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완장질(2)
가해자, 피해자, 메시아의 구도가 의협단이 노린 수법이었다. 이걸 역으로 뒤집을 수 있다면 단숨에 의협단과 놈을 보내 버릴 수 있었다. 치졸하긴 해도, 가장 효과적인 수법임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놈이 가진 모든 영광을 우리가 갖는 거야.”
“더는 구질구질하게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잡것들도 설치지 못할 테지.”
억울하다고 발뺌한들, 증거 영상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의협단이 즐겨 쓰는 수법이기에 놈의 억울한 얼굴이 기대되었다.
기척을 죽인 후, 기다렸다.
1시간이 흘렀다.
흠.
올 기미도 없고, 전화도 없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위화감이 들었다.
-띠리리리리리리♬
마침 전화가 왔는데, 발신자가 제한되었다.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지만, 받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마당에 언제까지 여기 죽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전화를 받자 아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화는 됐고, 어서 철수해!
“철수하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들켰다고, 병신아. 대체 이런 수준 낮은 계략은 누가 낸 거야?
“들켜? 어째서?”
병신이라고 욕을 들었음에도, 정우민은 화가 나기보다는 당황했다. 계획을 시도해 보기도 전에 들켰을 거라고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감조차 못 잡았다.
-그 자식이 준비한 수였다고, 일부러 정의감 넘치도록 행동한 거야. 너희들 같은 애들 걸려들라고. 의협단의 수뇌부와 중간 간부만 알고 있었어.
“씨발, 그럼 우리가 그 새끼 뜻대로 움직였단 거야?”
-알았으면 빨리 움직여! 지금 한가하게 통화할 때가 아니라고!
“……그럴게, 고맙다.”
정우민, 적운길, 이민용의 안색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도 놈의 손바닥에서 놀아나자, 울화가 치밀었다. 부처님 손바닥에서 재롱부린 격이다.
“개새끼, 두고 보자!”
서둘렀다. 이대로 있다가 놈에게 들키는 순간, 세간의 역적이 된다. 앞으로의 험난한 행보가 이제는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동기를 질투한 생도의 추잡한 암습.
대문짝만한 헤드라인으로 뉴스에 나가겠지.
통화를 끊은 후, 배준상은 물었다.
“이렇게 하면 되지?”
“그래, 잘했다.”
칭찬을 받았음에도 배준상은 무진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일 하나 하잘 때는 그냥 왔다 갔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과정이 정말 치밀하고 기가 막혔다. 자신도 머리 좀 쓴다고 자부했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세게 잡은 격이었다.
어째서 그때 일방적으로 당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모두의 머리 위에서 노는 녀석이었다. 그런 괴물을 이겨 보겠다고 했다니, 배준상은 모골이 송연했다. 한편으로 그 무식한 권왕의 제자가 맞나 싶었다.
“지수가 갔으니 의심하지 않을 거야.”
“그렇겠지, 정말 대단해.”
“너희들 짱돌 굴리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난 아냐, 진짜 개과천선했어.”
“개과천선을 하든, 악을 하든 상관은 없는데 계획에 차질을 빚으면 알지?”
“알지! 최선을 다할게.”
“최선은 중요하지 않아, 결과가 과정을 증명할 뿐이야. 난 결과론주의자거든.”
배준상은 실수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어떻게든 무진을 배후에 둬야 한다.
무진은 처음부터 알고 있다는 듯이 계획을 실행했다. 피해자인 척 찾아온 녀석의 멘탈을 바사삭! 부숴 버릴 때부터 예언자 같았다. 배신 따윈 이제 뇌리에서 잊었다.
‘대응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무진은 아버지, 사부님, 지수를 제외하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나 본인의 사정 때문에 심경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신뢰는 완벽한 계획과 준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애초에 배신할 빌미 자체를 제공하지 말아야 했다.
“몇 번 더 해 보자고.”
“또 한다고?”
