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성운맹(2)
무진 다음으로 무서운 애가 지수였다. 결투장에서 보여 준 무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무진이만 돌연변인 줄 알았는데, 커플이 쌍으로 미쳤다. 권왕 어르신의 가르침이 좋은 건지, 그냥 유전자가 일반인과 다른 건지.
‘성질 건드리지 말자.’
‘모를 때가 좋았어!’
다들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무진과 지수가 실력을 숨긴다고 해서 약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둘 다 수틀리면 언제든 약점이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 모를 때 친하게 지내거나, 아예 모른 척해야 했다.
채채채챙!
탐색전이 지나고 각축전이 중반으로 넘어가다 최종장에 도달하고 있었다. 검기와 곤기가 허공에서 맹렬히 충돌하며 사나운 기파를 쏘아 댔다. 결투장의 투명 결계가 있기에 그나마 안전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용신가의 김정우는 동생이 지수에게 당했다고 했을 때도 염려하진 않았다. 황룡지존공은 시간에 비례하여 가속하는 신공으로 학년이 높아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기본적으로 다른 일반 생도들보다 강하긴 해도, 칠대 가문이나 대형 길드의 생도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연유였다.
차라리 1학년 때 패배를 겪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는 낫다고 봤다. 무진이 모두가 들으라고 한 공허한 정의가 동생에겐 필요했다. 그간 자만하기도 했고, 간절함을 배웠다면 값진 패배였다.
그러나 자신의 패배는 다르다. 그것도 1학년에게 패한다면 가문의 어른들을 뵐 면목이 없어진다.
김정우는 내력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고, 속성인 [초월]을 끄집어내야 했다.
‘아무리 검신가라고 해도!’
천혜진은 의협단의 단주도 아닌, 일개 단원에 지나지 않았다. 승부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해도, 팽팽함에 자존심이 상했다.
처어엉!
검과 곤이 힘을 겨루고 난 후, 전력에서 밀린 혜진의 보법에서 빈틈이 생겼다.
‘지금이다!’
적룡곤법 7식 적룡파천.
김정우는 모든 전력을 적룡곤에 담았다. 이제까지 감추어 두었던 적룡곤의 [마나역공]도 펼쳤다. [초월]은 완전하지 않지만 2단을 개방했다.
이번 한 수에 목숨을 건다.
솨아아아!
김정우의 곤법에서 천하를 부서뜨릴 파괴력을 드러냈다. 천혜진은 검천공을 사천(四天)까지 끌어 올리며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두 신가(神家) 자존심을 건 한판 대결처럼 결기가 결투장 전체에 전해졌다.
검신류 육검 육천검우.
물러서지 않는 한판, 서로의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대로라면 둘 다 크게 다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교관은 만약을 대비해서 눈을 떼지 않고 집중했다.
스르르르!
꽈아아아앙!
결투장 사방의 한쪽 면이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고속으로 잘게 떨리는 투명 결계가 위력을 증명했다.
하나, 모두가 예상했던 장면과는 달랐다.
“……분신!”
“검의 그림자예요.”
“피하다니.”
“강하면 부러지던데요.”
예전의 천혜진이라면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반전이었다. 지수에게 하도 처맞더니 융통성이 생긴 것이다. 본인의 역량을 과신하여 싸우지 않고, 상황에 따른 대처 능력을 보완했다.
쿨럭!
김정우는 비겁하다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혈압 상승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다행히 간헐적 주화입마였다.
-천혜진 생도 승!
천혜진은 2명의 선배를 이기고 난 후, 결투장에서 내려왔다. 뒤를 이었던 선배들은 김정우 선배와 비교해서 부족했다. 예전과 달리 혜진이 치고, 빠지며 교묘하게 페이크까지 걸자 속수무책이었다.
다음 순서인 유정이와 4인방도 어렵지 않게 승리를 따냈다. 물론, 3학년의 관록과 자존심도 무시하긴 힘들었다. 지수와 혜진이처럼 연이어 상대할 만큼 여력이 남진 않았다.
