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자취기화(2)
“안 온다고? 왜?”
“오기 싫대.”
“내가 보자고 하는데도?”
“아빠가 뭔데, 라고 했어.”
딸은 할 말을 끝내고 서재에서 나갔다. 마도서로 가득 들어차 있는 서재가 오늘따라 휑하다. 홀로 남겨진 도광필은 맷돌 손잡이를 잃은 표정이었다.
“거절을 당했어?!”
내가 누구인가?
한국을 대표하는 10대 초인 마제 도광필이었다. 거절당할 줄은 미처 몰랐다. 하물며 딸한테 존재의 의의에 대한 고찰을 당했다.
이놈이 설마 마제를 모르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아서 연신 헛기침이 나왔다.
“이놈을 그냥!”
도광필은 불끈 솟은 분노를 다스렸다. 마법사답지 않은 고상하지 못한 태도였다. 일개 생도에게 화를 내다니, 마제로서 어울리지 않았다.
“소문대로 아주 맹랑한 녀석이군.”
예측했던 범주를 벗어났기에 모처럼 당황했었다. 애초의 목적이 그것이었다면 아주 훌륭한 도발이었다.
녀석을 보려고 한 연유는 딸의 중대한 변화에 있었다. 안 하던 화장을 하고, 옷도 건전하지 않았다. 덤으로 4계식에 있었던 딸의 성취가 불완전하지만 6계식에 도달했다.
솔직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이스 계열에 한해서긴 해도, 딸의 성취는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천재라고 불렸던 자신조차도 뛰어넘는 성취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마법사에겐 뜻하지 않은 기연이 찾아올 때가 불현듯 있으나, 딸은 그 범주마저 벗어났다. 대체 무엇이 딸을 그렇게 변화시켰는지 알아봤었다.
그런데 슬이가 성운맹이란 가당치도 않은 집단의 일원이 되어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빠한테 한 마디도 안 해 주고!
“이놈이 분명한데, 초장부터 골치를 썩여?!”
누가 권왕의 제자 아니랄까 봐!
톡 까놓고 말해서 권왕도 마음에 안 든다. 매사에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무식한 인간이 마법사랍시고 설치고 다니니 같은 마법사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모욕이었다.
끄응!
권왕이 맘에 안 드는 것과 별개로 무력은 진짜배기라서 한숨이 나왔다. 그 작자의 제자를 강제로 데리고 왔다가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이 너무 잘되었다.
다짜고짜 길드로 찾아와서 난장부터 까겠지. 나이가 들었다고 그 성격이 사라졌을 리 만무하고.
탐탁진 않아도 찾아가거나 선물이라도 쥐여 줘야 했다. 전자는 이목의 집중을 부를 테니,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마법사라면서!”
대체 어떤 마법사가 마제가 부르는데 오지를 않아. 가문의 영광이어야 하지 않느냐고.
“왕(王)보다 제(帝)가 높거든!”
괘씸해서라도 그냥 내어 주기는 싫었다. 무엇보다 슬이가 오라고 부탁을 했다. 사내가 되어서 어떻게 슬이의 부탁을 거절한단 말인가?
이놈은 고자가 분명했다.
그래야 하는데, 주변에 여자는 또 많았다.
아주 괘씸한 놈이다.
***
무진은 예슬 선배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기는 척 무극 길드를 방문했다. 동문의 후배로서 선배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지라,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순 없었다.
“의협단의 부단주 강무진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0대 초인이자, 마법의 선구자이신 마도의 제왕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과하다 싶은 인사긴 하나,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 받는 당사자도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문제가 되진 않았다.
마제도 인정을 받는 것이기에 기분이 좋아야 마땅한데.
“엎드려 절받는 심정이구나.”
“원하신다면 두 번도 절할 수 있습니다.”
“이놈이 누굴 보내려고! 게다가 오기 싫다며?”
“천부당만부당합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서 오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 놈이 선물 준다니까 오늘 바로 오냐!
