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주인님(3)
[분신이영] 스킬은 보법의 극의 이형환위에 비견되나, 도무지 빠져나갈 틈이 있어야지. 불의 장벽으로 꼼꼼히도 막아 놨다.
털썩!
하아아!
무릎에 힘이 빠지며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예슬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
일련의 과정을 되짚어 볼수록 허탈했다. 자신이 쓴 수법에 고스란히 당한 것이다.
처음 시야를 잃으면서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숨겨 놓았던 5계식의 빙결 마법은 써 보지도 못했다. 설마 받은 대로 고대로 돌려받을 줄이야.
그렇다면 4계식이잖아!
“치사하게!”
“선배가 너무 고지식한 겁니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당황한다면 마법사로선 실격입니다.”
“그건 네 말이 맞아.”
“다시 해 보겠습니까?”
“기회를 주겠다고?”
“아니요.”
“그럼 뭐야?”
“저는 방어 위주로 하겠습니다.”
해 보지도 못하고 당했으니, 맘껏 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너른 배려였다.
평소 같았으면 같잖은 배려는 집어치우라고 하겠지만, 이미 당할 만큼 당한 예슬은 속풀이가 필요했다. 이대로는 억울해서 노예 생활도 성실히 못 할 것 같았다.
빙결 마법 5계식 저주받은 혹한지대.
무진류 화염마도 회륜염.
솨아아아아, 화르르르르!
얼음과 불의 마법이 상쇄하며 연무장을 휘몰아쳤다. 화염을 뚫지 못하고 녹아 버리는 빙결에 예슬은 기겁했다.
빙결 마법 5계식은 겨우 발을 들인 수준에 불과하나, 위력만큼은 자신했다. 그걸 간단히 막아 낸 후,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것도 막아 봐!”
오기가 발동한 예슬은 빙결 마법을 연사하여 어떻게든 화염을 뚫어 내 보려고 했다. 하나, 무지성의 마법이 통할 리 만무하다.
무진의 계산된 마도를 뚫기는커녕 한여름 길바닥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았다. 무식한 방법으론 되지도 않는다는 걸 깨닫자, 예슬은 연계 마법으로 바꾸었다.
역산, 역산, 디스펠, 역산, 디스펠!
예슬은 역산을 당하지 않으려고 더욱 빠르게 마법을 발동했지만, 그마저도 디스펠에 걸려 연계 마법을 완성하지 못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고속 연산이었다.
‘단계는 높지 않은 데 왜?’
예슬은 무의식적으로 무진의 흐름에 빠져들었다. 상대의 약점을 찾으려고 하다가 의도치 않게 동화되었다. 실제로는 감화되었다고 봐야 했다. 흐름을 살필수록 놀라웠다. 계식은 자신보다 높지 않은데도 빈틈없이 완벽하다.
아!
탄탄한 기초를 바탕으로 정교하고 빠른 연산을 통해 매 순간 변화를 주어 빙결 마법을 봉쇄했다. 간격이 워낙 짧아 찰나에 대응한 것처럼 보일 뿐, 상황에 맞춘 후발제인이었다.
기초, 정석, 연산, 응용.
마법의 기본적인 원리였다. 이를 누구보다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예슬은 자신이 그간 파괴력에 치중한 나머지 빙결의 기본을 등한시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화염과 빙결은 상극의 마법이나, 기본은 비슷했다. 흐름에 동조하여 감화를 이루니 부족했던 빙결의 완성도를 높였다.
우우우우웅!
기본이 채워지자, 5계식에 도달했음에도 완전하지 않았던 연유를 깨달았다. 이는 단순히 단계를 높이는 과정과는 다르다. 처음부터 온전히 한 단계, 한 단계를 밟고 올라갔다.
솨아아아!
빙결 마법이 완전한 5계식에 들어서자 예슬을 중심으로 얼음 알갱이가 은하수처럼 퍼졌다가 고리로 순환을 이룬다. 확산, 응축, 순환, 정착으로 심법의 대주천과 비슷했다.
그녀가 눈을 감고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동안, 무진은 빙결 마법과 마나로드를 살폈다.
‘사요공을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겠어.’
사요공으로 감화력을 높여 도 선배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 주었다. 단, 과하면 부족하니만 못하기에 넘치는 빙마력을 흑무흡정술로 흡수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동시에 빙마력과 빙결 마법의 운용 방법을 알아냈다.
‘화염과 빙결의 동시 운용은 난이도가 있구나.’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룬 무극과 일맥상통했다. 각각으로 사용한다면 모를까. 동시 사용 시 마력의 소모와 육체가 받는 반작용이 심하다. 통상적인 마법사에겐 어려운 일이다. 다만, 강인한 육체와 넘치는 마력으로 상쇄한다면 가능할 듯도 싶었다.