슈웅, 파팟!
얼떨결에 대미를 장식하게 된 상원도 이기고 있었다. 하나, 앞선 동기들과는 양상이 매우 다르다.
“이 새끼가 언제까지 도망칠 거야?”
“결투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저를 잡지 못한다면 던전에선 불을 보듯 자명합니다.”
“미꾸라지 같은 놈이 주둥이만 살아서는! 어서 덤비지 못해!”
“언제는 안 덤볐나요?”
공기화살, 공기빵을 연계하여 3학년인 전남수를 공략하고 있었다.
제법 날카롭고 까다로운 반격이긴 한데, 전남수의 금성철벽에 흠집을 내는 수준에 불과했다. 워낙 단단하기도 하고, 방어력 강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상처는 자가 수복이 되어 극단적인 인파이트와 아웃복서의 대결이 되었다.
파파파팟!
슈우웅!
네 방을 적중시키고, 상원은 신속히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그런 상원을 필사적으로 쫓으며 한 대라도 맞히려는 전남수의 악전고투였다.
둘 다 치열하긴 한데, 어딘지 모르게 루즈했다. 책임 소재를 따지면 7 대 3 정도로 상원에게 있었다. 합리적 변명을 하자면, 마법사로서 원거리 공격은 당연했다.
‘어떻습니까, 나의 대(對)무진 전술이?’
심상을 구현하고, 또 구현하여 완성한 히트 & 런으로. 무진의 공격을 맞지 않고 한 방이라도 때리고 싶어서 창안한 궁여지책이었다. 물론, 심상에서도 무진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후우!
기복이 생긴 선배의 호흡을 간파했다. 상원은 끝장을 내기 위한 미끼를 던졌다. 차곡차곡 쌓인 분노가 이성을 잡아먹은 만큼, 선배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나의 승리다!
에어 블래…….
-무승부, 그만하고 나오도록!
나니(なに)?
통상적으로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승패를 정하지 않지만, 교관은 임의로 결투를 끝낼 권리가 있었다. 차후 납득할 사유를 제출해야 하나, 지금은 그럴 걱정이 없었다.
-대체 시간을 얼마나 잡아먹는 거야!
-이럴 거면 둘이 따로 싸우라고!
-도망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지루해 죽는 줄 알았네!
-의협단에도 인간미 있는 놈이 있었구나!
일루전 마법에 이은 회심의 에어 블래스트 3연쇄를 준비했던 상원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허탈한 결말이었다. 이대로 끝나면 자신만 무승이 된다.
“선배는 자존…… 나니?”
결투에 참여한 두 사람이 동시에 불가를 외치면 다시 진행할 수 있었다. 한데, 곰 같았던 선배가 어느새 결투장을 내려가 버렸다. 자신이 불리하단 걸 안 순간 지체하지 않은 것이다.
망할!
그러고선 교관의 판정에 수긍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상원은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3학년의 관록을 무시해선 안 되었다. 자신보다 짬을 먹어도 최소 천 그릇은 더 먹었을 텐데, 곰 같은 외모에 속았다.
‘이러면 나만 병신이잖아!’
요즘 컨셉이 반전인가? 하나같이 생긴 대로 안 살고 있었다. 무진만 특별한 줄 알았더니, 3학년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결 시간을 조금 더 줄였을 텐데.
‘젠장, 마나가 간당간당하네.’
3학년과의 대결은 상원에게도 모험이었다. 승리로 장식하여 나만의 소중한 유정에게 잘 보이려고 했거늘.
예상대로 쳐다도 보지 않는다.
빌어먹을!
고개를 돌려 웃고 있는 모습도 너무 아름답다.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흰 피부, 인간이 아닌 외모는 눈이 부시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남자 생도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욱!
의욕이 떨어지며 힘이 빠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모양이다. 상원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결투장을 내려가 무진의 앞에 섰다.
“수고했어.”
“이기지 못했는데.”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거지, 괜찮아.”
