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호가호위(1)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
마제는 말문이 막혔다.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 집처럼 편하게 하라고, 아내가 보고 있어서 빈말을 던졌더니 진짜로 내 집처럼 사용했다. 내 집을 등기도 안 치고 홀라당 빼앗긴 기분이랄까?
“그런 말은 집주인이 하는 거 아니냐?”
“누가 하든, 무엇이 중한가요.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연공실에서 꺼지라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웃고 있었다. 마상 좀 당하면 안 되겠니, 쭈구리가 된 모습을 보고 싶구나.
“아빠, 진짜 맛있어!”
“여보, 장난 아냐!”
집안의 가장을 아내와 딸이 도와주지를 않는다. 그걸 맛있다고 처먹으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냐고?
다 인정한다고 쳐! 밉상이기는 해도 무진은 손님이다. 주인은 가만있고 손님이 진수성찬을 차리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이 화상들이 밥이 목구녕으로 넘어가!
어이구, 속 터져!
내가 이래서 제명에 못 죽지.
혼자 안 먹을 수도 없고, 마제는 마지못해 콩나물국을 한술 떴다.
후룩!
응?
미미(美味).
이거 뭐야, 왜 맛있어?
콩나물국을 사이다로 만들었나, 이렇게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맛은 처음이었다. 아내가 끓여 준 독극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가 여태 똥국만 먹고 살았었구나. 설상가상으로 반찬 하나하나가 진미(眞味)다.
후르륵, 오물오물, 우걱우걱!
맛있다, 하오츠, 우마이!
마제는 방금까지 투덜거렸던 걸 잊어버리고, 수저가 나이고, 내가 수저인 몰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므로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금수~저질이었다.
“아빠, 그거 내 거야!”
“응?”
의식이 돌아온 마제는 비어 있는 밥그릇과 반찬 그릇을 바라보다,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무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 심정 다 안다는 듯한 농익은 표정이었다.
빠찍!
마제는 이맛살을 구겼다. 네놈이 알기는 뭘 안다고? 결혼을 해 봤어, 자식을 낳아 봤어! 이제 열일곱 살밖에 안 먹은 핏덩어리의 눈빛이 왜 저러냐고?
그런 자신의 심정도 모르고, 아내는 흐뭇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진이라고 했지?”
“예, 어머님.”
“정말 잘 먹었어. 요리 솜씨가 좋구나.”
“레시피 적어 드릴까요?”
“어멋, 진짜?”
“아무렴요.”
마제의 아내 이수련은 마흔여덟 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외모를 지녔다. 나이를 몰랐다면 MSG 조금 보태서 20대 중반으로 봤을 수도 있었다.
실상 예순다섯 살인 마제는 도둑놈이었다. 길드에 갓 들어온 신입 길드원이었던 이수련과 사내 연애를 했으니 말이다.
“내가 대접했어야 했는데, 노력해도 늘지를 않아.”
“괜찮습니다. 길드장님께서 선물을 주시기로 했습니다.”
이수련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 이런 귀한 선물을 받고 모른 척하지 말라고.
“여보, 좋은 걸로 팍팍! 알지?”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잖아.”
“주라고.”
“옙.”
이수련이 목소리를 낮게 저음으로 깔자, 마제가 움찔하며 냉큼 허락했다. 갑자기 길드에 처음 와서 어리바리했던 그 순진했던 소녀가 떠올랐다.
믹스 커피에도 행복하다던 그녀가 어쩌다가.
‘슬이도 나 닮아서 요리는 꽝이란 말이야.’
이수련은 요리 잘하는 남자를 원했다. 무진이야말로 슬이의 짝으로 그랜드슬램이었다. 슬이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고. 다른 건 몰라도 이 엄마를 닮아서 남자 보는 눈이 있었다.
‘아빠는 아직도 모른단다.’
마제는 원래 비혼주의자였다. 결혼보다 마법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내로. 주변의 유혹을 모조리 다 끊어 내는 바람에 고자나 성적 취향이 다른 줄 알았었다.
그런 마제도 피가 끓는 사내였다.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러다 이수련이라는 임자를 만나서 부지불식간 정신을 차리고 나니 침대에 자빠져 있었다.
다들 마제를 도둑놈이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이수련이 무극 길드의 실세였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잘 놀다가 갑니다, 어머님.”
“다음에 또 놀러 오렴.”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은 상호계약을 마친 무진은 선배의 집에서 나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마제의 메시지 마법은 끊어지지 않고, 뇌리를 도배했다.
-오긴 또 뭘 와!
***
펑퍼퍼퍼펑!
꽈아아앙!
