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자취기화(4)
이 망할 놈이 그 과정에 들어간 상태였다. 모른 척하고 싶어도 대마법사의 양심이 걸린다.
“대체 몇 병이나 처먹는 거야?”
이 자식이 선 넘네!
쌍욕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당장 자세를 허물어트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마제는 이미 한 번 걸어왔던 길이었다. 마도사에서 대마법사의 경계를 알기에 부정하지 못했다. 그도 대마법사가 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마력정수는 마제도 아까워서 모셔 둔 보물이었다. 슬이와 무극 길드를 위한 자산이기도 하고.
그걸 오늘 처음 본 놈이 다 처마시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을 쓰기는커녕 달라는 대로 주어야 할 팔자였다. 속이 터지지 않는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부처님이었다. 이쯤 되면 부처님도 자비를 내리진 않을걸.
으윽!
크윽!
스쿼트와 런지를 번갈아 취했던 무진이 결가부좌로 바꾸었다. 마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부터가 고비라는 걸 마력의 흐름과 변화로 알아챘다.
그 말은.
“이놈이 우리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으려고 왔구나!”
“온 게 아니라, 불러서 온 겁니다.”
이 위급한 와중에 또 대답은 잘한다.
이놈은 대체 어떻게 된 종자야?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대마법사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10대 초인이라고 해도 허언증 말기 소리 뜯기 딱 좋았다.
하루아침에 6계식에서 9계식의 초입에 올라선다? 이건 상식적인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군.’
딸의 놀라운 변화를 제공한 녀석이긴 해도, 궤를 달리하는 괴랄한 생명체였다. 한편으로 권왕이 왜 이 녀석을 수제자로 명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마법에 관해서는 괴물 같은 재능마저 벗어났다. 애초에 마도를 위해 태어난 근원과도 같았다.
‘어째서?’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대마법사가 될 놈이 권왕의 제자가 되는 게 말이 되냐고?
운이 좋아 화염마도사가 되었다곤 해도, 권왕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크으으으으!
알았다고. 준다! 주면 되잖아!
이놈의 자식이 마력정수가 자기 것도 아니면서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필요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자동차 보험 사기처럼 이젠 가식이나 위선처럼 보였다.
우우웅!
빌어먹을, 아닌 것 같은데 또 잘되고 있었다. 마력정수를 마시기만 하면 효과를 드러냈다.
그렇다고 화를 내기도 어렵다. 오기 싫다는 놈 떡 하나 주며 달래서 데려온 장본인이 본인이니, 누굴 탓한단 말인가.
휘이이잉!
무진을 중심으로 마력이 태풍처럼 회오리를 치며 연공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었다. 마지막을 향한 자연스러운 화룡점정이었다.
하나, 공들여 만든 개인 연공실이 망가지는 걸 마제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어떻게든 마력폭풍이 연공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결계를 쳤다.
“내가 미쳤지!”
처음부터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이놈이 어떤 놈인지 알고 있는데도, 외면한 대가는 뼈아팠다.
기연강탈자, 약탈자라는 악명을 되새겼어야 했다.
우웅, 팟아아!
마지막을 장식하듯 마력폭풍이 용트림을 했다. 어지간한 마력이면 마제도 가볍게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녀석의 마력은 거의 9계식에 도달했다. 설상가상으로 마지막 단계라 최대한 충격을 주지 말아야 한다.
‘좋은 분이시네.’
초면의 깐깐함과는 달리 아낌없이 주시는 나무 같은 분이었다.
이참에 버릴 것 없는 세계수라도 키워 볼까? 드래곤을 사육해서 도축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이러면 용권(龍權)을 걸고넘어지려나? 반려드래곤을 지켜야 한다는 미친 단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힘들다. 세상은 상식적인 선으로 이해를 하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나회전이 끝이 났다.
‘9계식 초입이면 나쁘진 않지.’
예상대로였다. 발칸의 마도는 궁극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 단계를 뛰어넘진 못한다. 중요한 것은 마도를 얼마나 깨달았는지였다.
마도나 무공이나 경지에 이르려면 본인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아무리 좋은 무공과 마도서를 얻어도 흡수하여 깨치지 않는다면 돼지 목에 진주일 따름이다.
꾸벅!
무진은 자세를 풀고, 경건한 마음으로 마제에게 인사를 했다. 사람이란 받은 게 있으면 고마워할 줄 알아야 했다. 그것이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 오늘도 아버지에게 배운 인성 교육의 위대함을 만끽했다.
“감사합니다.”
“말로만!”
말 한마디면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하던데, 꼭 그렇진 않은 듯했다. 이리 나온다면 무진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기 마련이다.
“저는 가난한 생도입니다.”
“……뭐, 이 새끼야!”
마제도 웬만하면 욕은 자제하려고 했으나, 도저히 참지 못했다. 사람이면 이래선 안 되잖아. 남의 마력정수를 홀라당 다 처먹고서 하는 말이 고작 감사하다고?
그런데 맞는 말이다.
마제는 이놈의 신상을 조사했다. 딸이 관심을 가지는 녀석이라 사전 조사는 아버지로서 당연한 권리였다. 조사해 본 결과, 권왕가나 재벌과는 전혀 관계없는 소시민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가난하지는 않은데.
마력정수는 등급에 따라서 부르는 게 값이다. 하물며 마제표 특제 마력정수였다. 시중에 풀리기만 하면 수백억도 아깝지 않다고 달려드는 미친놈들이 수두룩 빽빽이었다.
