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자취기화(1)
무진은 던전을 나왔다.
백의산은 팀원들이 정신을 차린 후에야 나올 수 있었다. 유령에게 장악된 동안의 기억은 안개처럼 흐릿하게 지워졌다.
스윽!
무진의 시선이 박격 길드를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박격 길드의 남동천과 곽상배의 안색이 어둡다. 예상대로 바로 옆에서 유사삼형제가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흑역사를 지우고 나자, 태세 전환이 무척이나 빨랐다.
이젠 자신들이 갑이라 이건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더니, 형들은 찐한국인이었다. 기실 한국만 그런가, 세상이 다 그렇지. 우위를 점하면 갑질을 해 줘야 직성이 풀리는. 우월성이란, 사람이라면 가지고 싶은 본능과도 같은 욕구였다.
유사삼형제로선 최고의 복수를 했다.
태천 형의 일인데, 왜 그러냐고? 유사긴 해도 형제는 형제잖아. 형제는 일심동체인 법, 같이 축하를 해 줄 만하다. 반대로 괴로운 일이 있으면 공평하게 괴롭혀 줄 수도 있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박격 길드의 남동천은 눈치가 빨랐다. 던전이 2차 진화를 하면서 등급이 올라갔다. 자신들 실력으론 살아남기 어렵거나, 위험했었다. 뒤로 처져 있는 바람에 희생자 없이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우연이든 아니든, 생명의 은인이었단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저놈은 사람 되려면 멀었군.’
툴툴대면서 왜 인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곽상배는 나이만 처먹은 어른이었다. 자기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색하려면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어야 했다. 어중간하게 강하면 오늘처럼 언제 뒈질지 모른다.
“그만하고, 가자.”
“예, 강 부장님.”
오늘 일을 마친 무진은 유사삼형제와 함께 최신형 suv 벤츠에 탔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백의산 팀장을 빼고 팀원 전체가 유령에게 정신 지배를 당했어.”
“정신 침투형이었어? 그거 공략하기 굉장히 까다롭다고 하던데. 어쩐지. A등급으로 오르라더니.”
“천만다행으로 백 팀장에게 상극인 아이템이 있어서 어렵진 않았어. 그래서 말인데, 형들의 몸에 씨드를 심어도 될까?”
“씨드, 그게 뭔데?”
“일종의 gps라고 보면 돼, 위험할 때 내가 강림해서 원격조종도 하고.”
“……?”
그게 뭐야, 꼭두각시도 아니고.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별거 아닌 줄 착각하면 곤란했다. 악당들도 하지 않는 최악의 금제 중 하나였다.
실수하면 폭발시킬 수도 있잖아.
“너무 나쁘게만 볼 필요가 없어요. 위험할 때 내가 강림하면 안심이 되잖아. 안 그래?”
“……그러네.”
그렇긴 한데, 사생활도 없어지는 거잖아. 남자가 혼자 방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걸 해야 하는데.
“농담이야.”
무진류 밭농사 풍년은 암중 세력을 찾아내기 위한 건전한 용도 외에는 사용을 제한할 것이다. 아무 때나 사용하기도 귀찮고, 씨드를 남발하면 소모되는 마나도 상당히 커진다.
다행히 풍년을 사용할 자발적 참여자가 있었다. 반성한다고 해서 저지른 죄가 사라지진 않으니. 패륜을 상세할 만한 공적이 있어야 했다.
“형들은 본업에나 충실해 줘.”
레벨업으로 마나도 많이 늘렸으니, 소처럼 열심히 일해야 할 때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아. 근로시간 유연화도 되었겠다, 하루 24시간 풀로 돌려도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
권패의 시련으로 악명이 높은 파티 공략이 끝이 났다.
무진의 팀이 가장 높은 점수로 1등을 차지했다. 혼자가 아닌 팀 전략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모니터를 확인한 권패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었다. 그걸로 게임은 끝이 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팀 전술이기에 무진은 혼자 나서지 않고 4인방의 장점을 최대치로 끌어내어 절묘한 합격을 이루었다. 특히 정석만 고집하지 않고, 변수에서도 최적화된 대응을 해 교관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마물을 처리하는 속도는 물론 정확성에서 무진의 팀을 따를 팀은 없었다. 팀플의 정석이면서도, 개개인의 능력치까지 완벽했다.
