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가고 싶은 아카데미(1)
“농담인데, 너무하는 거 아냐?”
“빙정에 먹힌 줄 알았습니다.”
“거짓말, 누가 믿을 줄 알아!”
“안 믿으면?”
“……아니, 난 그렇다고.”
무진이 고압적으로 나가자 예슬은 움찔하며 꼬리를 말았다. 날 선 암고양이처럼 대들다가는 꼴사나운 꼴을 당할 수 있었다. 허튼수작은 통하지 않는 단호한 사내였다.
‘근데, 내가 왜 그랬지?’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이라니? 도예슬은 이해가 되진 않았다. 무진을 보자마자 그렇게 불러야 한다는 본능이 일었다.
“우리 예슬이가 이리 순종적인 현모양처인 줄은 몰랐네!”
“넌 닥쳐!”
“자기 발도 잘 안 닦는 우리 예슬이가 하나뿐인 주인님의 발을 씻겨 주는 장면을 아버님이 본다면 참 재밌겠다. 그치?”
“한번 뒤지게 맞을래?”
“봤지, 얘가 원래 이런 성격이라고!”
예슬은 장난스레 이죽거리는 철화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이 망할 친구 년은 유언비어 제조기였다. 허튼소리를 하도록 놔둘 수 없기에 친절하게 혓바닥을 얼려 버리겠다고 했다.
“히익, 그만! 안 할게!”
“그래, 그렇게 조용히 있으면 좋잖아.”
철화가 식겁하며 입을 다물지만, 눈가는 또 웃고 있었다. 아무리 협박해도 겁을 먹지 않는 예슬의 진정한 친구였다. 한 대 치고 싶은데, 그리 녹록하지도 않았다.
스윽!
예슬은 진지하게 무진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발을 닦아 주고 싶기는 했다. 내가 미쳤나?
어쨌든 마나로써 맹세한 이상, 계약자가 풀어 주기 전까지는 벗어나지 못한다.
‘5계식을 넘어 6계식에 올라섰어.’
마력을 갈무리한 도예슬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장에서 꿈틀대는 순도 높은 빙마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전의 빙마력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진 기억이 나는데.’
빙마력이 5계식에 들어서자 기억이 끊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마나운용이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배가 아픈 건지, 고픈 건지 모르겠네.’
수차례나 바닥에 찍히고도 이만한 건 다행이었다. 내버려두지 않고 치료 마법을 걸어 줬으니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까칠하지만 약속은 지키는 사내였다. 더욱이 계약을 한 이상, 사과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남이 보는 앞에서 주인님은 아닙니다.”
“안 보는 데서는 괜찮다는 거네.”
“말장난 그만하고, 이만 돌아가세요.”
“그렇게 할게. 어쩌겠어, 진 주제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순종해야지.”
누가 들으면 약속을 잘 지키는 생도인 줄 알겠다. 실제는 세 번이나 불복하고 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혹여 깨달음이 없었다면 과연 순순히 말을 들었을까?
예슬은 아쉬운 감이 있지만, 연무장에서 얻은 깨달음을 체화하기 위해 돌아서야 했다. 단순히 단계가 높아졌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각 단계에 맞는 마법을 배우고, 몸에 익혀야 했다.
“또 보자.”
“와, 낭만적…… 웁!”
이년이 또 시작이네!
예슬은 쓸데없이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철화의 입을 막고 연무장에서 끌고 나갔다.
질질질!
무진은 혜진, 유정, 상원에게도 돌아가라고 했다. 시간도 늦었고, 사부님과 할 일도 있었다. 한데, 혜진과 유정이 멀뚱히 서서 묘하게 바라보았다.
“왜?”
“불공평해.”
“맞아, 우리가 더 오래 봤잖아. 어째서 선배만 더 강해지냐고? 이건 세계수의 이름을 걸고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세계수가 대한민국에 있기나 하냐? 별 시답지 않은 소리긴 한데, 각성의 시대인 만큼 있을 것 같기는 했다.
물에 빠진 년들을 구해 줬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태도가 불쾌하긴 해도, 강해지고 싶은 열망은 충분히 와닿았다.
그렇다면 친구로서 외면할 수 없지.
“나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다 이거지?”
“설마, 더 많이 팬 거야?”
“맞은 만큼 보람도 있을 거야.”
“혜진아, 가자.”
“현답이야.”
유정과 혜진이 모처럼 의기투합하여 연무장에서 신속히 퇴장했다. 둘 다 워낙 가벼운 데다가 보법을 가다듬은 이후로 운신이 몰라보게 빨라졌다.
흠.
유정이의 꽁무니를 쫓아갈 줄 알았던 상원이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결연한 각오가 전해졌다.
