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성운맹(1)
……?
결투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이 고이는 고요의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눈은 현실을 직시했지만, 머리가 다른 입력값을 내놓았다.
허!
이게 되네.
진태수도 내심 얼떨떨했다. 감흥에 젖기엔 자신이 돌이켜 봐도 번갯불에 콩 볶듯이 끝이 났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 오늘의 한 방 케이오는 무진이의 공이 분명했다.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사방의 시선에 진태수는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심중으론 그간의 고생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안구에 습기가 찬다는 말을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무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것만 막으면 됩니다.
-역시 못 막네.
-대체 몇 번을 해야 합니까?
-이게 어려워요? 보세요, 쉽잖아.
-하아아, 굼벵이도 선배보다 빠르겠네요.
-이러면 나가린데.
-이제 겨우 삼류는 벗어났네요.
-거봐, 하면 되잖아요.
-자만하진 마세요. 그저 봐 줄 만한 수준이니까.
하루가 얼마나 길었던가. 못한다고 얼마나 갈굼을 받았던가. 나이도 어린 후배한테 어찌나 달달 볶였는지.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매일 두들겨 맞고, 강압적인 힐링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속고 있었다. 교묘하게 패고, 성실하게 치료해 주니 어느 누가 속사정을 알겠는가.
몸은 멀쩡한데, 정신은 골병들었다.
솔직히 하루에도 수백 번씩 죽고 싶고, 죽이고 싶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억울했었다. 명색이 재벌 3센데, 하루가 멀다 하고 죽을 둥 살 둥은 너무하잖아.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비 온 뒤에 땅이 굳기는 했다. 너무 굳어서 탈이긴 해도.
허!
모두가 우러러보고 있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에선 경탄이 어렸다. 3학년에서 실력을 인정받기는 했어도,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전교 1등의 맛이란? 그간의 지옥 같은 고통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달다, 달아!
하늘과 땅과 무진에게 주먹감자를!!
‘해냈어, 해냈다고! 이 내가!’
기분 째진다.
나의 병신 같은 친구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실실 쪼갰다. 과연 하나부터 열까지 쪽팔린 나의 친구들이다. 이런 때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비아냥거릴 줄 알았다.
‘그래, 너희들도 주변에 자랑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라. 내가 너희들의 위대한 친구다!’
이젠 칠대 가문도, 대형 길드도 부럽지 않았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했던가, 옛말 틀린 것 없었다.
무진의 전언이 뇌리에 박힌다.
‘달지?’
‘달다, 달아!’
‘더 달게 해 줄게.’
‘아니, 나 공복 혈당이야!’
‘호오, 고지혈증! 내가 그 분야에 일가견이 있지.’
‘제발, 이 기분 좀 만끽하자!’
‘농담이야.’
뭔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니! 두 번 했다가는 지리다 못해 싸겠다. 결투장에서 똥을 싼다?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린다. 한데, 이놈은 그리하고도 남을 위인임을 KS 검증받았다.
와아아아아!
정적이 깨지면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승자가 명확했다. 더욱이 승패를 인정한 교관의 판정이 있었다. 생도와 달리 교관들은 태수의 반격기를 보았다. 너무 빨라서 생략되었을 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카운터였다.
“……저럴 수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진태수가 이렇게나 강했다고?”
“학기 초만 해도 아니었는데.”
도예슬을 비롯한 3학년의 핵심 생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태수를 얕보지는 않았으나, 정우철의 상대로는 부족하다고 봤었다. 비록 정우철이 1학년 대표인 유지수에게 패하기는 했어도 실력 자체를 의심하진 않았다.
‘대체 어떻게?’
‘물리 속성은 아닐 테고, 스킬인가?’
‘너무 빨리 끝나서 알 수가 없잖아.’
‘정우철이 맹탕이었나?’