연무장은 대결로 시끄러웠다. 권왕과 투귀가 아침 댓바람부터 결투를 벌였다. 단순 대련이라기엔 살벌함의 극치였다.
본인들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늙었다고 괄시할 수 없는 혈투가 벌어졌다. 젊은이들 수백은 혼자서 거뜬히 찜 쪄 먹을 위인들이었다.
권왕은 본래 신체로, 투귀는 전투체인 천병신으로 바뀌었다. 둘 다 거구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빠르기였다.
“호오, 천~~~~병신이구나!”
“단어 붙여라!”
스왁, 타아앙!
투귀는 천병공을 10성까지 끌어 올리며 천병류를 여의봉으로 펼쳐 낸다. 몽키킹을 제압하여 얻은 여의봉은 투귀의 십팔반무류에 따라서 변형이 가능한 병기였다. 검, 창, 권갑, 건틀릿 등으로 틀에 박히지 않았다.
그런 변화무쌍과는 대비되는 단조로움이 상충했다.
“남자는 주먹이다.”
꽈아아앙!
권왕의 대응은 당연히 권공이었다. 권을 기반으로 한 패권의 진수, 신화천권이 펼쳐진다. 초속공방으로 권과 병기가 마주하며 불꽃이 튀었다. 권왕은 권기, 권강, 권환을 발출했고, 투귀는 검기, 도강, 창환으로 맞상대했다.
촤아아아!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오늘 죽어도 호상이긴 하나, 죽기는커녕 팽팽한 대결이 되었다.
하나, 여력이 있는 권왕과 달리 투귀는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대결이 이어질수록 투귀의 호흡은 거칠어졌고, 전신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좀 더 분발해 보거라.”
“사기 치는 솜씨는 여전하구나.”
“사기라니 누가?”
“가르치긴 뭘 가르쳐! 넌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야.”
투귀는 완전히 속았다는 걸 무진과의 대결 이후에 알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제자란 놈의 성취가 사부를 월등히 넘어섰다.
청출어람도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상식적이지 않았다. 하물며 제자가 된 지 고작 1년도 안 되었다. 그래 놓고는 마치 자기가 다 키운 것처럼 꼴값을 떨어 댔다.
나이를 먹더니 젊을 때보다 더 추잡했다.
천병공 11성.
일전의 패배를 거름 삼아 벽을 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물을 선보일 때였다. 제아무리 권왕이라도 지금처럼 여유로울 순 없을 터.
“권왕이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심권 맛 좀 보려는 게냐!”
살벌한 대결에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말투였다. 나이가 들수록 정신연령은 어려진다고 하더니.
쩌어엉, 파아아앙!
무진은 관전하면서 주변의 결계를 강화하는 중이다. 상황에 따라서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하는 김에 이번에 깨친 마도를 결계와 융합해 보았다.
“최적화된 흐름과 중첩을 이용하면 소모되는 기운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겠어.”
“도 선배 집에서 뭐 했어?”
바쁜 거 뻔히 보고서도 지수는 옆에서 조잘거렸다. 왜 정해진 시간보다 늦었는지, 1분 1초 단위로 설명하란다.
“내 사부님이자, 네 할아버지께서 대련 중이시잖니. 일하는 데 방해되니까 너무 달라붙지는 말고.”
“친구니까 팔짱 낄 수 있는 거지.”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여우 짓의 표본이 바로 팔짱이다. 난 아무렇지 않은데, 네가 이상하게 느끼는 거라는. 팔에 가슴이 닿고 촉감이 오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다면? 진정한 친구긴 했다.
보통은 그러다 상대방이 진지하면 너하고는 친구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일명 남 주긴 아깝고, 내가 갖기는 아쉬운.
무진은 지수의 팔을 친구들과 공유하기로 했다.
“상원이도 친구잖아.”
“오늘부터 친구 아냐.”
선이 분명한 지수였다. 또한, 친구 간에도 등급이 존재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었다. 내가 껴도 되는지, 안 되는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혹시라도 닿아서 움찔한다면 신고당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요즘은 그런 세상이 되었다. 내가 불편하면 너도, 세상도 불편해야 한다는.
퍼어엉!
크억!
포탄 터지는 폭발과 함께 비명이 터졌다. 사부의 심술이 담긴 심권이 투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천병공의 반탄경이 심권에 무력화되면서 옆구리가 부서졌다.
“리커버리, 힐.”
일반적으론 목숨이 위중한 치명상이나, 응급조치 전문가인 무진이 옆에 있었다. 완전하진 않더라도, 대마법사에 근접한 마력이 최상위 치료 마법과 결합하자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헉!