예슬이는 수업 때문에 오지도 못했다. 처음 방문하는 선배의 집을 자기 혼자 오는 경우도 있나?
적당한 스태프 하나를 선물로 준다고 했으면 미운 놈 떡 하나 주는 심정일 텐데. 선물의 등급이 무려 s급이었다.
“입이 심심한데, 다과는 없습니까?”
“오랄 때 왔으면 대접했을 텐데, 아쉽게 됐구나.”
그때는 있고, 지금은 없다, 이놈아!
마제 나름의 소심한 복수였다. 어른이 부르면 냉큼 달려오는 게 후배의 덕목이었다. 시간을 질질 끌고, 욕심을 내는 녀석에겐 새우깡도 아까웠다.
헛!
득의했던 마제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다과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했더니, 자기가 직접 아공간에서 다과 세트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아니, 왜 다과 세트를 가지고 다니냐고? 요즘은 이런 식의 세트 메뉴가 유행인가.
얼레!
찻잔과 주전자가 명품이다. 마법사는 보통 커피나 다과에 조예가 깊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이거 로얄럭셔리골든이잖아!”
“알아보시네요.”
찻잔 하나에 2천만 원, 돈지랄의 표본이었다. 그걸 일개 생도가 들고 다녔다. 하도 기가 막히다 보니 말문이 다 막혔다.
시작부터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을 엇나갔다. 기부터 죽이려고 했는데, 이놈의 대응이 상식적이지가 않았다.
대체 어떤 놈이 초대받은 집에 자기 먹을 걸 싸 가지고 오냐고!
기선 제압은커녕 어이없이 밀렸다. 마제로선 자존심이 또 상했다.
“덴의 찻잎으로 만든 거예요, 드셔 보세요.”
“덴은 차로 우려내기에 적합하지 않아.”
“마법사에겐 다르죠.”
“그렇지. 그래도 꽤 난이도가 있을 텐데?”
덴은 던전에서 자생하는 풀의 일종으로, 마력을 품고 있어 마법사에겐 보약과도 같다. 하지만 제조 과정에서 독기가 발생하고, 굉장히 써서 차로 마시기엔 부적합하다고 알려졌다.
하나, 마법사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데 보람을 느끼는 광기의 변태들이다. 기어이 차로 만들어 냈고, 소량의 마나까지 상승시켜 주니 일석이조였다.
후륵!
호기심이 동해 한 모금을 마신 마제는 순간 놀란 눈으로 무진을 보았다. 차에서 전해지는 달달한 맛과 정순한 마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솜씨가 아닌 데다가 고유의 마나 향이 있었다.
“네가 만들었구나.”
“소질이 있습니까?”
“크흠! 제법이긴 하다만 아직 멀었다.”
“다른 마법사의 덴을 마셔 보지 못해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다시피 사부님은 이런 쪽으로는 좀.”
“끄응! 기다려 보거라.”
덴은 마법사만의 고유한 성질을 담는다. 따라서 차를 만든 마법사의 성향에 따라서 맛도 천차만별이었다.
종종 각자가 만든 덴을 통해 마법사의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로 쓰기도 한다. 나름 마법사로서 고상한 취미였다.
마제도 대접을 받은 이상, 무진에게 내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당했구나.’
대접할 것이 마땅치 않다고 했는데, 자기 손으로 덴을 꺼내 와야 하니 역관광 제대로 당하고 말았다.
실상, 덴은 그리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차가 아니다. 최소 4계식은 되어야 하는 데다 마나의 세심한 컨트롤이 필요했다. 마법사이기 이전에 무식한 권왕의 제자라 허를 찔렸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군.’
마제는 지난번 무진의 막무가내식 토론을 본 적이 있었다. 패널의 말을 듣기는커녕 자기 말만 곧이곧대로 했었다. 누가 봐도 엉망인 토론이었고, 태도까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 토론의 목적을 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주변의 상황을 이끌어 오고, 패널을 도발해서 원하는 흐름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녀석이 권왕의 제자가 되었지?’