“무진아, 나는!”
승리하지 못했다고 해서 구박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상원의 예상과는 다른 뭉클한 반응이었다.
무진이 어깨를 두드려 주자,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네.
“내 승리야.”
“칫, 난 또 이길 줄 알았지.”
“기대하지 말라고 했잖아.”
“유정이한테 진심인 줄 알았는데, 쩝.”
무진과 지수의 100만 원빵에 상원은 말문이 막혔다. 기죽은 친구를 위로해 주기는커녕 번지점프대에서 줄 없이 밀어 버렸다. 혹시나 줄이 있으면 가위로 끊고도 남을 위인들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너무하는 거 아냐!”
“별 기대 안 했으니까, 키라도 더 크고 싶으면 레전드리 마법서라도 가지고 와. 그럼 고려해 볼게.”
“날 죽일 심산이야?”
“호오, 집에 있기는 있구나.”
“……없어!”
상급 마도서만 해도 아버지한테 걸리면 반 죽는다. 그래도 반은 살 수 있으니 노력이라도 해 보려고 했거늘. 레전드리 마법서라니, 들키는 순간 살기는 글렀다.
“우리나라와 같은 마법의 불모지에서 속성, 가문 배경, 인맥 없이 상위의 마법사가 되긴 어렵지.”
“왜 이래, 무섭게!”
“유정이를 빼앗겨도 좋아?”
“넌 악마야!”
상원의 소망은 185cm의 소소한 키에 유정이하고 결혼해서 아들, 딸 구별하지 않고 적당히 다섯만 낳는 것이다. 부귀영화나 절대강자를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소소한 행복을 바랐을 뿐인데, 현실은 왜 이렇게 잔혹하단 말인가?
“돌아이긴 해도 유정이를 노리는 애들이 많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거야.”
“그런다고 포기할 것 같아!”
“내 가슴도 열려 있…… 방금 닫혔다.”
오픈마인드를 보여 주려던 무진은 의처증 말기인 지수의 눈빛에 흥선대원군이 되었다. 이래서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했던가.
‘이만하면 됐겠지.’
무진은 지수와 상원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으로 만족했다. 둘 다 시기심과 소유욕을 바탕으로 강해지는 체질이었다.
보통은 위로와 격려가 도움이 되는 편이나, 상원은 칭찬해 줄수록 나태해지는 녀석이었다. 매일매일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단도리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성가시기는.’
결투장이 파장 분위기였다. 무진은 앞으로 나가 교관과 선배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1학년 생도로서 겸손함을 드러냈으나, 3학년 선배들의 표정은 똥 씹은 듯 구겨졌다. 배웠다고 하기에는 전적이 처참했다. 정우철을 이겨 뒤통수를 갈기고, 단원들을 동원해 엿을 먹이고, 마지막까지 잘근잘근 밟아 주었다.
빠드득!
부르르!
맘 같아서는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지라고 하고 싶으나, 자신들이 불러 놓은 사람들이 눈을 부릅뜬 채 지켜보고 있었다.
뭐라도 지껄여 봐라, 내일 헤드라인에 올려 주겠다는 눈빛이었다. 그 앞에서 역정을 낸다면 선배로서 실력도 없으면서 속도 좁다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짝짝짝짝!
결국, 맘에도 없는 박수를 치고 말았다. 선배로서 후배의 성취를 칭찬해 주는.
“우레와 같은 박수는 아니군요.”
짝짝짝짝짝!
옜다, 이거나 받고 꺼져!
3학년을 이끄는 생도들은 한숨을 길게 쉬며 돌아섰다. 자신들로 인해서 원치 않은 박수를 치게 했으니, 평판의 하락은 감수해야 했다.
“부족하긴 해도 의협단은 배움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무진의 의미심장한 말에 눈빛이 바뀌는 선배들이 있었다.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돌아선 3학년의 핵심 생도들은 모르겠지만.
***
-1학년의 반란인가?
-1학년이 아니라 의협단이겠지.