“나도 강해지고 싶어!”
“도망만 다니던 녀석이 웬일이야?”
연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정이에게 달라진 위상을 보여 주고 싶겠지. 상원이라고 자존심이 없다면 거짓말일 터,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했다.
“이번에는 진짜야!”
“마나의 맹세를 해 봐, 그럼 인정해 줄게.”
“흐엑, 너무 심하잖아. 아버지가 보증 다음으로 마나의 맹세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진 않았다. 상원이다운 가벼움이다. 진지하게 대할수록 손해가 나는 녀석이었다.
“파파보이였군. 알았으니 가 봐.”
“그러지 말고, 다른 거로 하면 안 될까?”
“현자의 서나 전설급 장비, 아이템, 스킬 받는다.”
“젠장,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아니면 훈련에 절대 빠지지 않겠다고 계약서를 쓰든가.”
어?
이건 쉽네.
결연한 각오를 다졌지만, 무진의 물질만능주의에 굴복할 뻔했다. 어느 것 하나 들어주기 어려운 험악한 조건들이었다.
남자 대 남자로 약속을 하면 멋있게 들어줄 줄 알았는데, 무진은 참 현실적이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친구로서 들어주겠다고 했으니 살짝 감동했다.
-강무진을 갑으로 하며, 박상원을 을로 정한다.
-훈련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을이 지불한다.
-을은 갑이 시키는 훈련에 무조건 참여한다. 기간은 갑이 정하며 도중에 도망친다면 100억을 계약 위반으로 내놓는다.
“……100억?! 이건 너무 많잖아!”
“버티지 못할 것 같으면 이쯤에서 때려치워. 알다시피 너 아니더라도 배우고 싶어 하는 생도는 널렸어.”
네 결연한 의지가 100억보다 값싸냐는 시험 무대였다.
상원의 갈등은 깊었다. 왜냐고? 자신을 믿기 어려우니까.
그러나 이대로 포기한다면 유정의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억지를 쓰진 않을 거지?”
“할 거면 빨리 사인해.”
“알았어.”
두 장으로 되어 있는 약관이 있었다. 기본 약관의 빈 곳을 채워 형식을 완성했다. 사인하고 지장을 찍고, 2부씩 나누어 가졌다.
“기어이 사인했구나.”
“당연하지. 표정이 왜 그래?”
“지수야, 문 닫아.”
“잠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까 15일 후부터…… 흐엑!”
무공이든, 마법이든 강해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폭력이었다. 야만적이긴 하나, 성운맹은 마조군단의 의지를 이었다.
무진은 성운맹을 세운 장본인으로 본을 보였다. 기실, 지금보다 더 잘 가르칠 방법을 찾기도 귀찮다.
폭력의 미학을 알려 주마.
퍼퍼퍼퍽!
크아아악!
나, 사인 다시 할래!
어딜!
낙장불입. 1시간 동안 처맞고 치료를 당한 상원은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 훈련도 만만치 않았는데, 주둥이가 화를 불렀다.
드륵!
지옥이 끝났다 싶었을 때 권왕이 연무장에 들어왔다. 상원은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기겁하며 곧장 일어섰다.
“이 밤톨만 한 녀석은 뭐냐?”
“강해지고 싶답니다. 도중에 포기하면 100억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호오? 보기보다 강단이 있구나. 열심히 하는 녀석을 이 사부가 외면할 순 없겠지. 어디 한번 맘껏 날뛰어 보거라.”
“수고하십시오.”
머신을 바꿀 때가 되긴 했다.
권왕이 입맛을 다시자, 상원은 호랑이 두 마리가 있는 굴에 제 발로 들어왔다는 걸 실감했다. 여기서 싫다고 하는 순간 100억을 토해 내야 한다.
“남자는 주먹이니라.”
“저는 마법산데요.”
“본왕은 화염마도의 계승자이기도 하니 어서 받아 보거라.”
“아니, 그런 뜻…… 크웩!”
상원은 그 사부에 그 제자의 무서움을 몸소 겪는 진귀한 생체 실험…… 체험을 했다.
어쩌면 물이 피보다 진할지도.
상원이 처맞고……사부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동안 무진은 지수에게 도 선배에 대해 말해 주었다.
대화를 위한 초코라테는 필수였다. 항상 인벤토리에 소지하고 있으니 언제든 타 줄 수 있었다.
오늘따라 당이 떨어졌는지 지수가 꽤 예민해 보였다. 마음이 불편하면 피부에도 좋지 않을 텐데.
“당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닥쳐!”
서리마녀가 되는 도예슬을 확보한 정황을 설명했다. 빙정의 해명을 들어 보니 도 선배는 어릴 때부터 한기가 차는 체질이었는데, 속성이 개방될 때 영성을 얻었다고 했다.