떨어져도 멀쩡할 텐데,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무진의 꼼꼼함이었다.
배준상은 마른침을 삼키며 충성을 서약했다. 제발 자신만은 봐주기를 바라면서.
“녀석들이 부르면, 적어 준 대로 말해.”
“알았어.”
시간이 되자, 무진은 배준상을 보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태수 선배와 의논해야 했다. 지수는 애들을 데리고 그 일대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둘러본 후, 낭패한 연기가 먹힌다면 더할 나위 없다. 애들을 쥐 잡듯이 잡은 지수라면 충분히 잘해 내리라 믿었다. 근래에 애들 표정들이 많이 죽었지만,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태수 선배와 만났다.
“그런데 언제까지 피해 다녀야 하는 거냐?”
“조만간 알아서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선배는 느긋하게 기다리면 됩니다.”
그래, 기다리는 건 좋다 이거야.
“젠장, 그때까지 계속 처맞으라는 소리야?”
“엄살은, 회장님을 실망시킬 작정입니까? 가문의 영광은 처맞는 자…… 노력하는 자에게 옵니다.”
“……이 개자식!”
즐기고 있어, 씨발 놈이!
무진은 계략을 뭉갠 후, 아카데미를 종횡무진 활보했다. 너희들의 더러운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대놓고 보여 주었다.
-길을 비켜라! 의협단의 부단주께서 행차하신다!
이번에 개입한 칠대 가문과 대형 길드의 생도들을 유독 주의 깊게 살펴주었다. 성실하게 아카데미를 다닌다면 문제가 없을 테지만, 혹여 실수한다면 가중처벌 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힘이 있을수록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협단의 숭고한 이상이었다.
의협단이 지목한 파벌과 생도는 감시 대상이 되어 일상 자체가 피곤해졌다. 대단한 징계를 내리진 않아도 벌점을 받는 교칙 위반이 있었다. 한두 번이야 무시할 순 있어도, 벌점이 쌓이면 생도로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증거 있어?
-제보가 들어왔다.
사전에 철두철미하게 조사를 마친 후라 빠져나갈 틈을 일절 주지 않았다. 열이 받아서 똑같이 되돌려 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무진의 의도였다. 개수작을 부리다가 한 대 맞을 거 열 대 맞고, 벌점까지 2배가 되었다.
스윽!
무진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반대급부는 몸을 사려야 했다. 찍히는 순간 아카데미 생활이 피곤해진다. 죄가 없어도 속을 뜨끔하게 해 주었다. 의협단이 찬 완장의 파워를 실감하게 해 주는 광경이었다.
실제로 규칙 위반이나 벌점보다 무서운 건 사회 진출이 막히는 것이다. 의협단에 찍히면 그 순간부터 박제가 되어 인터넷에 오르락내리락하게 된다.
아카데미를 졸업해 봐야 겨우 사회 초년생인데, 나가 보기도 전에 인생의 나락이 결정된다고 상상해 봐라. 어느 생도가 두렵게 여기지 않을까.
새로운 형태의 아카데미 무법자의 등장이었다. 지수는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기에 혀를 내둘렀다.
“아주 그냥 폭군 나셨네.”
“세상은 평등하고, 자유로워. 거리낄 게 없으면 고개 숙일 필요 없지.”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한 거 아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침과 쓰레기로 더러워졌던 대로를 생각해 봐. 지금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잖아.”
“북한도 거리는 깨끗했어!”
“대신에 공산당은 활기가 없지.”
일반 생도들의 면학 분위기가 좋아지면서 아카데미 자체는 활기를 띠었다. 파벌이 중심을 이루지 않고, 모두가 동등한 입장의 생도로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물론, 일반 생도가 아닌 권리를 타고난 생도에게는 답답함의 연속이겠지만.
“슬슬 가정방문도 해야겠어.”
“네 속내를 애들이 알까?”
“알든 모르든, 확실하게 해야지.”
“그건 맞아.”