‘위력에 비해 효율성도 떨어지고.’
무진에겐 대체 수단이 있기에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기습적인 즉살기로는 나쁘지 않았다.
‘서리마녀라.’
도예슬은 후일 수많은 무인과 헌터를 얼려 죽이는 희대의 마녀가 된다고 했다. 적지 않은 피해를 주고, 해외로 나가서도 악명을 떨쳤다. 미래의 피해자가 봤다면 죽이고 싶을 선배긴 했다.
‘그 정도는 아닌데?’
도 선배의 마법이 생도 기준으론 최상위권이 분명하지만, 공작급 헌터를 죽일 만큼 대단한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녀의 성정을 봐도 마녀라고 불리기엔 모자랐다. 감당하기 벅찬 고통과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태생적으로 악녀가 아닌 데다 꽤 뻔뻔했다.
솨아아!
응?
갈무리가 되어 갈 때쯤, 도 선배의 육신에서 순백의 냉기가 뿜어져 연무장을 얼려 버린다. 순식간에 빙결 마법이 2단계는 뛰어넘었다.
마력의 증폭? 한 단계면 모를까? 2단계를 뛰어넘을 마나를 갖추진 않았다.
어디서?
호오.
마나가 아닌 [빙정]의 공능이었다. 단계를 넘기에 부족한 한기를 [빙정]을 통해 만회했다.
하나, 급격한 성장인 만큼 빙마력의 유동이 불완전하다. 한순간 통제를 잃게 되었을 땐 속성에 먹힐 수도 있었다.
‘성좌력에 이어 속성력인가?’
각성자에게 있어 속성이 중요한 동시에 위험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저처럼 마나를 폭발적으로 늘려 주는 내단은 영성을 지니기에 주인의 선택이 중요했다.
‘어디.’
무진은 흑무흡정술로 [빙정]의 한기를 빨아들이지 않고, 도 선배의 빙마력을 폭주시켰다.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 궁금하긴 했다.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빙정]을 흡수하여 소멸시키면 그만이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시간이 흐를수록 [빙정]이 강해져 공작급에 이른다면 통제하기 더 어렵다.
솨아아아아!
도 선배를 중심으로 눈보라가 겹겹이 휘몰아치며 연무장을 절대온도로 떨어뜨린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선 자리에서 언 채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후아아앙!
마지막 방점을 찍듯 눈 폭풍이 휘몰아치다 가라앉았다. 하지만 온도는 더 내려가면 내려갔지 오르지 않는다.
도 선배의 머리카락이 완연한 백발로 변했다. 백안이 번뜩이며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모습을 내비쳤다. 차갑게 웃는 미소가 오싹하며 섬뜩하다.
마치 전 세계를 얼려 버릴 듯.
-하하하하하하, 드디어 해방…… 으웩!
“걸렸다, 요년.”
속성이 영성을 가지든 말든, 육체의 주인은 도 선배다. 감히 내 노예…… 선배를 날로 먹으려고 하다니 후배로서 묵과할 수 없다.
방관은 매도 빨리 맞으라는 극약 처방일 뿐. 내가 없는 자리에서 [빙정]에 먹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속성이 몸 안에 있는 걸 보면 이상하긴 해.’
속성이 개인의 특성에 따라서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참으로 신기하고 요상한 세상이었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했다.
꽈악!
도 선배의 목을 잡은 후 [빙정]이 있는 단전에 살포시 주먹을 뻗었다. 톡톡! 때리는데도, 무진의 주먹이 어디 보통 주먹인가? 딱밤이면 고층 아파트 한 동이 박살 난다.
예상대로였다.
-그런다고 내가 이 아일 돌려줄 것 같…… 까악!
“해 보자.”
-주먹질 따윈 내게…… 왜?
“알면서.”
-생도잖아…… 까악!
“뭔 상관.”
물리적인 타격은 받지 않지만, 심권의 영역에 도달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진은 통파권을 심권으로 변형하여 [빙정]에 영적 타격을 주었다. 되레 영성만 있기에 심권을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이대로 당할 것 같아?
솨아아아아아아!
동귀어진할 심산으로 초빙지옥을 형성하는 [빙정]이었다. 인간이 버티지 못할 절대온도를 벗어났다. 목을 잡고 있던 손이 바사삭 부서져야 마땅했다.
톡, 톡, 톡!
부서지긴 개뿔!
