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고속버스(4)
덜덜덜!
허억! 허억!
광기로 미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전신의 근육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더욱이 마나와 체력이 거의 바닥을 찍고 있었다. 이대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레벨업!
헉!
무릎에 힘이 풀리며 쓰러지려고 할 때 레벨업을 했다. 다시 기력을 찾으며 원래 상태가 되었지만, 망연자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내 눈이 잘못됐나? 왜 레벨이 45지?”
“나도 그래! 무려 5단계나 올랐어!”
방금 레벨업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신이 들기 전까지 4단계의 레벨업을 했다. 입에서 비린내와 단내가 뒤섞여 똥내가 나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키키키키키키키!
아직 전투 판다가 남아 있었다.
장훈과 태천은 한창 썰고 있는 나 부장을 본 후, 서로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하게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님을 직감했다. 지금이야말로 자신들이 성장할 절호의 기회였다. 언제까지 하급 귀족으로 살 순 없다.
휘익!
어?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속도와 위력의 칼질이었다. 그런데도 피한다. 장훈과 태천은 방금까지 쉽게 썰었던 전투 판다가 보통이 아님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광기와 무의식에 기본을 담았던 전과는 달리 의식이 실리자 전투 판다가 대응하기 시작했다.
단숨에 썰고 다음을 찾았던 장훈과 태천으로선 당황스러운 결과였다. 분명 훨씬 강해지고 빨라졌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금방 끝이 날 줄 알았던 것과 달리 질질 끌리자, 체력적인 소모가 커졌다.
그런데 또 지치니까, 광기에 젖었을 때처럼 순조롭게 썰린다.
서걱!
힘이 넘칠 때는 안 되고, 힘이 빠지니까 더 잘되는. 도통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지만, 어쨌든 적응은 되어 갔다. 하도 썰었더니, 몸이 알아서 칼의 궤적을 찾았다.
“이게 혹시 검신합일!”
“심령각인이야. 아직 형들은 그런 수준이 아니라고. 어디서 건방지게 검신합일을 거론해.”
한창 들떴던 기운을 차갑게 식혀 주는 무진이었다. 그러면서 어서 썰기나 하라고 종용했다.
기본에 충실해지고 싶다는 장훈 형과 태천 형의 의견을 대폭 수용해 주었다. 일방적 교육이 아닌 나름대로 쌍방향이었다.
서걱! 서걱!
형들은 썰고, 또 썰었다. 전투 판다는 태생적으로 전투 본능을 타고나서 의식하면 할수록 상대하기 껄끄럽다. 그렇기에 칼의 기본을 최대한 육체에 새기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검로가 몸에 배기만 해도 성공적이다. 기량의 상승은 마물을 베는 경험치와 레벨업으로 대신했다.
서걱!
털썩!
500마리를 전부 썰었다.
도후, 장훈, 태천은 감개무량했다. 던전의 찌꺼기만 처리하며 주변인에 불과했던 이전과는 다르다. 마치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엑스트라에서 벗어나 주조연급은 되지 않았을까? 조금은 자뻑에 심취했다.
“내가 해냈어!”
“나도 해냈다!”
“흥! 좀 하네.”
무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형들에게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도후, 장훈, 태천은 감흥에 젖어 있었다. 다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무진이 빤히 쳐다보자.
“왜 그러는데?”
“아직도 모르겠어?”
“모르다니, 뭘 모른다는 거야?”
“이거 다 누구 덕인 것 같아?”
“그거야 다 네 덕이지.”
“그걸 아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감흥에 젖어! 끝났으면 냉큼 달려와서 날 헹가래 쳐 줘야 할 거 아냐!”
“……!”
어린 새끼가 공치사 더럽게 좋아하네!
순간적으로 정색하기에 실수가 있었나 되짚어 봤던 자신들이 병신 같았다. 외양만 봐서는 세상 진지하게 생겨서는, 농담도 무지막지했다.
“몸이 식지 않을 정도로만 쉬어.”
“더 하려고?”
“이제 시작인데, 뭔 소리야.”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해서.”
“장훈 형, 물약 꺼내서 마셔.”
전투 판다는 고작 해 봐야 d급 마물에 지나지 않았다. 개체 간의 전투력 차이는 뚜렷했다. 칼질 좀 했다고 엄살을 피울 거면 애초에 이 바닥에 들어와선 안 되었다. 장훈 형은 약사가 되고, 태천 형은 카센터로 전직하는 편이 나았다. 부모님은 그쪽을 더 선호할지도 모르겠다.
