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전화위복(2)
진 회장은 양은냄비 같은 열풍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기에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반면, 열일곱 살에 이런 통찰력이라니, 무인으로의 실력 못지않게 놀라웠다.
끄응!
흡족한 대답이지만, 진 회장은 앓는 소리를 냈다.
“저는 마음으로 족합니다.”
“아주 영악해.”
계좌를 오픈한다고 한 이상, 얼마를 냈는지가 밝혀진다. 성운 그룹은 의협단으로 인해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었다.
남들보다 적은 돈을 낸다면 과연 어떤 식으로 보겠는가. 최소한 다른 기업이 낸 돈보다는 더 내야 했다.
“선배를 잡아먹으려는 게냐?”
“못하면 먹히는 세상이죠. 전 저보다 부족한 사람을 따르지 않습니다.”
무진의 노골적인 태도에도 진 회장은 아주 기꺼웠다.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손자라도 경쟁에서 낙오된다면 가차 없이 내칠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성운이라는 거대한 기업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무진은 손자를 위한 발전의 밑거름이 될 만했다.
‘하지만 주인을 무는 개는 용납할 수 없지.’
어디까지나 주종 관계로서의 대우였다. 진 회장은 자신의 기업을 피도 나누지 않은 제삼자에 줄 만큼 호인은 아니었다. 지금껏 갖은 고생 해서 그룹을 일구었는데,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었다.
“난 네가 단주를 할 줄 알았다.”
“사부님의 손녀 사랑이 만만치 않아서요. 제가 아무리 사랑스러운 제자라도, 피를 나눈 혈육과 같을 순 없잖아요.”
“허, 네 나이에 너무 현실적인 거 아니냐?”
“회장님도 사부님과 다르지 않을 텐데요. 서로 대화도 해 봤으면서 아닌 척하진 마세요. 제가 아무리 뛰어나도 남이잖아요. 그리고 저도 제 자식에게 물려줄 겁니다.”
너무 솔직해서 진 회장은 말문이 막혔다.
듣고 있던 임원들은 기겁하며 입을 막았다. 자신들은 감히 하기 어려운 직언이었다. 젊어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무진이 지나치게 어렸다. 더욱이 치기 어린 발언으로 치부하기에도 의협단을 만든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강 이사를 빼다 박았구나.’
‘근래에 들어 강 이사도 잘나가던데.’
‘이거 편을 잘 서야겠는걸.’
성운 그룹과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거리를 두기엔 이들 부자의 능력이 대단했다. 길드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투귀를 데려온 것부터 범상치 않은 부자였다. 더욱이 투귀는 알려진 것 이상으로 강했다. 벌써 aaa급 던전을 가뿐히 공략해서 길드의 명성을 쌓고 있었다.
“그럼 내 손녀사위가 되어 볼 의향은 있더냐?”
“진태영 양을 말씀하시는 거면 사양하겠습니다.”
“벌써 조사를 했구나! 한데, 어째서?”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저 얼굴 많이 봅니다.”
“자고로 여자는 가문과 성격을 봐야 하는 것이다.”
“전 어려서 그런 거 모릅니다.”
벌써부터 마음을 보겠다니,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 나이 때는 전적으로 얼굴과 몸매가 중요했다. 나이가 들어서 마음을 보게 된다면 모를까. 그런 식이면 TV에 나오는 외모지상주의 끝판 대장인 아이돌은 망해야 정상이었다.
“나중엔 기회가 없을 수도 있어.”
“제 주변에도 많거든요. 한번 읊어 드려요?”
“끄응, 잘나가는 것도 한때야.”
“인생은 원래 한때예요. 그 시절을 즐겨야죠.”
후회는 나이가 들어서 하면 된다. 미리부터 걱정한다고 현실이 획기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즐겁게 살다 가면 되었다.
물론, 죽기 전의 아쉬움은 당연했다. 완벽한 인생이 존재하지 않듯, 완벽한 죽음도 흔치 않았다. 역사의 영웅들만 봐도 죽음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으니까.
“발칙한 녀석, 알았으니 이만 나가 봐라.”
“의협단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들었다 놨다.
진 회장은 이놈이 진짜 물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터로서의 능력을 제외하면 태수가 고생깨나 할 듯싶다.
***
생폭을 과감히 처단하고, 피해자 구제를 위한 지원을 하자 의협단의 인기와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삽시간에 시대의 아이콘이자, 금기의 불문율이 되어 간다. 일부 여론이 부조리를 논하나, 의협단을 거론하는 순간 맹폭을 당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협단을 신격화하는 현상이 생겼다. 세간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협찬 광고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완장의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제외하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의협단 완소 아이템.
[생도복, 티셔츠, 모자, 이모티콘, 가방, 권갑, 토시, 각반, 검 등등]
의협단이 차고 다니면 그 자체로 유행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기업에선 의협단을 포섭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수뇌부에 대한 인기와 관심이 대단했다.
“의협단의 단주 유지수다!”
“의협단의 부단주 강무진이다!”
오오오오오!
아카데미는 물론 밖에서도 의협단의 인기는 대단했다. 무진과 지수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덩달아 같이 다니는 유정, 혜진, 상원, 4인방까지 인기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여기에 사인해 주세요!”
“사진 같이 찍으면 안 될까요?”
“아, 가문의 영광이에요!”
무진과 지수는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해 주었다. 물론, 시간을 오래 할애할 순 없었다. 오늘도 생폭을 당한 피해자를 구해야 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길을 터 줬다.
“아름다운 아카데미를 위하여!”
“아카데미를 위하여!”
“정의는 항상 승리한다!”
무진은 부끄럽지 않았다. 지수와 친구들도 이젠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부끄러운 것도 하루 이틀이지, 다 같이 열화와 같은 성화를 보내니 적응이 되었다.
