서도 3명을 넘지 않았다. 다른 세계에서 이만한 상대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죽도록 싸워 보자!”
-원하는 바다!
권왕에겐 투신의 던전이야말로 천국이자 낙원이었다. 죽도록 싸워도, 죽지 않는 곳이니 얼마나 좋아.
‘지수야,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마음가짐에 따라서 지옥도 천국이 되는 건가? 원효대사께선 그런 마음이셨을까나.
***
권왕과 지수가 사라진 지 한 달.
공식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의혹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대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견에 무게가 실렸다. 돌아온다고 해도 세대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권왕가에 대한 의구심이 깊어진 가운데, 아카데미 내에선 성운맹의 입지도 흔들렸다. 임시로 무진이 의협단을 꾸리고 있으나, 지수의 상징성이 예상보다 컸다.
지수는 미래의 권후이기 이전에 권왕가의 직계혈족이었다. 성운맹은 단순히 생도의 모임이 아닌 권왕가를 주축으로 하여 성운 그룹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그 중심축의 하나가 사라졌으니, 입지가 예전 같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성운맹이 추구하는 이상이 워낙 막강했다. 이를 무시하고 성운맹을 무너뜨리기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꼴이었다. 누구도 먼저 나서서 대중의 타깃이 되기를 바라진 않았다.
성운맹의 혼란 속 무진이 단주를 맡은 건 반(反)성운맹에겐 아주 좋은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성운맹의 위계를 위한 고육지책을 질타하며, 무진과 지수의 관계를 물고 늘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봉문을 깬 창황가가 권왕가의 영역을 일부 침범하고 있었다. 창황가의 명백한 도발이 분명한데도, 권왕가의 대응이 소극적이자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 갔다.
“적운길, 내가 애들 괴롭히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반성운맹의 맹원이면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그걸 나보고 믿으란 거야?”
“……증거 있어?”
적운길은 반성운맹에 소속은 되어 있지만, 공개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다. 은밀하게 이루어졌기에 들켰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무진이 보여 준 영상에 마른침을 삼켰다.
-강무진 개새끼!
-반성운맹이여 영원하라!
나쁜 짓을 했다고 하기에는 모호하다. 욕 좀 했다고 법적인 잣대를 들이대기는 불가능하고. 모욕죄로 걸고넘어져도 화염적가의 빵빵한 변호인단이라면 얼버무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생도 간에 욕을 했다고 법적 다툼을 벌이면 좋게 보이지도 않는다.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되겠다 싶은 적운길은 일단 강하게 나갔다.
“할 수도 있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우리가 좋은 감정은 아니잖아.”
“날 욕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하나, 애꿎은 생도를 협박해서 반성운맹에 가입시켰잖아. 같이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면서.”
“대체 누가 그딴 유언비어를 퍼뜨려, 그건 다 자발적으로…… 아!”
무진의 유도신문에 넘어갔다는 걸 깨달은 적운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이번엔 경고로 넘어가지만, 주의해야 할 거야. 성운맹의 공적이 되고 싶지 않으면.”
“날 협박하는 거야?”
“그렇다면 어쩔래?”
무진이 기세를 발산하며 압박했다.
자존심을 세우려던 적운길은 등이 축축이 젖는 걸 느꼈다. 입학할 때 망신당하긴 했어도, 잠재력에서 자신이 월등히 앞서기에 조만간 역전할 줄 알았거늘. 역전은커녕, 그때보다 더욱 벌어졌다.
‘망할 새끼!’
반성운맹에 가입했지만, 앞장서서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무진을 욕할 수 있으면 족했다. 그마저도 일일이 간섭하며 방해하자 울화통이 터졌다.
‘이 자식이 이젠 대놓고!’
지수가 있을 때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다. 의협단의 단주가 되면서 보란 듯이 완장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좋게 보이지 않았지만, 무진을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나, 이대로 물러선다면 가문에서 자신의 입지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러는 건 명백한 월권이야, 우리 집에서 가만있을 것 같아!”
“널 위해서 나설 것 같진 않은데.”
“권왕가의 직계도 아니면서 잘난 척하지 마!”
“호오? 이 시대에 순혈주의를 따지겠다? 그리 자신 있으면 결투를 신청하든가? 아니면 해 줄까?”
“두고 보자!”
적운길은 악당의 전형적인 멘트를 날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물러섰다. 자존심 때문에 승산도 없는 결투에 나서서 엉망진창으로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엔 장부의 복수처럼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절대 ‘쫄아서’가 아닌, 와신상담으로 포장했다.
무진의 광폭 행보는 끝나지 않았다.
반성운맹의 주축이 된 생도를 찾아가는 서비스를 해 주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이중 스파이의 확실한 정보가 있었다. 그렇더라도 도가 지나치다는 말이 나올 만큼 파격적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결투장으로 올라와.”
“제발, 난 싫다고!”
배준상의 연기가 물이 올랐다. 사정하는 솜씨가 진짠 줄 알겠다. 그렇다고 전혀 아니라고 하기엔, 속을 들여다보면 실제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물러설 수도 없는 현실이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도 속여야 한다는 무진의 권고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차라리 영화를 찍어라, 최소 천만 관객이겠다.
