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기연(4)
-어린 시절이 불우했다고 해도 저게 사람이냐?
-산에 사는 자연인들 전수조사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원래는 서리꾼에 불과했어.
-초동수사가 안일했기에 대형 참사를 불러온 거라고.
-견찰이 견찰했지.
-죽은 경찰관도 많은데, 그딴 말을 하냐.
조실부모하였고, 본 적 없이 떠돌아 정규교육도 받지 않았다는 점을 참작하더라도 태백쌍마가 죽인 사람이 너무 많았다. 태백쌍마에게 죽은 유가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정부, 길드, 가문에 대한 비판도 커졌었다. 처음부터 신중하게 접근하였다면 죽지 않았을 사람들이 많아 유가족의 원망을 샀다.
‘시간이 맞아야 하는데.’
지수가 태백쌍마를 기억하는 연유는 사형 전 유언 때문이었다. 그 형제들은 죽기 전까지도 반성하기보다는, 더 죽이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여 공분을 샀었다.
태백쌍마는 던전을 통해서 기연을 얻었다고 했다. 그들이 아쉬워했던 까닭은 시간에 있었다.
던전이야 오픈된 후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문제가 되진 않는다. 더욱이 태백쌍마는 던전에 들어가기 전엔 일반인에 가까웠다. 하급 각성자조차 통과할 만큼 던전 자체는 대단치 않았다.
던전이 열리는 순간이 중요했다. 이 타이밍을 맞추려고 지수는 할아버지와 되지도 않는 야밤의 산행을 강행했거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뜻대로 되지를 않는다.
‘괜히 직접 한다고 했나?’
과거로 돌아와 한 일이라곤 가문을 백부에게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보전한 것이 전부였다. 그것조차 무진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상처뿐인 감투가 될 뻔했다. 주도적으로 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무진에게만 의존해선 안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시간의 업을 쌓아 보려고 했는데, 정작 시간이 맞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던전은 나중에 공략해도 되지만, 기연은 시간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혼자가 아닌 할아버지까지 대동한 채로 산을 헤매고 있었다. 호언장담을 해 놓고, 빈손으로 내려간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찾는다, 반드시!’
지수는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던전이 열리기 전의 미세한 파동을 찾아내야 했다. 오픈되기 전에 도착해서 기다릴 수 있으면 최선이긴 한데, 이대로는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었다.
-거봐.
허탕을 치고 돌아갔을 때의 무진이 떠올랐다.
조롱 가득한 미소를 상기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떻게든 던전이라도 찾아서 최소한 아이템이라도 받아 내야 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던전 감지기를 태백산 곳곳에 설치해서 연동시켜 놓았다.
‘나도 계획이 있다고!’
슬슬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무지성 농담으로 때울 때는 지났다.
“대체 뭘 찾는 게냐?”
“기연이요.”
“기연이 찾는다고 찾아지면 누구나 고수가 됐겠지. 네가 무슨 무진이냐?”
“비교는 나쁜 거예요.”
“팔은 안으로 굽지만, 무진이는 별개다. 아무리 내 손녀라도, 차마 손을 들어 주기가 어렵구나. 더욱이 다 늙은 할아비를 끌고 와 새벽이슬을 맞게 하는 손녀라면 더더욱.”
혈육을 떠나 권왕은 지수를 인정하고 있었다. 저 나이에 저만한 무력을 갖춘 생도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주변에 일반적인 잣대를 무시하는 괴물이 있었다. 눈에 띄지라도 않으면 비교하지 않을 텐데,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었다.
가르친 적은 없지만, 제자는 제자지.
“할아버지는 성급해서 탈이에요.”
“이 녀석이!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도를 넘어서는구나.”
“어, 저쪽이에요!”
“억지를 부리려거든…… 흠.”
“이번에는 제 승리예요.”
“제법이구나.”
미세한 파동이 전해지고 있었다. 지수는 황급히 던전 파동이 생긴 방향으로 나아갔다. 봉우리 하나는 지나가야 했다. 새벽의 경계라, 아직은 어두웠다. 그런데도 지수와 권왕은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한 줄기 광풍이 되었다.
쐐애애액!
봉우리와 능선을 넘어 도착했다. 여전히 미약한 파동이 전해졌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여명의 순간, 태양빛이 레이저처럼 쏟아지며 사람 하나 들어갈 공간을 비추었다. 일시에 주변이 환해지면서 상서로운 기운과 오색영롱한 빛이 발출되었다.
허어!
반쯤 장난으로 알고 왔던 권왕은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4일이나 밤중에 산을 돌아다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라도 심기가 편치는 않았다. 마지못해 목적을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이 기연을 찾는다고 했을 땐 얼마나 허탈하던지.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온 줄 알았더니.’
단순히 오색 빛의 창연한 광채만으로 기연이라 판단하지 않았다. 방금 퍼진 빛의 파동이 상당했다. 단순히 빛을 마주했을 뿐인데도, 정신과 육체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기연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 기연이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이게 말이 되나?’
장소와 시간을 알고 찾아오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아니면 이 시간 때에서만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던전은 방금 열렸다. 게다가 입구가 좁은 대신에 2개가 열렸다. 이중던전일 가능성이 크다.
[무신화]
-무신의 내단을 받아 탄생한 꽃.
-무신의 영력을 이어받음.
-무신지체 활성화.
[투신화]
-투신의 내단을 받아 탄생한 꽃.
-투신의 영력을 이어받음.
-투신지체 활성화.
무신화와 투신화를 찾은 지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태백쌍마가 아쉬워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들이 들어간 던전은 수행 던전으로, 이세계의 무신과 투신이 후계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장소였다. 자신의 진전을 얻을 천고의 자질과 운이 따르는 자를 바랐을 터. 태백쌍마는 자질은 인정받았지만, 운이 따르진 않았었다.
