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기연(3)
컴퓨터 바이러스의 침투를 방어한 백신 프로그램으로 보면 이해가 편할 거다. 딴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지 몰라도, 사요공을 통해 기운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정신 영역이라 포맷한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아직은 잠잠하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으나, 이런 정보들이 모여 총화를 이루면 적의 의중을 읽어 내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 준다.
그렇기에 지수가 알고 있는 인명록이 중요했다. 중요 인사에 대한 접근 방식과 변화를 통해서도 의도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스윽!
중요한 실험재료…가 아니라 기니피그도 아니고. 잘 아는 선배가 연무장을 찾았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온 인물은 태수였다.
무진과 시선이 교차하자.
움찔!
경영계의 사교 파티가 끝나고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할 말이 많았는데. 보는 순간 뇌리가 백지상태가 되면서, 왜 왔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사요공 맞아.”
“그건 좀 너무하잖아.”
“선배의 정신은 아직 미숙해. 누군가 장난을 칠지도 모르는데, 대비는 해야지.”
“그래도 세뇌는 아니지!”
“그래서 뽀록나지 않을 자신은 있고?”
“최소한 알고나 당하자.”
대놓고 금제했는데도, 태수는 따지지 않았다. 무진이 아니었으면 조 선배의 속성에 무방비로 당할 뻔하지 않았는가. 편치는 않아도 이해는 되었다. 도예슬과 마찬가지로 미숙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흠.
온 김에 태수 선배의 뇌리에 새겨 넣은 사요공을 확인하던 무진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가 아닌데.’
워낙 희미해서 모른 채 지나갈 수도 있었다. 마치 간을 보듯, 살펴만 보고 빠졌다.
만약을 고려해서 민감도를 높여 놓기를 잘했다. 다만, 이토록 정밀하게 혼을 다루는 자라면 만만치가 않았다.
실제로 사요공은 세뇌임과 동시에 자아를 강화하는 장치였다. 스스로 방어할 여력이 생기면 금제는 자연히 정지된다. 정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등가교환을 적용한 것이다.
“속성이나 강화하고 가.”
“누가 들으면 밥이나 먹고 가라는 줄 알겠다!”
태수의 속성은 물리 극강인 [금강불괴]였다. 외공의 극의를 속성으로 이루었으니, 강화하려면 더욱 강력한 자극이 필요했다.
뚜득!
무진이 주먹을 쥐자, 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외공은 헬스와 마찬가지로 강한 자극 없이는 근육이 성장하지 않는다. 하나,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자극이 아닌 폐인이 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고쳐 줄게.”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말자!”
치료해 주겠다는 말에 태수는 공포를 느꼈다. 망가지면 고치면 그만이긴 한데, 영혼에 새겨진 악몽은 어쩌라고.
“선배는 피할 자유가 있어.”
“안 맞을 자유겠지!”
“선배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피하거나, 맞거나야.”
“선택지가 없는데, 무슨!”
피해도 된다고 했지, 안 때린다고는 하지 않았다.
여기 안 올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그렇다고 안 맞을 수도 없다. 이미 소문이 쫙! 퍼지는 바람에 돌이키지 못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야 했는데.’
재벌이라고 편하지를 않아. 하루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가진 걸 모두 잃고 쪽박을 차는 수가 있었다.
“나도 힘들다고!”
“성운맹 홈페이지에 올려 줄까?”
“……날 죽일 심산이야!”
“엄살이잖아.”
저놈 주먹 맞고 엄살을 어떻게 부려? 그냥 무지하게 아프다고! 그런데도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한다. 재벌이 힘들다고 언론에 알려지면, 누구 하나 공감하지 않는다. 배가 불러서 투정 부린다고, 욕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진정한 금강불괴를 이뤄 보자, 파이팅!”
“……응원하지 마!”
격려로 받아들이기에는 몸살 걸릴 지경이다. 힐링을 당하고 나면 육체적으론 멀쩡해도, 정신이 감당하지 못해 골골거렸다.