영악한 데다가 약삭빠른 스타일로 권왕의 성향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외향을 보니 권왕을 빼다 박기는 했다. 저 몸으로 마법사라고 하는 것부터가 이질적이다.
‘자기 자식을 만들어 놨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혼외잔 줄 착각할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권왕과 무진의 육체는 마제도 인정할 인자강이었다.
후륵!
마제의 덴을 마신 무진은 깊이 음미했다. 굉장히 독특한 맛이지만, 억제되어 균형을 이루었다. 마도의 성취만 놓고 본다면, 실로 대단한 족히 9계식은 되었을 것이다.
“마도에 동양의 사상과 오행을 담았네요.”
“볼수록 놀라운 놈이구나. 균형을 이루어 알아내기 어려웠을 텐데.”
“제가 민감한 편이라서요.”
“그런 놈이 권왕의 제자가 된 게냐?”
“사부님도 보이는 것보다 예민하세요.”
“히스테린 아니고?”
“초인의 범주에 들어가면 만류귀종을 이루나 봅니다.”
“닥쳐!”
편하게 대해 줬더니, 자기 사분 줄 아나? 하물며 권왕과 닮았다니, 마제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위였다.
차라리 쌍욕을 해라!
“어떻게 한 거냐?”
“잠깐 방황하기는 했지만, 선배의 잠재력과 곧은 의지가 답을 찾아냈다고 봅니다.”
“빙정을 건드렸구나! 이놈.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고서 한 짓이더냐?”
“그렇다고 언제까지 억제할 순 없지 않습니까. 지금도 이런데 자칫 성좌의 선택을 잘못 받기라도 하는 날엔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빙정과 연관이 있으리란 짐작은 했지만, 속성의 영력을 깨웠을 줄이야. 자신조차도 당장은 방도가 없어서 억제하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한데, 억누른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고 지적했다.
“누를수록 반발도 세진다는 건가?”
“영력을 가졌다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선배가 성장할수록 빙정은 그 이상으로 강해질 겁니다.”
“그렇더라도 너무 무모했어!”
“선배의 실수였습니다. 누가 들으면 제가 깨운 줄 알겠습니다. 저는 그저 선배가 실수를 만회하도록 보조했을 뿐입니다.”
“너는 부모가 아니라서 그 심정을 모른다.”
“저는 효잡니다.”
뭔 소리야?
대화의 주제에서 완전히 빗나갔음에도, 마제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기 얼굴에 대놓고 금칠을 하는데, 얄미우면서도 대견한 마음이 들다니. 하나, 딸의 목숨을 가지고 위험한 도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약간의 문제가 있다곤 해도,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정도로 빙정의 금제가 풀렸다면 약해지고 있다는 방증이죠.”
흠!
그 말이 맞았다. 마제로선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고, 사전에 막아 줬으니 은혜를 입었다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때 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때는 오라고만 했습니다.”
자고로 사람을 부르려면 그에 걸맞은 협상 카드를 제시해야 했다. 부른다고 올 만큼 무진은 한가하지 않았다. 더욱이 마제쯤 되면 최소한 만년삼왕 이상은 준비해야 했다. s급 선물임에도 찾아 준 걸 고맙게 여겨야지.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니더냐?”
“말로만 때우려는 것보다는 낫지요.”
하물며 무진은 빙정으로 인해 고통받을 예슬 선배에게 밝은 미래를 선사했다. 부모의 마음을 거론한 이상, 만금을 주어도 아까워해선 안 되었다. 만연한 등골 브레이커들 사이에서 그만하면 군계일학이기도 하다.
“부모의 마음이 어디 갔나요?”
“……빌어먹을 놈!”
네놈이 효자면 대한민국은 효자의 천국이겠다!
마제로선 생소한 경험의 연속이었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는커녕 생도에게 끌려다니는 마제라니. 작금의 대화를 다른 이들이 봤다면 어땠을까? 녹음이라도 됐으면,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연공실로 가자꾸나.”
“기대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