“할아버지는 투신화를 복용하세요.”
“무신화가 더 나아 보이는데.”
“할아버지, 진짜 염치없이 이럴 거야?”
“강해지는 데 염치 같은 거 따지는 거 아니다. 그러니 어서 무신화를 복용하거라.”
어이가 없어서 농담 좀 했기로서니 정색하기는.
권왕은 언제나 강함을 추구하지만, 손녀의 영약을 탐할 만큼 궁색하진 않았다. 하물며 할아비를 위해 손녀가 고생하며 찾아 준 선물이었다. 찾기 전까지 구시렁거린 것도 마음에 걸리고, 이럴 줄 알았으면 대범하게 넘어갈 걸 그랬다.
‘할아비를 위할 줄도 알고, 언제 이리 컸누.’
권왕은 손녀를 믿지 못한 스스로를 반성하며, 투신화를 복용했다. 손녀가 주어서 그런가 다른 어떤 영약보다 값지고 달달하다.
오늘의 일을 다른 10대 초인이 모였을 때 자랑하기로 다짐했다. 얼마나 부럽고, 배 아파들 할까,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사르르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영약이었다. 지수도 시간 끌지 않고 무신화를 뽑아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뿌리, 줄기, 잎, 꽃, 과실 어디 하나 버리지 않고 순서대로 복용 후 내력을 운용했다.
우웅!
일반인이었다면 신체를 개조하는 선에서 끝이 나겠지만, 권왕과 지수는 절대경에 도달한 무인이었다. 무신화와 투신화에 남아 있는 영험한 기운을 단 한 점도 놓치지 않고 쪽쪽 빨아 먹었다.
신체 개조에 많은 부분이 소모되긴 했어도, 순도 높은 내력을 얻을 수 있었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꽃이구나.”
“예로부터 예쁘고 착한 손녀를 믿으면 자다가도 기연이 생긴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말은 처음 듣지만, 오늘만은 그렇다고 해 주마.”
“많이 듣게 되실 거예요. 저만 믿으세요.”
권왕과 지수의 내력이 급격하게 올라가거나 완전히 다른 경지를 개척하진 않았다. 개정대법을 펼친 듯 육체의 세밀한 컨트롤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며, 정신의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지수는 슬쩍 손녀 찬스를 써 봤다.
“무진이하고 비교하면 어때요?”
“이 기분을 즐기자꾸나.”
“할아버지, 그래도 제가 더 낫다고 해야죠.”
“현실은 잔혹한 법이거늘.”
괴물 제자를 둔 권왕의 비애였다. 일반적인 제자라면 배우고, 처맞고를 반복해야 할 시기에 사부를 패는 패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강해져야 했다.
‘나도 사랑의 매를 좀 들고 싶구나.’
사부로서 사랑을 주겠다는데도 제자란 녀석이 받지를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세태였다. 모름지기 제자란, 사부의 사랑으로 성장하기 마련이었다.
권왕은 사부로서의 체면과 넘치는 사랑을 주기 위해 심권을 더욱 강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제자를 하나 더 늘리는 편이 나을 수도 있지만, 권왕은 애써 현실을 외면했다.
“저는 이쪽으로 들어갈게요.”
“확실히 저쪽이 더 끌리는구나.”
복용했던 투신화와 무신화의 기운이 이중던전과 공명하고 있었다. 개방된 2개의 문에서 비슷한 파동을 일으켜 선택을 용이하게 했다.
투신화와 무신화를 복용하지 않은 상태라면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복용한 이상 선택지는 정해졌다.
“무신과 투신이 튀어나오는 게냐?”
“그래 봤자 필요한 업적을 쌓고, 스킬을 얻는 수행 과정에 불과할 거예요.”
일반인에 불과한 태백쌍마도 통과한 수행 던전이었다.
전성기의 태백쌍마도 상대가 되지 않는 권왕과 지수에게 어려울 리 만무했다. 통과 후 정해진 스킬만 얻으면 그만이기에 지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누가 먼저 나오나 내기할래요?”
“너도 무진이 닮아 가는구나.”
“할아버지, 쫄리세요?”
“그런 말은 아무리 내 손녀라도 용납할 수가 없구나!”
권왕과 지수는 각자의 문으로 들어섰다.
문은 발을 디디자 곧바로 닫혔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닫히면 불안할 수도 있으나, 수행 던전은 성좌의 탑처럼 주어진 미션을 통과하면 다시 열린다.
그렇더라도 던전마다 특성이 다르기에 수행 던전은 함부로 들어가진 않는다. 자칫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수가 있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서 나오면 전혀 다른 존재가 되기도 한다.
지수가 망설이지 않는 이유는 미래를 알기 때문이다. 태백쌍마도 공략한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한다면 무인이란 꼬리표를 떼어 내야 했다.
‘어서 스킬이나 내놔.’
예상대로 들어설 때 던전의 등급은 최하위인 f급에 지나지 않았다. 던전의 파동이 미미한 연유였다. 조심성이 강했던 태백쌍마의 성향상 조금이라도 위험했다면 감히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들어선 던전엔 뒷짐을 지고 선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신선처럼 온화한 미소와 기도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온 지수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됐구나.’
지수가 안심하는 찰나 알림이 떴다.
[던전각성]
-수행자의 등급 상향.
-수행 던전 sss급으로 상향.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알림이었다. 던전 중에서도 sss급이 나오는 경우는 극히 희박했다. 그 이상의 던전을 논외로 ex급으로 분류하지만,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등급이 오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엿 됐네.”
할아버지를 지옥에 처넣은 손녀가 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