지랄 같게도 다음 날만 되면 고진감래를 벗어나지 못했다. 고생 끝에 낙이 와서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교류전에 나가지 않을 거야?”
“협박을!!”
교류전엔 반드시 참가해야 했다. 4학년이면 몰라도, 성운맹의 맹주가 교류전을 불참한다면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힘들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류전에 참가해 바지맹주란 사실을 숨겨야 했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지.”
“결국 죽으란 소리냐!”
이 망할 후배 놈은 맞는 말만 하지만, 본인을 대입하면 하나도 맞지 않았다. 지금도 괴물처럼 강한데, 앞으로는 얼마나 강해질지 알 수 없다.
저런 괴물이 죽는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니 가죽이든, 이름이든 무슨 상관이랴.
“더 분발할 동기를 부여해 줄까?”
“여기서 더 어떻게 열심히 맞아!”
“내가 성운 그룹을 먹을지도 몰라.”
“……농담이지?”
무진은 입을 닫았다.
태수도 할 말을 잃었다. 분명 농담이어야 하는데, 그 대상이 무진이 되니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저 시도하지 않아서 성운 그룹의 주인이 바뀌지 않았을 뿐이다.
“성운맹도, 성운 그룹도. 성운 길드도 아직은 선배의 것이 아니잖아. 더욱이 내가 만들어 준 길로만 간다면 진정한 주인이랄 수도 없지.”
“알았어, 얼마든지 패라. 감수하마, 됐지?”
자포자기한 사람 앞에서 왜 웃고 지랄이냐고!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무진의 미소에 태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일방적으로 맞는 것도 짜증 나는데, 내 손으로 명분까지 만들어 주었다.
퍼퍼퍼퍼퍽!
크아아아악!
네가 사람이냐!
본인은 아무런 사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신나게 갈기고 있었다. [금강불괴]가 파괴되고 있는데도, 의식은 또렷해서 고통이 가시지 않고 쌓인다. 그러다 인이 박여 맞을 만하다 싶으면, 새로운 고통을 준다.
“……네가 치통이냐!”
왜 자꾸자꾸 새롭게 아프냐고!
한편으로 경이로웠다. 사람은 고통이 극에 이르면 아예 망가져서 자포자기하기 마련인데, 한계를 교묘하게 건드렸다. [금강불괴]가 단계를 넘어설 간극을 조절했다. 매도 맞아 본 사람만이 잘 맞는다고 하지만, 이놈은 맞아 본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빌어먹을, [금강불괴]가 3단공에 들어섰다.
‘어떻게 이래?’
10년을 넘게 훈련해도 단계를 뛰어넘지 못했었다. 고작 반 학기 만에 태수는 몰라보게 단단해졌다. 이 몸을 봐라, 전문적으로 근육을 단련하지 않았음에도 육체의 극의에 도달하고 있었다.
내가 봐도 멋진 몸매긴 하다.
“시간이 남네.”
“……망할!”
도예슬의 마나심법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 시간만큼 태수에겐 지옥의 매타작이 이어졌다. 한 단계 이상 성장했음에도 [금강불괴]의 완성도는 여전히 상대적이었다.
“그만할까?”
“이 맛을 알게 하고 이제와서!”
“빠지고 싶으면 빠져도 좋아.”
“넌 악마야!”
악명이긴 해도, 도 선배는 서리마녀로서 미래에 유명해진다. 그에 반해 태수 선배의 활약상을 지수는 들어 보지 못했다고 했다. 현재와 미래가 달라졌지만, 잠재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천재형이 아닌 이상, 답은 하나다.
“선배는 대기만성형이야.”
“계속 패겠다는 소리네!”
사람을 팰 때는 항상 맞는 이유를 알려 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 구타…… 훈련이란 말인가.
***
“지수야.”
“왜요, 할아버지?”
“대체 언제까지 산을 헤매게 할 셈이냐?”
“금방이에요.”