3학년을 대표하는 정우철을 허당으로 취급한다면 자신들조차 허접으로 낙인이 찍힌다. 제 얼굴에 침을 뱉을 순 없어 다른 쪽으로 살펴봤지만, 시작과 동시에 끝나는 바람에 무지성 실드조차 불가능했다.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기에 사람을 부른 것조차 커다란 패착이 되었다.
‘이대로 끝나면 안 되는데!’
‘정우철! 이 병신이 3학년 망신을 혼자 다 시켰잖아!’
‘이런 일로 우리 얼굴이 팔리면 곤란하다고!’
‘집에다가는 뭐라고 말하지?’
복잡한 속내와는 달리 되돌리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진태수와 결투를 벌여서 이기면 된다. 일반 생도들이야 진태수의 적수가 안 되겠지만, 자신들은 달랐다. 물리 속성을 가진 진태수의 약점을 찌른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나, 그것도 대결 전까지의 예상이었다. 지금의 진태수를 꺾을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요행이 아닌 실력이라면 자신들도 개망신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얌전히 물러날 수도 없다. 동급생인 정우철의 패배에도 나서지도 않는다면 겁쟁이란 타이틀까지 붙을 것이다. 설령 패한다고 해도 나서야 하며, 최소한 그럴듯한 공방전을 만들어야 했다.
‘요행이든, 아니든 나서야 해!’
도예슬이 눈짓을 보내려고 할 때, 기다렸다는 듯이 무진이 일어섰다. 저음의 굵은 목소리가 결투장을 울렸다. 테너와 베이스를 넘나드는 성량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저분이 우리의 맹주님이시다. 성운맹이여, 굳건하라!”
“맹주님 만세!”
“성운맹이여, 영원하라!”
뭔 개솔!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의협단의 단원들이 기세를 발산하며 진태수의 승리를 찬양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서 잘 짜인 한 편의 경극처럼 쇼맨십이 광기에 차 있었다. 더욱이 의협단에 이어 성운맹이라니, 이건 누가 봐도 의도가 뻔하잖아!
빠직!
도예슬은 무진의 수작에 미간이 좁아졌다. 3학년 대표인 정우철을 압도적으로 꺾은 후, 진태수를 내세워 성운맹의 대표성을 공인받으려는 수작이다. 의협단과 성운맹의 통합은 알고 있었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표한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이 자식이, 단물만 빼먹겠다는 거잖아!’
성운맹의 대표성을 공인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동호회나 친목회로 포장했다. 권한만 가지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작금의 대결로 파급력까지 높였으니, 성운맹의 권한은 막강해질 것이다.
씨익!
무진은 도예슬을 바라보며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만면에 자신감이 들어차 있어 도예슬의 속을 박박 긁었다.
빠득!
어제 말도 들어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고, 보란 듯이 그 이상으로 돌려주었다. 1학년에게 대차게 처맞은 도예슬은 이를 악물었다. 선배 알기를 우습게 보는 건방진 후배가 아닐 수 없었다.
‘잠깐, 피해 다닌 것도…… 일부러!’
3학년이 1학년을 직접 노리기엔 모양이 빠지고, 진태수가 타깃이 될 걸 알고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가정이 성립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결투를 신청했으니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망할 새끼, 이대로 끝날 것 같아!’
1학년에게 완전히 놀아나자, 도예슬의 눈빛이 바뀌었다. 평소 이성적인 편이지만, 화가 나면 뒤가 없는 불광동 고급 휘발유라고 불렸다.
빌어먹을! 또 한발 늦었다.
이번에도 무진이다.
이 자식이 정말 해보자는 건가? 왜 나서려고 할 때마다 나대는 거야.
“공사가 다망하신 맹주님을 대신해 의협단의 단주께서 친히 상대해 주겠다 하니 누구든지 올라오라.”
판을 깔기가 무섭게 유지수가 결투장으로 올라섰다. 태수 선배는 얼떨결에 바통을 터치한 후 결투장을 내려갔다. 게다가 볼 장 다 봤는지 예의는커녕 말투가 굉장히 건방졌다. 1학년이 3학년에게 대놓고 도발한 것이다.