무진은 우리 준상이에게 완벽한 배신자의 낙인을 박아 주었다. 대외적으론 힘이 들 순 있겠지만, 암중으로 지원을 해 줄 테니 걱정할 필욘 없었다.
‘타이거 길드는 평온할 거야.’
무진의 전음에 우리 준상은 학을 뗐다. 마치 너 하나만 희생하면 가족은 무사하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문제는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자신의 성격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가족까지 버릴 만큼 패륜아는 아니다.
‘예로부터 아버지한테 효도해야 천국 간다고 했어.’
이 악마야!
천국이든, 지옥이든, 결국 죽는 거잖아!
준상은 원치는 않지만,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물론, 아버지가 아닌 엄마와 동생을 위해서다. 수틀리면 길드가 어찌 될지 불을 보듯 자명했다. 세상이 알아야 하는데 증거는커녕, 대외적인 이미지가 발목을 잡았다.
‘한 방이다.’
퍼억!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그 한 방으로 준상은 천국은커녕 지옥에 가 있는 기분이었다.
부르르르!
아니, 뭐가 이렇게 빨라.
준상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무진의 강함을 알고는 있었지만, 예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뻔히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도 눈앞에서 사라지다니, 한낮에 유령을 본 줄 알았다.
“네 잘못을 알렷다?”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불미스러운 짓은 하지 않을게……. 맹세해!”
준상은 혼신의 연기를 불태운 후 아름답게 기절했다.
무진은 쓰러진 준상을 내버려 둔 채 결투장을 내려왔다. 여태까지 당한 생도 중 준상이 가장 불쌍하긴 했다. 더욱이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서서 준상을 챙겨 주진 않았다.
성운맹의 입지가 흔들리면서 의협단주의 행보가 상당히 과격해졌기 때문이다. 괜히 눈 밖에 났다간 준상 꼴을 면치 못하는 수가 있었다.
듣기로는 준상도 무진에게 잘 보이려고 꽤 노력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저리 가차 없이 처단하다니, 지수와 달리 무진의 냉혹함이 두드러졌다. 지금까지 지수로 인해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처럼.
무진의 파격적인 행보는 성운맹의 위계를 다시 세우려는 의도임을 다들 모르진 않았다. 겁 많은 개가 요란하게 짖듯, 위태로울수록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런 의도를 떠나 무진의 강함은 놀라웠다. 1, 2, 3학년의 누구도 무진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부족한 내공이 보완되면서 완벽한 무인으로 재평가받았다.
저 나이에 기를 저토록 자유자재로 다루기란 어려웠다. 저학년 내에서 성운맹주와 지수를 제외하고는 적수가 없어 보였다.
또한, 1학년이 교류전의 대표로 나가려면 그에 걸맞은 전적이 있어야 했다. 교류전을 발판 삼아 흔들리는 성운맹을 확립하고, 맹주를 노리는 걸 수도 있었다.
첩첩의 의혹을 증명하듯.
무진은 명성을 쌓고,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성운맹의 광신도들이야 맹신하는 경향이 있겠지만, 그 외에는 서서히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주변의 좋지 않은 시선에도 무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성운맹의 존재 목적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아카데미를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 무진의 앞을 막는 이들이 있었다.
“너무 설치는군.”
“선배야말로 자중하시죠.”
“같잖은 감투가 네놈을 지켜 줄 것 같으냐? 건방을 떠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러는 선배는 전임 단주한테 깨지고 저한테 화풀이하려는 겁니까? 아, 맹주님한테도 깨졌군요.”
무진을 가로막은 생도는 정우철과 정우민이었다. 형제의 주변으로 창황가를 따르는 가문과 길드의 생도들이 모였다. 전에는 이처럼 대놓고 활동하지 않았는데, 근래에 들어서 칠대 가문과 대형 길드의 생도들이 활동을 재개했다.
특히 창황가는 권왕가에 짓눌리고, 성운맹으로 인해서 곤란한 처지였었다. 권왕과 지수가 부재한 이때야말로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대체 뭘 믿고 설치는 건지 모르겠군. 권왕가가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선배도 결국은 가문밖에 내세울 게 없나 보군요.”
정우철도 자신에 대한 평가를 모르지 않았다. 불과 반 학기 전까지만 해도 3학년 최고의 생도로 꼽혔으나, 이제는 시궁창에 곤두박질쳤다.
그 모든 원흉이 바로 권왕가와 성운맹이었다.
태수와 지수에게 패배했을 때의 원한은 영혼 깊이 새겨져 있었다. 떠올릴 때마다 모욕과 수치로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간신히 부동심을 세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거늘.
치명적인 역린을 무진이 대수롭지 않게 끄집어내서 난도질하자 참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가문을 빼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부르르르!
차라리 지수와 태수였다면 감내했을 수도 있었다. 패배를 구차하게 변명하진 않겠다. 운만으로 자신을 쓰러뜨리진 못한다. 실력은 갖추고 있었다. 반면에 이놈은 다르다. 가문도 재벌도 아닌 버러지가 창황가의 직계를 농락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니 진짜 뭐라도 된 듯 안하무인이지 않은가.
“말이 심하잖아!”
“따까리 새끼는 좀 빠지지.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분노를 삭이는 형을 대신했던 정우민은 무진의 폭언에 헛바람을 삼켰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살면서 처음 들어 보는 막말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