권패는 마물을 처리한 직후를 노린 변수를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지를 물었다. 물 흐르는 듯이 막아 내서 감탄과 의심이 교차했었다.
다른 교관들도 그 점이 의문이었다.
“교관이 숨어 있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냐?”
“알든, 모르든 중요한가요? 언제든 방비해야죠.”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구나. 잘했다. 잘했어!”
“다 교관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아부까지 완벽하구나.”
권패는 무진의 구부릴 줄 아는 유연성에 주목했다. 빼어난 실력 못지않은 오만함에도, 상황에 따라서 굽힐 줄도 알았다.
아군일 때는 이보다 든든한 녀석도 없지만, 빌런이 되기라도 하면 상상만으로도 아주 끔찍했다.
“권왕께서 말년에 훌륭한 제자를 두었어.”
“사부님과 교관님을 만난 것이 제 일생의 행운입니다.”
“너무 빨지는 말거라.”
“제가 잘난 것도 크지요.”
권패는 1등과 함께 보상으로 보너스 점수를 주었다. 탑의 영향으로 경험치가 되어 레벨업에 도움이 될 것이다. 팀플이라 경험치가 2배였다. 가산점까지 계산하면 일반 생도가 6년 내내 얻을 점수와 비견되었다.
하아!
2등을 한 지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무진과 1 대 1이면 몰라도 팀전이면 할 만하지 않을까 내심 자신했었다. 팀원도 유정, 혜진으로 나쁘진 않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1등에 밀렸을 뿐, 3등하고도 점수 차이가 컸다. 무진의 팀플이 워낙 말도 안 돼서 그렇지.
스윽!
지수는 팀원을 둘러봤다. 아, 상원이 있었구나. 같은 팀인데,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이게 다 상원이 때문이야.”
“맞는 말. 혼자서 킬 수가 부족했어.”
“나대는 바람에 시간만 잡아먹고.”
지수, 혜진, 유정은 상원을 노려보았다.
상원은 억울했다. 킬 수가 가장 적은 건 사실이나, 다른 팀과 비교하면 또 그렇진 않았다. 나름 선전했는데도, 비교 대상이 넘사벽이었을 뿐이다.
“내가 죽일 놈이네.”
“맞아, 죽어도 싸!”
“그 정도는 아니잖아.”
“그 정도 맞아.”
원래 자기 비하를 하면 아니라고 해 줘야 하는데, 미녀삼총사는 자비가 없었다. 상원이 자기 몫만 했어도 점수 차이를 줄였을 거라고 못을 박았다.
“못난 놈 그만 괴롭히고 점심이나 먹자.”
무진은 말리는 시누이를 자처했다.
권패의 수업을 끝내고 식당으로 가는 길에 장구용 선배가 있었다. 여태 기다렸는지, 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굴에 있었던 그늘이 사라져서 같은 사람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강신의 효과일 수도, 마음가짐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경하드립니다, 부단주님!”
“……?”
이러면 주상 전하 납신 줄 알겠는데. 갈수록 장 선배의 태도가 과해지고 있었다. 마치 신앙처럼 경배하듯 대하니 부담스러울 정도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다는 소리다. 무진은 이런 쪽으론 단련된 금강불괴라서 흔들리지 않았다. 되레 옆에 있는 친구들이 부담스러워했다.
오늘만 그런 것도 아니고.
응?
뭐지, 이게?
무진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위화감이라고 하기에는 다른, 장 선배에게서 강렬한 염원과 소망이 전해진다.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삐질 것 같은 느낌이다. 밥 달라고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반려견 같다고나 할까?
‘의념의 연결을 원하는 건가?’
장 선배의 속성은 강신체였다. 의념체와 연결하여 능력치를 극대화하거나, 화신체를 이룰 수 있었다. 강신체를 파악한 줄 알았는데, 장 선배의 염원이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다.
‘풍년과 강신의 조합이라, 하나의 몸에 둘도 가능할까?’
장 선배는 조만간 탑에 오르게 된다. 그때 성좌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호기심이 방해될 수도 있었다.
하나, 성좌의 선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선택을 받은 모든 생도가 탑에서의 기억을 잃었다. 아직도 탑의 시험이 미제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선배가 제 사도가 되어 줬으면 하는데, 어떠세요?”