“알았어, 기본을 익힌 것으로 만족해야지. 지금부터는 고속버스를 태워 줄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나도 바쁜 사람이야. 내가 형들 뒤치다꺼리나 해 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어서 레벨업하고 보상은 전부 마나에 투자해.”
“하여간 정나미 떨어지게 하기는.”
말은 그렇게 해도 무진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다들 속내를 드러내기가 어색해서 표리부동해졌을 뿐이다.
“다 쉬었으면 움직여.”
“예, 예! 누구 명이라고 어기겠나이까!”
“형들, 이런 거 좋아했구나.”
“……아니거든!”
입 잘못 놀렸다가는 갑오경장에 폐지했던 노비제가 부활하는 수가 있었다. 사람을 물건만도 못하게 취급했던 조선의 노비제만큼 잔혹한 신분제가 있을까?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야 했다.
다음 전투 판다 군락지로 향했다.
D급 던전이기는 해도 전투 판다는 수가 많았다. 군락마다 수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던전을 공략하려면 6개 군락을 처리해야 했다. 상태창에 7개 중에 1개가 공략되었다고 나왔다.
이제 막 1개를 공략했단 사실에 도후, 장훈, 태천은 살짝 긴장했다. 레벨업으로 전체 스텟이 이전보다 훨씬 늘었음에도 부담이 되었다.
무진은 그런 형들을 위해서 일보를 밟았다.
우웅, 푸슥!
일보에 실린 위압과 중력이 군락을 장악했다. 인간을 보고 미친 듯이 쇄도하던 전투 판다는 한 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공간에 사로잡힌 채 일어서는 것조차도 불가항력이었다.
“이번에는 534마리니까, 가서 죽여.”
“……어, 그럴게.”
무진의 강함을 알고 있었음에도 도후, 장훈, 태천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함의 척도가 아예 다른 차원이었다. 먼치킨 소설에 나와도 끝판 격이니, 비교 자체가 무색할 지경이다.
차라리 [위압], [중력], [그림자 묶기], [사슬 제압] 등의 마조틱 속성을 썼다면 이해라도 하지. 일보로 천하를 지배하는 걸음이라니, 지가 무슨 초대 천만가?
“대체 얼마나 강해야 한걸음에 군락 전체를 제압할 수 있는 거야?”
“아직 멀었네.”
“무슨 말씀입니까, 나 부장님.”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지금 우린 어때?”
“우리야 버스를 타는…… 어?”
“이제 알았겠지, 주군이 편하게 대해 준다고 해서 기어오를 생각일랑 하지도 마.”
말은 편히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도후는 한 번도 무진을 동생으로 보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도, 모셔야 할 주군이었다.
‘하나하나를 제압했다는 거잖아!’
‘찾아가는 서비스도 아니고!’
전체를 한꺼번에 통제하기도 힘든데, 전투 판다를 일일이 제압한 것이다. 알면 알수록 한계가 보이지 않는다. 나 부장의 말대로 편하게 대한다고 동급으로 여겨선 안 되겠다.
서걱! 서걱!
너무 대단해서 넋을 놓았었다. 그러나 한가하게 있을 때는 아니었다. 바쁘신 동생께서 뒤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서둘러 전투 판다를 썰고, 다음 군락지도 썰어야 했다.
‘버스 제대로 타긴 했네!’
‘고속버스 맞구나!’
막타를 치는 것과는 달랐다. 대미지를 먹인 퍼센트 중 자신들이 99퍼센트를 먹고 있었다. 무진은 장악만 하고 있을 뿐, 전투 판다에 어떤 대미지도 주지 않았다.
이는 한두 번 해선 나오기 힘든 노련함이었다. 버스 기사를 왜 경력직을 선호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학살!
전투 판다는 저항은커녕 움직이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썰렸다. 눈 뜨고 자기가 썰리는 걸 지켜봐야 했다. 마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병신들이 봤으면 시위 거리를 제공할 광경이었다.
서걱! 서걱!
초롱초롱한 아기 눈망울로 살려 달라고 [집사전락광선]을 발출하지만, 레벨업에 정신 팔린 인간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인간이란 원래 자기가 먼저 배가 불러야 주변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 전까지는 탐욕에 찌든 본능을 숨기지 않았다.