지수가 아는 정보를 토대로 의협단의 핵심 멤버들의 동향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변곡점이 생길 빌미는 주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사전에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어야 대비도 수월했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보진 마. 다들 너 같진 않아!”
“남의 일이니까 쉽게 보는 거야. 나 같지 않은 것도 알고.”
“원래는 반대 아냐?”
“그건 위선자들의 개소리지.”
사람은 자기 일을 우선으로 놓을 수밖에 없다. 이타적인 사람이 있기는 하나, 대다수의 우선순위는 본인이다.
일례로 고딩의 임신을 들 수 있다. 주변에선 축하하는데, 가족은 왜 쌍심지를 켜며 반대하느냐고? 그건 남이니까 그리 말하는 거다. 내 아들, 딸이 그런다고 상상해 봐라. 쉽게 말할 수 있나.
무진은 아버지를 제외하고, 본인을 중심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렇다고 통상적인 관념으로 상기하면 곤란하다. 그저 감정이 아닌 철저히 이성적인 개입일 뿐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유기적인 변화는 인정했다.
두둥!
가는 길에 일단의 무리가 막아섰다.
3학년 생도들로 1학년 생도와는 확연히 다른 포스가 풍겼다. 무리의 중심에서 꽤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여생도가 나섰다.
“너희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무엇입니까, 도예슬 선배?”
“날 아네?”
“삼대 길드의 후예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여생도는 무극 길드의 길드장 마제 도광필의 딸이자, 3학년을 대표하는 생도이기도 하다. 그녀가 나섰음에도 주변에서 아무런 불만이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의협단은 성운과 어떤 관계지?”
“성운과 의협단은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진태수에게 전해, 자웅을 겨뤄 보자고.”
“어째서 제게 전하는 겁니까?”
“하나라면 알 텐데.”
“태수 선배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내일 정오, 결투장이야.”
도예슬은 무진의 말은 듣지도 않고 돌아섰다. 의협단과 성운의 관계를 물어본 연유는 통보를 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았다. 태수 선배가 일부러 피한다는 걸 안 순간부터 제시만 하고 여태 방관한 연유는 의협단을 엮기 위한 과정이었다.
“제법 머리를 굴렸네.”
“누가 할 소리를.”
의협단을 견제하기 위해서 3학년이 나서면 모양새가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1학년을 동원해서 해결하기엔 의협단의 실세인 지수와 무진을 상대하기 벅차다.
더욱이 지수는 3학년인 정우철을 이긴 전적이 있었다. 정우철이 평균 수준의 생도였다면 모를까, 3학년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1학년 생도가 지수를 넘기에는 불가항력인 데다가 잘못 나섰다가 패하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그래서 선택한 대상이 태수 선배였다. 같은 3학년이고, 겨뤄 본 적도 있으니 안성맞춤이었다. 근간에 대결을 피하는 것만 봐도 결과를 의심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잔머리를 굴리면 짱돌에 찍힌다고 했지.”
대체 그딴 말은 어디서 나온 거야?
성서처럼 말하진 말라고!
그건 신성모독이잖아.
지수는 차마 물어보지 않았다. 잘못했다가는 짱돌로 인해 사방에 유혈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다.
다음 날 정오.
결투장으로 인파가 몰렸다. 생도는 물론, 소식을 알고 도착한 취재진까지 있었다. 사전에 밑밥을 제대로 깔았다. 누가 더 우위인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겠다는 의도였다.
웅성, 웅성!
의협단과 성운의 관계를 보다 집중적으로 퍼뜨리고, 실세를 진태수로 몰아갔다. 그러한 사전 작업의 결과, 서열전 때보다 인파가 몰렸다.
결투에서 패했을 때를 돌아보게 하여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 위해서다. 다소 치사해 보이나 어쩔 수 없다. 3학년의 명예와 자존심이 걸려 있었고, 의협단의 기세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3학년의 대표는 창황가의 정우철이었다.