“은혜를 베푸신다면 저야 영광입니다!”
“자칫 제 성향이 선배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도요?”
“무조건 받겠습니다!”
괜히 물었나? 예상대로 선배는 거절할 줄을 몰랐다. 이런 성격이면 사회에 나가서 사기당하기 좋았다. 옆에서 정밀하게 컨트롤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더욱이 사특한 사념이 강신했을 때도 대비해야 하고.
그럭저럭 정당성을 확보한 무진은 시간 끌지 않고 씨드를 장 선배의 뇌리에 심었다. 본인이 강하게 부정하지 않는 데다 염원하기에, 심는 과정은 심플했다.
“어때요?”
“아주 좋습니다.”
“뭔지 알고서 말하는 거예요?”
“언제 어디서든 지켜보는 느낌입니다.”
“확실히 강신체는 다르네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전달력과 예민한 감각이었다. 상성이 좋다고 해야 하나, 부정적인 사념일수록 장 선배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얘기해 봐요.’
‘아? 들립니다.’
‘휴대폰 대용으로도 만점이죠.’
‘E심칩을 단 것 같습니다.’
거리가 가까운 것도 있겠지만, 잘만 활용하면 정보 수집에 유용했다. 하나, 지금처럼 원활한 소통이 되려면 본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저항하거나 반발한다면 이질감을 느낄 테고, 씨드를 노출할 수도 있었다.
“제 동생한테도 성은을 내려 주십시오!”
“……?”
장 선배의 요구에 지수, 혜진, 유정, 예슬 선배가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요상한 오해를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한자를 잘 써야 했다. 성은(盛恩)이지 성은(聖恩)은 절대 아니다. 한자를 급히 정정한 후, 선배를 훈계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선배를 괴롭힌 놈들과 똑같아지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너무 급한 나머지.”
딱히 급할 필요도 없거든요. 설마 이 순진한 선배가 의도하진 않았겠지? 씨드를 심은 이상 알아볼 수도 있으나, 사적인 영역은 지켜 주었다.
장구용 선배는 수업이 있어 헤어졌다.
식당으로 가는 길은 소란스러웠다.
웅성, 웅성!
무진의 주변으로 성운맹에 가입한 맹원과 가입하고 싶은 생도들로 붐비었다. 그중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찾아온 생도도 꽤 있었다.
그렇더라도 가르침은 대부분 4인방 선에서 컷 당했다. 극소수는 여전히 성운맹에 반감이 있었다. 뭘 하기만 하면 막아서는 아카데미가 감옥처럼 답답한 것이다.
“무진아, 아빠가 얼굴 한번 보자고 하셔.”
“안 봅니다.”
“아, 왜? 아빠는 우리나라 마법사 중에 최고라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선물이라도 준답니까?”
“우리가 이런 사이야?”
“시끄럽고, 밥이나 먹어.”
“응.”
무진의 단호한 거절에 지수, 유정, 혜진이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특히 유정과 혜진은 예슬 선배의 도 넘은 개수작을 경계했다. 아직 자신들도 무진에게 가정방문을 요구하지 않았었다. 상도덕도 없이 새치기는 예의가 아니었다.
‘나였으면.’
상원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이게 바로 인싸와 아싸의 비애인가? 눈, 코, 입 똑같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진은 그런 상원에게 충고했다.
“차이 크게 난다.”
“다 가졌으면 양보의 미덕도 보이라고!”
“유정아, 네가 물건인가 보다. 양보하라네.”
“이 씨댕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너 이리 와!”
“유정아, 나도 순정이 있…… 아악…… 살려!”
유정이 상원의 목을 잡고 사라졌지만,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상원의 사나운 팔자소관이었다.
헐!
의식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유정이 잡아 줘서 행복한 표정이라니, 저 정도면 심각한 질병인데.
“상원이도 많이 늘었어.”
“덕담은 잡혀가기 전에 했어야지!”
상원은 칭찬해선 안 되는 유형이다. 항상 갈굼과 박해 속에서 강해지는 사디스트적인 성향이었다. 그러니 좋은 말을 해 주고 싶어도 하지 않는다. 이게 다 상원의 미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