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주인님(2)
솨아!
예슬의 팔목에 찬 복잡한 수식이 그려진 밴드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니 전신으로 번졌다.
빛이 사라진 후 예슬은 은백색의 소형 슈트를 입고 섰다. 마법사는 긴 후드 형태의 칙칙한 코디와 멋대가리 없는 빗자루가 고유 무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첨단의 전투 형태였다.
“전력 대결인 만큼 결투장과는 다를 거야.”
“마법 슈트군요.”
“변명 따윈 하고 싶지 않거든.”
“알겠습니다.”
예슬이 착용한 마법 슈트는 [은린성갑]으로 착용자의 마법 능력에 따라서 진화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방어력과 저항력을 늘려 주고, 마력 증폭과 운용 속도를 가속했다.
결투장에선 기본 무기를 제외한 장비의 착용은 제한하고 있었다. 생도의 스텟과 속성을 기르는 자리기에 장비의 이점은 최소화했다.
물론, 장비와 아이템의 착용 제한에 반발하는 쪽도 있었다. 현장에선 본연의 능력보다 장비와 아이템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하는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 좋은 장비와 아이템은 가문과 길드의 영향력이 너무 크게 작용한다. 가뜩이나 칠대 가문과 대형 길드 위주로 돌아간다고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생도와 학생은 배우는 영역이 다르긴 하나, 사회에 진출하기 전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효율적인 측면에서도 통계상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장비, 스킬, 아이템을 효과적으로 쓰면 좋긴 하나, 기본 스텟과 속성이 받쳐 주지 못하면 오히려 비효율적이었다.
고수는 장비를 가리지 않는다, 라는 격언이 크게 틀리진 않았다. 단, SSS급 장비, 아이템, 스킬은 다르긴 하다.
“너도 장비 착용해.”
“저는 몸이 장빕니다.”
“장판교의 장비도 사실은 오줌을 지렸을걸!”
“그렇다면 저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습니다.”
“맘대로!”
예슬은 만전을 기했다. 지수에게 패한 이상, 무진에게 또 질 순 없다. 마법 슈트가 편법이긴 하나, 여지를 남겨 둔 채 끝이 난다면 인정하지 못할 것 같았다.
선배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무진을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쟁 상대로 대했다.
“각오해! 백야!”
은백색 갑주에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백광이 번져 시야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환영, 가속!
광기의 질주!
미리 캐스팅한 마법을 전개하여 시야를 잃은 무진을 더욱 혼란스럽게 할 의도였다.
스륵!
백야에 시야를 잃은 줄 알았더니, 무진은 눈으로 보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상대를 찾아갔다.
슈슈슈슉!
예슬은 멈추지 않고 빙결 마법 3계식 빙뢰시(氷雷矢) 20발을 형성해서 무진을 동서남북으로 집중 요격했다.
우웅!
발동 즉시 내부에서 용솟음치는 기류가 기맥을 통해 증폭되어 권심에 도달했다. 무진은 더욱 가속하여 주먹을 뻗었다.
쩌어엉!
빙뢰시 5발이 유리잔처럼 깨지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머지 15발도 무진에게 닫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몸에 닿았다.
“걸렸어!”
빙결 마법 4계식 혹한설풍.
예슬은 마법의 단계를 높여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선사했다. 빙뢰시는 혹한설풍의 유도하고 위력을 증폭하기 위한 매개체였다. 평범한 1학년 생도라면 모를까, 애초에 빙뢰시로 타격을 줄 수 있으리란 안이한 판단은 배제했다.
빙결 마법 3계식 신속빙결.
예슬은 단번에 끝내지 않고 연거푸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지수가 압도적인 무공으로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이 시건방진 무진은 언제나 틀을 깨부수며 대결의 흐름을 요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이제 방심하지 않아!’
은린성갑을 입고 패배한다면 그 오명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도 남게 된다. 예슬은 감각을 개방하여 무진의 반격을 주시했다. 얼음 알갱이들이 육신에 달라붙으며 두껍게 쌓였다. 반격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얼어붙어 동사할 수 있었다.
‘어서 빠져나와 보시지!’
얼음을 깨고 나오는 즉시, 함정 스킬을 발동해 재반격을 한다면 제아무리 단단한 신체를 지녔다고 해도 충격이 상당할 것이다. 워낙 단단한 녀석이라, 빙결 마법 2계식 폭풍참살을 준비해 놓았다. 준비성 철저한 마법사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리라.
휘이이잉, 솨아아아!
신속빙결을 풀지 않고 [빙정 2단] 속성을 개방해 위력을 더했다. 빠져나오는 데도 만만치 않은 힘을 쓸 테니, 이후의 대치는 어렵지 않으리라 봤다.