‘검로마저 바로잡아 주네!’
‘마리오네트도 아니고!’
장훈과 태천은 칼이 나아가야 할 기본 포인트에서 벗어날 때마다 강제적으로 돌아와야 했다. 칼의 기본이 몸에 완전히 숙달되어, 무의식에서도 기본을 따르도록 고착화되고 있었다.
이제는 쉬지도 않고 다음 군락지로 향했다.
도후, 장훈, 태천은 기계처럼 썰고, 익히고, 레벨업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순조로워서 내가 하는 건지, 무진이 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고 있는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아니, 지치지도 않잖아!’
‘나 부장의 말대로 종이 다르구나!’
레벨이 쑥쑥 오른다. 자신들은 그저 무진이 차려 준 전투 판다를 썰기만 하면 되었다.
-군락지 일곱 곳 클리어.
-던전의 보스 수박 판다의 분노.
던전의 군락지를 전부 제거하자 수박 판다가 포효했다. D급 난이도에서도 상당히 까다로운 수준의 보스다. 수박(手搏) 판다는 말 그대로 무공을 쓰는 마물이었다.
인간의 무공과는 형태가 다르긴 하나, 우리나라의 전통무예이자 맨손 격투인 수박을 닮아서 수박 판다로 부른다. 물론, 나라마다 자기들 무예로 이름을 붙이는 경향이 있기에 다르게 불린다.
소림 판다, 사무라이 판다 등등.
키키키키키키키!
던전의 등급에 따라서 언어의 전달이 가능하긴 하나, D급이라 그런지 해석하기가 난해하다. 소리 자체는 웃는 것 같은데, 화가 잔뜩 났는지 살기가 실렸다.
오싹!
장훈, 태천은 소름이 돋았다. 몹과 보스의 갭이 이렇게나 클 줄 미처 몰랐다. 도후는 그나마 식인오마의 경험이 있어 기세에서 밀리진 않았다.
키키키키키!
두드드드드!
기묘한 괴성은 정신에 충격을 주었다. 일순 몸이 굳자 셋의 표정도 굳었다. 순간 속수무책으로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더욱이 전투 판다와는 다르게 굉장히 빠르다. 보스는 보스라는 건가.
웅, 팟!
헉!
기운의 흐름이 풀리면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지척까지 접근했던 수박 판다는 얼어붙었다. 눈빛은 용을 쓰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까딱 잘못했으면 셋이 같이 배설물이 될 뻔했다.
셋이 하나가 되어 설사를.
“보상은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잔데.”
“……아!”
하급 던전이라도 보스 킬 보상은 남다르기 마련, 넋을 잃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전투가 끝난 거나 마찬가지인 이상, 지금부터는 각자도생이었다.
무진의 말대로 먼저 먹는 게 장땡이다. 아까워서 남겨 두고 먹겠다고 시간 끌다가 똥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서걱! 서걱!
보스답게 단칼에 죽지 않았다. 맷집은 물론 재생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이 수박 판다에겐 최악을 선사했다. 고정 댓글로 박제를 당하듯 수박 판다는 난도질을 당하고 말았다.
-수박 판다 킬.
-던전 공략.
막타는 도후가 차지했다. 한 타이밍 늦은 장훈과 태천은 아까워서 미칠 것 같았다. 경험치와 보상의 갭을 상기하면 차이가 더 벌어졌을 것이다.
‘도후 형도 제법인데.’
숲이 아닌 나무만 보던 도후 형이 빅피처를 그릴 줄 알았다. 닿을 듯, 안 닿을 듯을 시전해 장훈 형과 태천 형의 속을 태웠다.
아마 다음에는 다르리란 희망을 봤겠지만, 실제는 많이 다르다. 도후 형은 여태 자신의 실력을 전부 보이지 않고, 장훈 형과 태천 형에 맞추어 한 끗만 다르게 했다.
잡을 것 같은데, 못 잡는.
이건 겪어 본 사람만 알게 된다. 그 한 끗의 차이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면 정말 환장한다.
‘처음에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저리 모진 사람이 되었을꼬.
무진은 알고 싶지 않기에 다음으로 넘어갔다.
오늘은 쉬고 다음 던전을 바로 공략할 예정이었다.
등급이 높지는 않아도 안산에 던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지금쯤 정부나, 길드에서 공략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