-억울하면 덤벼, 아니면 찌그러져 있든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3학년들은 분노하여 무진을 노려보았다.
후배라면 최소한 선배에 대한 예우는 갖추어야 했다.
건방진 후배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참교육 해야 마땅하다.
이는 선배로서 대의이자, 천명이다.
우우우웅, 쏴아아아아!
3학년이 일치단결하는 찰나, 결투장에서 가공할 투기가 발산되었다. 1학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순도 높은 투기는 겹겹의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경지의 높고 낮음을 벗어나 강자로서의 위엄을 드러냈다.
무형지기?
결투장의 안전사고를 책임지는 교관들은 지수의 경지에 예사롭지 않음을 체감했다. 저만한 투기는 최소 완연한 절정에 이르러야만 가능하다. 현실을 인지할수록 경이로웠다. 정우철을 압도했던 권왕가와 창황가의 대결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부글부글!
도예슬은 계획과는 어긋나 버린 현실에 목이 탔다. 휘발유처럼 삽시간에 타오른 분노를 차갑게 식히는 지수의 투기였다. 이만한 기세는 정상급의 현역 헌터에게서나 느껴질 법했다.
지수의 범상치 않은 기도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느슨해지는 흐름이었다. 3학년을 도발했던 무진은 망설임을 용납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생도가 패배를 두려워했습니까? 우리는 아직 배우고 익힐 때입니다. 패배가 두려워하여 도전하지 않는다면 졸업해서 사회에 나간들 달라질 것 같습니까? 우리는 비겁한 승리보다 값진 패배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와!
옳소!
여기저기서 무진의 말에 동조하며 환호했다. 하는 꼴이 맘에 들진 않아도 맞는 소리였다. 생도로서 도전 정신을 부정해 봤자, 세파에 찌들었다고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
태수와 친구들은 그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도전이야말로 생도의 권리로서 패배를 딛고 일어설 용기를 배울 기회긴 했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니고 무진이 말하니까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 더더군다나 문장을 좋게 포장했을 뿐이지, 패배를 기정사실처럼 공포했다.
‘그런 놈이 한 번을 안 져 주냐?’
‘한 방만, 때려 보고 싶다! 세게!!’
‘져 본 적도 없으면서 잘도 지껄이는구나!’
‘저걸 입만 살았다고 할 수도 없고!’
주둥이만 살았다고 하기에는 의협단주인 지수보다 기록들이 화려했다. 입학시험에서 보여 준 괴력, 약점이 뚜렷한 원패턴으로 승리하는 무식함, 마조군단을 의협단으로 재탄생시킨 기획력까지.
‘따지고 보면 전부 구라지만!’
‘우리만 안다고 달라지나!’
‘우리도 모르고 싶다고, 왜 알아서는!’
‘이게 다 태수 때문이야!’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가 전부 구라라는 걸 태수와 친구들만 알고 있었다. 갓장이는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숲에서 소리라도 쳐 봤지, 우린 입도 뻥끗 못 하는 처지였다.
‘알려져 봤자 우리만 손해긴 하지.’
‘허공답보에 무형권을 누가 믿겠어?’
‘상식적인 범주여야 말이라도 꺼내 보지.’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잖아.’
무진의 진면목을 알지만, 터무니없는 무위였다. 사실대로 말해도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히기 딱 좋았다.
어디 그뿐인가, 이미 구축해 놓은 이미지가 워낙 막강했다. 이중 삼중의 철옹성을 뚫어 내고 무진을 건드릴 생도가 과연 있기나 할까?
‘한데, 태수만으로 어림도 없잖아!’
무진이 아니었으면 태수가 언감생심 정우철을 일격에 꺾을 수 있었겠는가. 그 누구도 하지 못할 불가능한 기적을 만들어 냈다.