패배 직후 숨이 막혔던 투귀는 회복된 자신을 보며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도 대단했지만, 이번엔 초속재생보다 훨씬 빨랐다.
하아.
사부나 제자나 사기꾼 기질은 다분했다. 저 곰처럼 둔한 쇳덩어리 같은 외양만으로 곧이곧대로 판단했다간 큰코다칠 수 있었다. 어쩌면 사기 치기 위한 최적화된 육체일지도.
“그새 마법이 더 늘었구나.”
“아직 대마법사라고 하기엔 부족하죠.”
“그래, 앞으로 계속 정진하다 보면 대마법…… 뭐?”
“마제님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9계식이란 말에 권왕, 투귀, 지수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진 않았을 텐데, 마제가 대체 뭔 짓을 한 거지? 실상, 대마법사긴 해도 상식적인 범주를 아득히 초월했다.
권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쫌생이가 아무런 이득도 없이 널 도왔다고? 누가 봐도 예민한 나의 감각으로 봤을 때 전적으로 자기 딸 때문에 부른 것 같은데.”
“정확히 말하면 서로에게 성공적인 거래였습니다.”
“그럼 그렇지. 그놈은 이득이 없이는 애초에 선의를 베푸는 녀석이 아니었어.”
“그래도 제 명예 사부가 되어 주기로 했으니 앞으로도 종종 보게 될 겁니다.”
명예 사부라고 하면 들리기엔 그럴듯해 보이나, 실상은 위명만 그럴듯한 속 빈 강정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마제였기에 선뜻 납득하긴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마법사는 마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런 마제의 제자가 되었으니 무진의 위명도 덩달아 올라갈 수밖에 없다.
결국, 마제는 이름값만 내어 주고, 무진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 주고받기는커녕 마제는 껍데기뿐인 명예에 호구 잡힌 것이다.
내친김에 무진은 9계식이 된 과정을 설명했다.
사부님에게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야 했다. 마법사로서 필요한 탈각의 단서를 제공해 줄 수도 있었다. 물론, 기대는 크지 않았다. 되면 좋고, 안 돼도 되게 할 방법은 있었다.
헉!
헐!
권왕, 투귀, 지수는 과정을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저런 식으로도 삥을 뜯을 수 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눈 뜨고, 코 베인 마제의 비명이 여기서도 들리는 기분이다.
이득에 관해서는 도가 텄다고 알려진 마제도 무진 앞에서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한데, 자신들이라고 다를 것 같지 않아 씁쓸한 기분이었다.
“천하의 마제도 내 제자 앞에서는 별수가 없구나.”
“저건 거래를 위장한 협박이지.”
“도 선배한테 심심한 위로를 보내야 할 것 같아.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드래곤하트와 마력정수를 홀라당 다 처먹으니, 당분간 무극 길드에서 마도사가 나오긴 글렀다. 무극 길드의 미래 전력까지 깎아 먹은 것이다.
“마법 이론에 관해서도 많은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어쩐지 명예 사부 운운하더라니.”
무진은 7, 8, 9계식의 마도를 시험하기 위해서 마제에게 방어만 해 달라고 했다. 거래를 통한 약속이라 마제는 거절하지도 못한 채 일방적인 기니피그가 되었었다.
반대로 무진은 맘껏 본인의 마도를 펼쳤다. 확실히 대마법사의 마법 운용과 기술적인 방어는 배우는 바가 있었다. 상성, 역상성, 중첩, 회전 등등의 다양한 기교도 놀라웠다.
짧은 가르침이었지만, 무진은 마제의 제자가 되기에 충분한 기술적인 역량을 갖추었다. 마제의 독문 마법 중 하나인 공간에 대한 이해는 제법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간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공간 전이, 중첩, 왜곡, 변화, 축소, 확대로 이어진 무진의 마법은 마제의 역량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제의 속성인 스텟 무력화는 실로 놀라웠다. 자신의 스텟 중 필요하지 않은 스텟을 대가로 등가교환이 되었다.
“1개로 3개까지 무력화하거나 능력을 저하할 수 있었습니다.”
“어쩐지, 하는 짓이 얌생이 같긴 했어.”
얄미운 것과 별개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다로운 속성이었다. 마제는 속성을 갈고닦아 현재의 등급에 올라섰다. 더 올라서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만약 속도, 힘, 속성을 제어당하기라도 하는 날엔 전력을 거의 다 잃는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절대는 아니다. 상대의 역량이 더 높으면 배제가 아닌 저하 수준으로 끝이 난다. 반면 마제는 1개를 완전히 사용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