“빙정에 먹힌 거였어?”
“도 선배와 빙정이 정반대의 성향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같은 몸을 공유하고 있다면 아예 다른 성격이라고 보긴 힘들지 않을까?”
“그렇다면 역시 놈들이 개입했다고 봐야겠네.”
“그 전에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겠지. 빙정에 개입한 흔적이 조금 있었거든.”
성좌의 선택은 불특정이긴 하나, 기본적으로 개인의 스텟과 속성에 영향을 받았다. 성질이 비슷할수록 궁합이 잘 맞는 건 성좌나 사람이나 매한가지였다. 도 선배가 빙정의 영향을 받아 부정한 기운을 품는다면 그에 맞는 성좌의 선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빙정을 팼다고?”
“사람이나 빙정이나 매 앞에선 공평하잖아.”
빙정만 타깃해서 패다니, 말이 쉽지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차라리 도 선배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편이 훨씬 수월했다. 무식해 보이는 몸과 달리 상상을 초월하는 예민한 감각과 통제력이었다.
“잠깐, 단전을 쳤다고?”
“통파권에 심권을 담았지.”
“도 선배도 알아?”
“모르지.”
예민한 부위라 밝혀서 긁어 부스럼을 남길 필욘 없었다. 오해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것도 귀찮고. 이런 일은 될수록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했다.
“그러다 폭주했으면?”
“더 처맞았겠지.”
“선배의 치부 따윈 안중에도 없었네.”
“긴가민가할 땐 일단 패고 보는 거야. 그럼 답이 나오더라고.”
무진의 당당함에 지수는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자기 스타일이 아닌 건가? 안도감이 들면서도 께름칙했다. 한편으로 적아가 분명하다 못해 단호하다. 모호함을 남겨 두기보다는 삭초제근을 근본으로 두었다.
‘이걸 빌미로 4박 5일 제주도나 갈까 했더니.’
무진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녀석이었다. 약점은커녕 잘 못 건드렸다가 급발작이라도 하는 날엔 재앙을 각오해야 한다.
***
도예슬의 성문맹 가입은 생각 이상으로 파급력이 대단했다.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하기엔 그녀는 3학년을 대표하는 생도였다.
더욱이 그녀는 성운맹과 대척점에 있었다. 반감을 산 상대조차 열렬한 추종자로 만들었으니 성운맹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도예슬이 솔선수범하여 성운맹의 맹주를 받아들이고 추대하면서 2, 3학년의 가입 속도는 추진력을 받았다.
이렇게 되자 칠대 가문과 대형 길드에 속한 생도들은 위기감을 더욱 강하게 느꼈다. 같은 파벌에 속한 동급생조차 성운맹에 가입하면서 파벌이 현저하게 축소한 것이다.
어느새 저학년은 성운맹을 중심으로 아카데미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했다. 초대 맹주인 진태수는 아카데미의 구태의연한 문제들을 뿌리 뽑는데 발 벗고 나섰다.
특히 생폭은 사회에 나가서도 꼬리표가 되도록 낙인을 찍었다. 반발하는 생도들도 있었으나, 성운맹에 반기를 들기에는 세력과 배경에서 현저히 밀렸다. 저학년의 단순 친목 다짐이라고 하기엔 가문, 길드, 재벌의 연계한 기반이 탄탄했다.
도예슬이 끝까지 반기를 들었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었으나, 되레 책임을 떠넘기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생도 간의 지속적인 생폭은 엄격히 금한다.
-교관이 비리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지속적인 감시를 추구한다.
-맹도는 일반 생도보다 우월하지 않으며, 더욱더 철저히 맹규를 지켜야 한다.
성운맹의 행동 강령이 발표되었다.
주목해서 보아야 할 규칙은 세 번째였다. 맹도라고 하여 특혜를 주지 않으며, 성운맹을 내세워 다툼을 벌이면 훨씬 가혹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했다. 실제로 선례가 남아 성운맹에 대한 신뢰는 높아져만 갔다.
-봤냐, 이게 바로 공정 사회란 거다. 얘들이 먼저 알려 주네.
-뭐래, 자기편이면 잘못해도 눈감아 줘야지. 일본이 잘한다고 우리나랄 욕할 거야?
-그러니까 정치가 망하는 거야? 잘못을 무조건 감싸 준다고 해결책이 아니에요!
-딱히 맹도가 된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네, 혜택도 없는데 뭐 하러 가입하는 거야?
-모르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성운맹도 자체가 명품 메이커라고.
-맞는 말이야. 인식이 아예 달라져. 성운맹이 나서면 그 자체로 정의가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