주변의 환호는 태수와 친구들에게 마약과도 같았다. 끊으려고 할수록 금단증세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퍼어엉!
까악!
폭발과 함께 비명이 결투장에 울려 퍼진다. 마도의 천재로 불리는 도예슬이 비명을 질렀다. 장기인 더블 캐스팅에 의한 빙결 마법이 산산조각 나며 마력이 역류했기 때문이다.
“……무식한!!”
기절하기 직전 도예슬은 깨달았다. 지수가 보통이 아닌 수준마저 넘어섰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1학년으로 여기지 않고 속성과 스킬까지 총동원했음에도 당해 내질 못했다.
‘아빠 때문이야!’
만날 천재라며 잘한다고 하니까, 진짜 천잰 줄 알았잖아요!
저 앞에 천재를 넘어선 괴물이 있었다. 그런 주제에 최곤줄 알고 나댔으니 얼굴이 팔려 못 살겠다.
도예슬은 결국 편한 길을 택했다.
난 모르겠다.
꼴까닥.
깨어나면 꿈이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남은 이들이 알아서 잘 마무리하리란 기대는 솔직히 하지 않았다.
도예슬의 예상대로였다.
꽈아앙, 크아악!
퍼어엉, 쿠다다당!
결투장은 지수의 일방적인 승리로 이어졌다. 열 번의 대결을 모두 이기며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 주었다. 미래의 권후가 아닌, 현재로서도 완성도가 높았다. 저학년이 아닌 고학년을 기준으로 해도 실로 놀라운 무위였다.
후후후후.
부르르르!
무진의 미소에 태수 선배와 친구들은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제발 좀 웃어도 1학년 생도답게 웃으면 안 되는 거냐? 세상을 제 맘대로 가지고 노는 흑막 같아서 섬뜩했다.
‘현실은 패자에게 그리 아름답지 않아요.’
패배를 밑거름 삼는다, 말은 아주 그럴싸하다. 그러나 아카데미의 방식과 세간의 시선은 패배를 그리 달갑게만 보진 않는다. 포인트 정산에서도 불리하고. 무진은 그저 2, 3학년의 자존심을 이용해 성운맹의 가치를 높이는 작업에 사용했을 뿐이다.
결과주의 성과 만능주의에서 우리나라는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 내려놓아도, 돌아가도, 쉬어도, 실패해도 될 만큼 현실이 녹록하지 않았다.
‘의협단의 거름이 되어 주세요, 선배님들!’
그나저나 불나방들이 골드미스 무서운 줄 모르고 투쟁심을 불태웠다. 이제 지수는 할 만큼 했으니, 의협단의 핵심 멤버들이 나설 때다.
의협단이 무진과 지수 빼고 나머지는 좆밥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를 타파할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더욱이 의협단이 아닌 3학년이 나서서 멍석을 깔아 주었다. 내가 깔지 않고, 남이 깔아 줬을 때 위상은 더욱 높아지는 법이다.
지수의 뒤를 이어 혜진, 유정, 4인방, 상원이 나섰다.
대결을 마치고 내려온 지수는 무진의 옆에 앉았다. 땀이 흐르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지만, 지수의 스텟은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연 우리의 구세주다워.”
“대우도 안 해 주면서.”
“아직은 지구를 구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좀 잘했다고 해 주면 안 돼?”
“잘했어.”
무진의 무심한 칭찬에 지수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상기된 얼굴로 눈웃음을 살짝 치자, 태수 선배와 친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긴, 골드미스의 구력을 이겨 내기엔 약관의 나이로는 어림도 없었다.
“선배들, 설렜어요?”
“……아니거든!”
무진의 속삭임에 태수 선배와 친구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악마의 유혹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하는 순간, 후배의 여친을 노리는 파렴치한이 되어 버린다. 어쨌든 우리는 굉장히 억울했다.
‘지수가 유혹한다고 넘어올 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