“장강후랑추전랑이라잖아요.”
“착한 짱깨는 뒤진 짱깨라더구나.”
어디서 한강의 기적을 놔두고 양쯔강 따위와 비교해!
무진은 마제의 과도한 국뽕에 공감은 해 주었다. 공감한다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의외로 사부님하고는 맞는 구석도 있었다.
“넌 양심이 없는 게냐?”
“제가 돈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주고 안 주고는 아버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달란다고 줄 분도 아니시면서.”
돈 없으니 배 째라는 무진의 강짜에 마제는 울화통이 터졌다. 더욱이 달라고만 했지, 안 줘도 그만이긴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아니고.
“구두 약속일 뿐이에요.”
“날강두가 따로 없구나.”
이놈은 축구를 해도 돈을 태산처럼 긁어모을 녀석이었다. 아마 다른 나라에 가서도 노쇼를 밥 먹듯이 하겠지.
이미 사라진 마력정수를 아까워한다고 돌아오진 않을 테고, 마제로서 대범함을 보일 때긴 했다.
“어차피 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러실 줄 알고, 저도 농담한 겁니다.”
요즘 생도는 다 이런가. 뻔뻔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과 대화하는 것부터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앞으로도 슬이가 질질 끌려다닐 걸 상기하니 답답하다.
“정말로 9계식에 도달했구나.”
“초입에 불과해요.”
“거기서 겸손은 너무한 거 아니냐?”
“조만간 아버님을 넘어서 보겠습니다.”
청출어람청어람의 표본을 보이겠다는 무진의 결의에 마제는 재차 속이 터졌다. 겸손한 건지, 오만한 건지. 하려거든 하나만 하라고. 시종일관 사람을 들었다 놨다 롤러코스터를 태웠다.
“넌 대체 뭐냐?”
“이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나 싶다. 네 나이에 9계식이 말이 되냐고?”
“각성의 시대 이후로 말이 되는 일이 있었나요?”
맞는 말인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 평생을 매달려도 도달하지 못할 경지를 하루도, 반나절도 아닌 불과 1시간 만에 달성했다. 자신조차 이 자리에 오를 때까지 피나는 노력을 해 왔었다. 이놈은 살아온 인생을 허탈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태 숨기고 다닌 거구나.”
“그만큼 아버님을 신뢰하는 겁니다.”
나의 비밀을 알려 줬으니, 이제부터 우린 깐부라는 무진의 논리였다.
마제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무진을 보았다.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해 주면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더 답답하게 하는 건 대체 뭔데? 알면 알수록 알고 싶지 않게 만드는 재주를 타고났다.
“숨겨 달라는 거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선배의 빙정이 꽤 불안정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인위적으로 손을 쓴 것 같았습니다.”
무진은 지난 일처럼 말하지만, 마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표를 찌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예슬 선배의 빙정에 영력이 있다곤 해도, 성향은 비슷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질적인 기운을 품고 있더군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빙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럼에도 일어났죠. 지금이야 안정을 찾았지만, 또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일은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무진은 권왕가의 진실을 일부 알려 주었다.
세간에 알려진 내용과는 다르기에 마제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졌다. 설마 이런 비사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이라면 간과하기도 자신하기도 어려웠다.
“권왕이 암중 세력을 찾는 것이냐?”
“그런 것도 있지만, 우선은 제 주변 사람들이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허어! 까맣게 몰랐군.”
“믿어 주시는 겁니까?”
권왕가의 치부나 다름이 없는 비사를 굳이 자신에게 말해 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밝혔다는 것은 무극 길드도 안전하지 않다는 의미가 되었다.
“내부를 단속해야겠군.”
“섣불리 움직이면 되레 위험해질 겁니다.”
“내가 누군지 잊었느냐?”
“제 사부님은 권왕이십니다. 그런데도 혹독한 대가를 치렀지요.”
마제는 부정하지 못했다. 암중 세력을 그럴듯한 뇌피셜로 무시하려고 해도, 권왕이 당한 암계는 도저히 피하기 힘들었다. 그처럼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다면 절대 간과해선 안 되었다.
“알겠다. 신중히 확인해 보마.”
“당장 벌어질 일은 아니니, 너무 심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알고서도 당하진 않는다.”
“아니요, 알고서도 당할 수 있습니다. 가령, 슬이 선배가 놈들의 마수에 당했다면요.”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언성을 높였지만, 마제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연관성이 없었던 둘과의 관계가 이제는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다. 자신의 가장 큰 빈틈이 딸이었다. 그걸 이용하려고 했다면, 과연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어때요, 이젠 좀 값을 치른 것 같습니까?”
공짜라면 양잿물도 달게 마실 수 있지만, 무진은 염치를 아는 사나이였다. 은혜를 입은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마제는 그 어떤 것으로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래, 다 갚았다. 더는 문제 삼지 않으마.”
“그럼, 마저 정산을 해 볼까요.”
“정산이라니?”
“갑자기 모른 척하시긴가요? 제가 드래곤하트를 온전히 흡수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3개 더 주신다면서요.”
그래, 그런 말을 했다.
묻고 더블도 아니고, 트리플로. 아니라고 하기에는 대마법사의 기억력이 워낙 좋았다.
그래도 그렇지.
여태 받아 처먹은 게 있는데,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살면서 처음 보는 후안무치였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자신도 안면 몰수할 수 있었다.
“녹음했습니다.”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