‘시간을 끌어 나를 방심시키려고? 어림도 없어!’
설인이 된 상태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작은 구릉처럼 변했다. 연무장 절반이 얼어붙으며 냉동실이 되어 갔다. 호흡할 때마다 입김이 살얼음이 되는 혹한의 추위였다.
‘백야와 빙뢰시의 연계를 부순 것만 봐도 보통은 아냐!’
신속빙결과 [빙정]으로 안심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연계를 위해서 캐스팅을 준비했다. 장기인 이중 캐스팅에 은린성갑의 인챈트 마법을 통해 트리플 캐스팅을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마력과 정신력의 소모도 상당할 것이다.
응?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지나도 반응이 없다. 이상하다는 걸 깨닫자, 예슬의 안색이 퍼렇게 변해 갔다.
“……설마!”
만전의 상태로 최선을 다하려고 했는데, 상대가 예상과 달리 대응이 없자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잘못하면 인생에 빨간 줄 세게 긋는 수가 있었다.
“안 돼!”
이대로 동사해 버리면 승패를 논할 수도 없게 된다.
다급해진 예슬은 마법을 풀고, 얼음 언덕 위로 올라갔다. 대략의 위치는 알고 있지만, 지나치게 단단했다. 혹한설풍이 압축되어 얼음이 아니라 강철판처럼 깨지지 않는다.
“야, 죽은 건 아니지?”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이거 죽으라고 시전하……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순간 머릿속에서 온갖 불안한 상상들이 나래를 펼쳤다. 수갑을 찬 채로 최소 과실치사 혐의는 받을지도 모른다. 이미 철창에 갇혀 울부짖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싫어!”
그때였다.
쩌저저적!
얼음 언덕에서 손만 튀어나와 안절부절, 심신미약에 빠진 예슬의 발목을 잡았다.
꽈악!
까악!
폐가에서 귀신을 본 듯 예슬은 깜짝 놀라서 튀어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발목을 잡은 손은 날고 싶은 예슬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쩌저저적, 퍼어엉!
갈라지던 얼음 언덕이 버티지 못하고 폭발하며 파편을 토해 냈다. 그 중심에 선 무진은 거꾸로 매달린 예슬 선배를 내려다보았다.
“살아 있었어, 다행…… 으웩!”
후배가 죽지 않아서 안도했던 예슬은 하늘과 땅이 삽시간에 뒤바뀌며 현실을 깨달아 갔다.
“……날 속여…… 으웩!”
파아아앙!
만전도 상대적일 뿐, 이런 식의 변수를 경험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산전수전 겪은 마법사라면 또 모를까, 대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발목을 잡은 무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닥에 찍어 주었다. 연무장의 바닥은 유도식 매트리스를 깔아 놓아서 탄성이 있었다.
“까아악, 아파~~~~!”
“이런.”
무진의 예측 실패와 예슬의 마법 난사로 인한 고통 증가였다. 고무도 얼면 딱딱하듯, 빙결 마법에 바닥의 탄성이 사라졌다.
“……이런 치사…… 으웩!”
“치사하다니요, 이것이야말로 무진류 궁극기 죽은 척의 대가 귀식대법입니다.”
그냥 영원히 죽어 버려!
쌍욕을 박을 정신이 없었다. 예슬은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바닥에 한 번 찍혔더니 잘 돌아가던 머리도 난형난제가 되었다.
“이번에는 괜찮습니다. 파이어볼.”
화염으로 얼어붙은 바닥을 데웠다. 이제는 아까처럼 단단하지 않으니 고통은 좀 줄겠지.
찰싹, 까아아아아아아!
아!
얼었던 바닥이 열기를 만나 물기가 넉넉해졌다. 마치 물볼기를 치는 듯한 효과를 가져왔다. 찰싹, 소리와 함께 바닥에 밀착되어 위력을 더했다.
어찌나 비명이 큰지 고막을 파고드는 효과음이었다. 연무장의 결계는 소리를 완벽히 차단해 소음 공해를 막아 주었다.
덜덜덜!
너무 아파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예슬이었다. 살면서 처음 당해 보는 충격적인 통증에 치아가 무의식적으로 다다다다닥! 거렸다.
“항복?”
“……웃기지 마…… 잠까…… 으웩!”
고위 마법은 정신이 없고, 하위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속기가 가능한 1계식 마법은 무진의 역산에 막혔다.
찰싹, 까아아아아아아!
고통이 뇌를 지배했다. 계속 이런 꼴이면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도무지 버틸 재간이 없다.
하지만 억울해서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항복?”
“이 개새…… 항복!”