아녀자의 치부를 이리 막 쳐도 되는 거야? [빙정]은 단이 부서지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대충 치는데도 [빙정]에 실린 영력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물리적인 충격이면 견디겠지만, 영력에 닿는 권격이라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이러면 다 죽어!
“너만 죽겠지. 힐.”
무진은 [빙정]을 치는 데 그치지 않고 추궁과혈을 발휘해 얼어붙는 내부를 조화롭게 이끌었다. 같은 선상에서 상처 입는 부위를 치료 마법으로 깔끔하게 봉합했다.
위기감을 느낀 [빙정]은 영악하게도 속성력을 무기로 협박을 해 왔다.
-날 죽이면 속성을 제대로 쓸 수 없을걸!
“못 쓰는 고물은 쇳물에 녹여 다시 만들라고 했지.”
-난 도구가 아니라고!
“그렇다고 도 선배의 주인은 아니지.”
무진의 무심함에 [빙정]은 공포를 느꼈다. 평범한 생도가 아님을 직감했다. 무극 길드의 길드장인 마제도 이러지 않았는데. 이대로 소멸해 버릴지도 몰랐다. 각성 이후 이제야 겨우 운신할 수 있게 됐는데, 세상에 나오자마자 소멸하고 싶진 않았다.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그건 네 사정이고.”
살려 달란 태도가 뻣뻣했는지, 무진의 심금을 울리지 못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뭐든지 할게요! 어어어어엉!
“징징대진 마, 더 패고 싶으니까. 뚝.”
-뚝! 주인님으로 모실게요!
“그럼 완전히 개방해.”
-그건…… 까악!
“개수작은 안 통해.”
-알았어요, 할게요!
단의 심부를 개방한 [빙정]은 무진과 영력으로 마주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빙정]은 무진의 영혼을 먹어 치우려고 했다. 영혼 대결은 결국 영력의 순도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빙정]은 생도 수준의 영력인 줄 알았다.
웬걸, 연결하는 즉시 기겁했다.
-까아아아아아, 살려 줘요! 잘못했어요!
“통수를 쳤겠다.”
-제발, 영혼으로 맹세할게요!
“받아들여.”
무진의 심상인 무진계를 펼쳐 [빙정]의 영력 교육을 확실히 한 후 각인했다.
[빙정]을 살필수록 영력의 상태가 완전하지 않았다. 자칫 어둠에 함몰되었다가는 도 선배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주술의 낙인을 이용해 각인을 한 후, 사요공을 펼쳤다. 특히 기억 일부를 봉인해서 외부의 침공에 개방되도록 했다.
“단으로 돌아가. 부르면 재깍재깍 나오고.”
-예, 주인님.
기를 완전히 꺾어 놓고, 세뇌로 주인을 명확히 했다.
이제 도 선배의 빙결 마법을 순환시켰다. 찰나긴 해도 [빙정]의 숨겨진 진력을 맛보았기에 도 선배의 빙결 마법이 한층 상승했다.
우우우웅!
빙정이 방정을 떨어 주니, 빙마력의 단계와 순도가 확실히 높아졌다. 무진은 갈무리할 시간을 준 후, 도 선배가 깨어날 즘에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연무장 밖에는 지수, 유정, 혜진, 철화 선배가 있었다.
상원이는 언제 또 들어와서는, 포기 않는 집요한 스토커력…… 근성은 알아줘야 했다. 저 열정으로 마법을 열심히 했으면 7계식은 됐을 텐데, 쯧쯧!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저길 봐.”
연무장의 중앙에 앉은 도 선배는 마나심법을 운용하여 빙마력을 갈무리하는 중이었다.
범상치 않은 마나의 유동을 느낀 지수와 친구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직접 겨뤄 봤기에 지수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대결이 끝나고 깨달음을 얻은 거지. 너희들도 경험해 봐서 알잖아.”
“알기는 아는데, 이 정도로 효과가 좋았었나?”
“사람마다 다른 거지. 어떻게 다 똑같을 수가 있겠어.”
연무장을 개방해 도 선배의 마나운용을 보여 준 것은, 흐름을 읽어 경지를 높일 단서를 찾길 바라서다. 분야가 다르긴 해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같다면 만류귀종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솨아아아아, 휘이이이잉!
추워!
마지막에 이르자 극점에 도달한 설풍을 발산하다가 마나로드를 타고 심장에 안착했다. 도 선배는 서서히 심상에서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번뜩!
눈을 떴다. 흰자위로 뒤덮였던 백안은 사라지고, 선명한 눈동자는 세상을 빨아들일 듯 아름다웠다. 도 선배는 급히 누군가를 찾다가 무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주인님!”
“……?”
지수, 혜진, 유정은 무진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