-일전에 의협단주한테 졌을 텐데.
-그래도 3학년 통이긴 하잖아.
-기대했는데, 김새네.
-이긴다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
권왕가와 창황가의 대결에서 망신을 당한 정우철이 결투장에 들어서자 의아해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하나, 3학년들이 머리를 싸매고 계획한 대로였다. 정우철이 비록 의협단주인 지수에게 패하기는 했어도, 실력은 낮지 않았다.
‘정우철이 일방적으로 이겨 준다면 우리로선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지.’
‘망신당한 그때와는 또 다르기도 하고.’
정우철을 단순히 통이었다고 해서 올리지 않았다. 자체적으로 대결을 펼쳐서 검증을 거쳤다. 솔직히 다들 많이 놀랐었다. 실력이 떨어졌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공개적인 망신이 전화위복이 되어 정우철의 창을 벼려 주었다.
‘지금이라면 의협단주도 상대가 아닐걸.’
‘하물며 진태수 따위가 상대가 될 리 없지.’
3학년들은 패배를 딛고 일어선 정우철을 인정했다. 그걸 증명하듯 정우철의 기세가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창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조금만 건드려도 피가 베어져 나올 것 같았다.
빠드득!
정우철의 시선이 결투장의 한쪽에 있는 무진과 지수를 향했다. 특히 지수에 대한 분노엔 광기가 뒤섞여 있었다. 당장에라도 쇄도하여 창을 찔러 넣을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두고 보자,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그날의 패배로 자신은 모든 영광을 잃었다. 3학년 톱이라는 자부심은 산산이 부서졌고, 주변의 비웃음만이 비수가 되어 심장에 꽂혔다. 다시는 그때와 같은 패배감을 맛보지 않기 위해서 절치부심했다.
‘백중세도 아니고, 압도적이었는데 뭘 믿고 저러는 건지 원.’
‘아직 덜 맞아서 그래.’
정우철이 죽일 듯이 살벌하게 노려보지만, 지수는 코웃음을 칠 뿐이다. 그래 봤자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었다. 골드미스의 구력을 당해 내기엔 역부족이다. 하나, 지수가 예상하기에 태수 선배에겐 조금 벅차 보였다.
‘태수 선배는 어때?’
‘요 근래 많이 맞았어.’
‘다행이네.’
‘다행이지.’
결투장에 먼저 올라간 정우철의 뒤를 이어 태수 선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3학년 파벌은 작정하고 작금의 구도를 만들어 냈다. 통보 후 오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의협단의 명성을 깎아내릴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창처럼 날카로운 기세의 정우철과 달리 진태수는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현실을 외면해 버린 자포자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들 전자보다는 후자에 무게를 두었다.
결투장에 올라서자 정우철의 눈매가 더욱 사나워졌다. 당장에라도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 굶주린 맹수처럼.
“용케 도망치지 않았구나.”
“1학년한테도 지는 녀석을 겁낼 이유는 없잖아.”
“……전력을 다해 주마.”
“난 1학년 치로 상대해 줄게.”
정우철은 이놈이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나대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력만 놓고 보면 서열전 10위에도 들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재벌 3세라서 눈에 뵈는 게 없나. 의협단의 명성에 기댄 호가호위에 불과했다.
-결투장 대결에 모두 동의합니까?
공식 대결이 아닌 결투장을 이용했기에 약식 동의 후 곧바로 시작했다. 정우철은 진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체하지 않았다. 단숨에 기선을 제압한 후, 본보기를 보여 줄 심신이다. 자기 주제를 모른다면 뼈에 새기도록 가르쳐 주는 수밖에.
슈웅!
슥, 빠악!
피하고, 친다.
그림 같은 카운터라고 해야 할까? 패황의 팔찌로 역발산기개세를 발동하여 스피드에 힘을 보탰다. 일순 거력이 절묘하게 타점에 실리며 최적화를 이룬다.
털썩, 꺼르르르르!
-진태수 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