“그 말은 어제도 한 거 같은데?”
“산수도 좋고,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잖아요. 왜 이렇게 조바심을 내세요.”
“늙은 할아비를 부려 먹으면 지옥 간다.”
권왕은 지수가 등산하자고 할 때까지만 해도 편한 마음으로 나섰다. 어딜 가든 우리나라 산은 높아 봐야 3천 미터가 되지 않았다.
동네 마실 나온 기분으로 꼭대기를 찍고 내려오면 그만이었다. 가는 김에 일반인 느낌을 살려 오이와 김밥을 챙겼고. 복장도 특별히 아웃도어 스포츠룩으로 깔맞춤을 했다.
웬걸.
태백산 입구에서 정상까지 3일 동안 몇 번을 왕복했는지 모른다. 이걸 왜 하는지 이유를 몰라 답답하다.
건강 삼아 운동한다기엔 지나치게 건강했다. 과하게 건강해서 검진 때마다 의사와 간호사를 놀래 주었었다. 그 맛에 건강검진을 하기는 하지만.
“이럴 거면 낮에 돌지. 달밤에 체조하는 것도 아니고, 오밤중에 뭐 하는 짓이냐?”
“옛날이나 낮에 하지, 등산은 원래 밤에 하는 거예요.”
“요즘엔 그런다고?”
“혹한 캠핑, 우중 캠핑, 폭설 캠핑도 있는데 야밤 등산이 없겠어요. 게다가 낮에는 귀여운 산짐승도 없잖아요.”
“그렇군.”
아무 말이나 지껄인 지수로서도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반드시 같이해야 했다. 혼자서는 공략하기 힘든 데다, 얻어야 할 아이템이 있었다.
‘그 새끼들이 얻게 둘 순 없지.’
암중 세력과의 연관성은 둘째 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태백쌍마
태백산의 기연으로 최악의 범죄자가 된 형제.
형제라면 마땅히 하나가 잘못된 길로 가면 바로잡아 줘야 하는데, 아주 그냥 불의 좋은 형제였다.
그들은 원래 남의 집 농작물을 서리하며 살아가던 좀도둑으로, 태백산에서 열린 던전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기연을 얻었으면 그걸 계기로 삼아 착하게 살면 될 텐데, 사람은 살던 대로 사는 경향이 있었다.
서리꾼 본능을 참지 못하고 도둑질을 일삼았고, 방해되는 사람을 죽이고 암매장을 해 왔던 것이다. 한참을 지나서야 경찰에서 조사가 들어가면서 악행이 알려졌었다.
문제는 그 이후의 대처에 있었다.
경찰이 좀도둑이라고 형제를 지나치게 경시한 것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산에서 살아서 주민등록이 없었다. 아카데미도 수료하지 않았으니 일반인보다 조금 강한 범죄자로 취급했다.
태백쌍마는 자신들을 추적하는 경찰을 비웃듯, 유유히 빠져나가 오히려 악명을 쌓았다. 동원된 경찰까지 피해를 당하자, 그제야 가문과 길드에서 나섰다.
이쯤 됐으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때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태백쌍마가 더욱 강해지는 시간을 제공했다.
태백쌍마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산에서 나고 자라 동물적인 생존 감각이 빼어났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더 강해지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더욱이 전투에도 소질이 있었고, 본인들에게 맞는 아이템까지 더해졌다.
이후 형제는 300명이나 되는 무인과 길드를 죽인 최악의 사건을 일으켰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대형 참사였다.
형제를 경시했던 가문과 길드에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해 전력을 기울였지만, 상당한 피를 흘리고 나서야 겨우 제압했다.
한때 태백쌍마는 tv에 몇 달 동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며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이 살아온 행적과 심리 상태를 분석했고, 프로파일링과 변호사를 비롯한 여러 패널이 나와 설왕설래가 이어졌었다. 설상가상으로, 밝혀진 사망자들이 50명이나 더 나오면서 세상을 경악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