-3학년이 좆밥은 아니고?
-선배 망신 다 시키네. 나 때는 안 그랬다.
-꼭 실력 없는 것들이 나이를 내세우더라.
아카데미가 나이순으로 실력을 매기진 않더라도, 1학년이 2학년도 아니고 3학년을 이기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다수 국민이 학창 시절을 겪어 봤기에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하물며 한창 성장기의 생도에게 1년은 커다란 격차였다. 이를 순수 실력으로 극복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보통 한 학년에 극소수에 불과할 진데, 의협단이 보여 준 전투력은 실로 놀라웠다. 차후 아카데미의 장래가 밝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범상치 않은 건 사실이었다.
-이젠 의협단이 아니라 성운맹이라고 해야지.
-단하고 맹은 느낌이 아예 다른데, 지역구에서 갑자기 전국구가 된 것 같아!
-그보다 성운맹이 되는 과정을 봐 봐. 빌드업이 얼마나 개쩌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야.
-성운맹은 맹주와 단주보다 부단주가 예사롭지 않기는 해.
-씨발! 나와 같은 물리캔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지능캐였네!
-단순 지능캐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전투력도 1학년에선 넘버3인데.
-누가 넘버3래, 넘버1이야!
-본인 등판! 어서 오셈!
3학년이 여론전을 위해서 부른 취재기자들을 통해 성운맹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알려졌다. 당시 결투장 장면을 실시간으로 봤기에 왜곡 보도는 어림도 없었다.
의협단과 3학년의 알력 다툼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으나, 사람들도 눈과 귀가 있었다. 3명만 모여도 파벌이 생기는 게 세상의 이치였다. 의협단원 외에도 연관된 생도들이 수백이 넘었다. 통제를 벗어나는 의협단이 3학년에게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3학년이 1학년과의 결장은 본보기로 좋지 않기에 의협단과 협력 관계인 학년의 대표를 지목해서 흐름을 유리하게 이끌려고 했었다. 정우철을 내세워 진태수를 제압한다면 의협단을 견제하는 데 유리하단 판단이 선 것이다.
반전은 이마저도 의협단 부단주의 손바닥 안이었단 사실이다. 대결을 회피하는 척 시간을 끌어 3학년을 조급하게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순식간에 성운맹을 창설해 1학년과 3학년을 통합해 버렸다.
-성이 혹시 제갈 아냐?
-어디서 더럽게 짱개를 대!
-삼국지 덕후 새끼들이 이럴 땐 또 국수주의네!
-내가 삼국지 대체역사 소설 쓰다, 조금 잘못 썼다고 탈탈 털렸다! 대체 지나가는 엑스트라까지 어떻게 아는 거야?
-삼국지 덕후와 밀리터리 덕후는 건드리는 게 아니다. 그거 국룰이야.
-어쨌든 을지문덕, 강감찬 장군이시다.
-죽은 공명이 부활해서 따봉을 외칠 만해!
-나폴레옹이 키가 커서 부럽다고 하는 편이 낫지 않나!
-막말 대잔치에 아주 그냥 살판났네!
1학년이라고는 믿기 힘든 전략적인 두뇌 플레이로 3학년을 가지고 놀았다. 선배를 우습게 알았다며 항의하기에는 자업자득이었다.
눈 뻔히 뜬 채로 성운맹이 탄생하는 광경을 코앞에서 목도했으니 얼마나 열이 뻗칠까?
당장 손을 쓰기에는 의협단이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단주와 핵심 단원은 3학년 상위의 생도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압도적으로 이겨도 본전인데, 연이은 패배를 당한다면 두고두고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수 있었다.
결국, 3학년 파벌의 중심 생도들은 학기 말까지 쉬어 가기로 했다. 3학년에서 4학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아카데미의 탑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 스텟 증폭기인 성좌를 선택한 이후라면 1학년을 짓밟을 수 있었다.
‘두고 보자!’
‘짓밟아 주마!’
하도 갈아서 3학년의 치과 진료 기록이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