항복 안 하면 또다시 고통을 당해야 했다. 더욱이 빙결 마법을 제대로 쓰려면 이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무의미한 저항임을 깨닫자, 마법사로서 대승적인 결단을 내렸다.
더 맞고 항복할 바엔 그만 맞고 항복하는 편이 낫기는 했다. 그냥 처음부터 항복했으면 맞지도 않았을 텐데.
“치료해 드리죠. 힐.”
솨아아아!
예슬로선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한데, 치료 마법이 의외로 대단했다. 퍼렇게 멍들었던 전신이 순식간에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하아!
하도 기가 막히니 넋이 나갈 지경이다. 항복했음에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억울해서 파투 내고 싶은데, 그래 봤자 추잡해질 뿐이다. 영상인지, 녹음인지 철두철미한 후배 놈이 남겨 두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치사하게! 결투 중에 죽은 척하는 법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냐고?”
“실전에서도 치사한 짓은 하면 안 되는군요.”
“아무리 그래도 죽은 척은 너무하잖아!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도 선배의 여린 성정을 이용한 전술입니다.”
무진은 하나부터 열까지 당당했다.
예슬은 그 압도적인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결투장과 실전은 엄연히 달랐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전한 대결을 원했다면 마법 슈트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빌런이었으면 넌 죽었어!”
“제가 바보도 아니고, 그랬다면 다른 전술을 썼겠죠. 상황에 맞는 전술은 실전의 기본입니다.”
“원패턴만 고집했던 게 누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알다시피 영약을 많이 먹었거든요.”
현재 스탯에 맞는 전투를 수행한 무진의 승리였다. 치사하다고 해 봤자,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마법이 예상보다 더 대단하잖아.’
무진이 다방면으로 재주가 뛰어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정도로 마법 역산이 빠르고 정교한 줄은 몰랐다. 정상적인 상태의 마법 대결이 아니긴 해도, 최소한 3계식은 되어야 했다.
“날 어쩔 셈이야?”
“주인님한테 묻는 겁니까?”
“날 건드리면 아빠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건 계약 위반인데요.”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내 인생을 이딴 식으로 끝장낼 순 없다고! 너는 분명 나에게 메이드복을 입히겠지, 내 목에도 뾰족 목걸이를 채우고, 그다음엔 성인 용품으로 나를, 까악!”
“……?”
수위가 세네!
평소에 대체 뭘 읽는 겁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할 발언을 요즘 들어 많이 듣고 있었다. 죽인다고 한 것도 아니고, 노예빵은 본인의 선택이었다. 마치 자기 선택으로 풀 대출을 받아 영끌했다 금리 인상으로 집값 내려가니까 정부의 도움을 바라는 격이었다.
여하튼 듣기 거북한 개소리를 계속 들을 순 없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마나의 맹세를 한다면 다시 해 드리죠.”
“좋아, 다시 해.”
어지간히도 급했던지 마나의 맹세에도 예슬은 무진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마법사에게 있어 마나의 맹세는 강제력을 가진 불문율이었다. 맹세에 불응하는 순간, 마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대신, 마법으로만 하면 안 될까?”
“어지간히도 뻔뻔하시군요.”
“알았어, 그냥 해.”
“아닙니다. 마법으로 하시죠.”
“한다고? 왜?”
“왜일 것 같습니까?”
“나를 가지고 놀겠다는 심산인가 본데, 이번에는 아까처럼 안 당해!”
대결은 바로 시작됐다.
무진류 화염마도 백염광(白炎光).
번쩍!
까악!
내 누~~~~운!
태양 광선을 증폭한 듯 백염의 격렬한 빛의 포화에 예슬은 눈을 부여잡아야 했다. 일순 눈동자가 타들어 가 시력을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간신히 얼음찜질을 통해 시력을 되찾았을 때, 정면에 파이어 애로우가 있었다.
“그럼 이쪽…… 이런!”
사방에서 정확히 20발이 날아왔다. 서둘러 얼음장벽을 구현했지만, 동쪽과 북쪽의 화염이 새어 들어왔다.
‘이 정도쯤은 버틸 수 있어.’
다행히 엄청 뜨겁진 않았다. 무시하고 빙결 마법을 펼치려는 순간, 꺼진 불도 다시 봤어야 했다.
화르르르르!
연쇄 화염에 이은 화염폭풍이 예슬을 둘러쌌다. 빙결 마법을 펼치는 족족 역산당했고, 겨우 캐스팅된 빙결은 화염에 잡아먹히며 속수무책으로 녹아 버렸다.
역산, 디스펠, 화르르르!
망할!
예슬은 선기를 잡기는커녕 마력만 족족 소모했다. 스킬을 발동할 타이밍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