의협단 만세!
의협단은 영원하라!
Forever Justice.
헐!
배후에 빼꼼히 같이하게 된 인턴 단원 배준상은 의협단의 광기 가득한 열풍에 혀를 내둘렀다.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야?’
오빠 부대도 아니고, 의협단 부대라니! 국민 아이돌을 뛰어넘는 성취였다. 실제로 sns를 비롯한 인스타, 유튜브를 통해 세계에서도 주목하고 있었다. 국뽕을 빼더라도, 인기몰이가 심상치 않았다.
‘다들 속고 있다고!’
무진의 실체를 알고 있는 배준상은 기가 막혔다. 저 인간이 아무런 사심도 없이 누굴 도와줄 위인인가? 길드의 기둥뿌리가 뽑혀 나갈 뻔했던 배준상으로선 어처구니없는 현상이었다.
‘그래도 대단하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무공만 강했다면 이런 광기에 들어찬 광풍을 만들진 못했다. 마조군단이란 말도 안 되는 집단을 가지고,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단체로 성장하다니. 일련의 사태를 풀어내는 과정과 기획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역시 여기에 붙길 잘했어.’
만약 끝까지 무진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배준상은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왔다. 차라리 그때 정우민, 이민용, 적운길이 배척해 줘서 다행이었다. 편을 들어 줬다간 무진과 적대 관계가 이어질 뻔했다.
‘좆될 뻔했어!’
하늘이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무진의 눈에 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아버지도 의협단에 끝까지 붙어 있으라며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과 길드가 살길은 의협단에 있었다.
다만, 배준상의 현실은 서글펐다.
‘나는 언제 박쥐 신세에서 벗어나냐고?’
얼마 전에 무진이 따로 불러서 일 하나 하자고 했었다. 그리고 은연중 홀대받는 단원이 되었다. 지금도 단원들 뒤에서 빼꼼히 바라보고 있는 연유였다. 마치 누군가가 이 광경을 봐 주기를 소망하듯, 꼬시고 있었다.
‘악마야, 이놈은!’
***
“담배 사 왔어?”
“미안, 신원 확인을 하지 않으면 안 판다고 해서…… 까악!”
“안 팔면 인생 끝나? 몸이라도 팔았어야지!”
“잘못했어! 제발 봐줘!”
“당연히 잘못했지! 아 씨, 짜증 나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거슬리는 것들이 많은 거야?”
조예정은 근래에 삶에 재미가 없어졌다. 예전처럼 맘대로 행동하기도 어렵고, 주변의 눈치를 봐야 했다. 하루 이틀은 참아도 언제까지 주변 눈치를 봐야 할지 모르기에 스트레스가 쌓였다.
몰래 담배라도 피우며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는데, 이 벌레 같은 년이 생긴 대로 무능했다.
“변신 속성은 국 끓여 먹었냐고? 그나마 쓸모가 있어서 데리고 다녔더니 아주 그냥 제 아빠처럼 무능하기 짝이 없네.”
“아빠는 잘못…… 까악!”
“씨발, 뭐라는 거야! 꼴에 아빠라고 챙기냐? 어떻게 이런 병신 같은 년이 다 있지. 다시 가서 사 와, 안 사 오면 오늘 정말 파란만장해질 거야, 아마.”
겁을 주면 벌벌 떠는 년이라, 알아서 길 줄 알았다.
웬걸, 우물쭈물 서서 한다는 소리가.
“……사과해.”
“하아, 좆같네!”
조예정으로선 가장 어이없는 상황과 마주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나 할 것이지 노예 년이 감히 주인한테 사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정말,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근래에 의협단인지, 중2병 찐따들인지가 설치니까, 이 병신 같은 년도 같이 나대고 있었다.
꼴뚜기 같은 년이, 젓갈 좀 담가 줘야 하나.
“그놈들이 한 번 주면 너도 구해 준대? 부녀가 쌍으로 길거리에 나앉아 봐야 정신을 차릴래?”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나서 사람을 괴롭혀! 네가 길드장의 딸이면 다야!”
“어쭈! 안 되겠다, 넌 좀 맞자. 요새 안 팼더니 주제를 모르고 기어올라!”
“나도 그냥은 안 당해!”
민서연은 괴로웠다. 이런 꼴 당하려고 아카데미에 오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조예정을 만나서 2년 내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아빠는 자기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매번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싸우려고 하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2년 내내 그녀에게 받은 고통이 정신과 육체를 지배했다. 내가 원래 이런 병신인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죽고 싶었다.
“더러운 잡년이 착한 딸인 척 위선을 떠니까, 네가 안 되는 거야.”
조예정은 민서연의 반항을 기대하지 않았다. 자기 아빠만 들먹이면 아무것도 못 하고 몸만 부르르! 떨었었다. 그 꼴이 우스웠고, 재수 없이 착한 척하는 꼴도 보기 싫었다.
물론, 얼굴이나 상처가 남는 곳을 때리진 않는다. 티가 나서 문제가 될 여지를 남길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영화나 TV만 봐도 알 수 있는 지식이었다.
조예정은 보이지 않는 곳, 특히 배를 노렸다. 잘못 맞아서 애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노예 년의 아빠가 그 꼴을 봐야 하는데. 부녀가 절망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어차피 안 되는 년은 안…… 어?”
쫘아아악!
순간 별이 번쩍였던 조예정은 믿지 못하는 눈으로 민서연을 보았다.
이게 뭐야?
설마 맞은 거야, 나!
이 노예 년이!
감히 자신에게 대든 것도 부족해서 싸대기를 날려! 어이가 없어서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되었다.
“너 미쳤…… 까악!”
빠아아악!
왼뺨에 주먹이 날아왔다. 제대로 대응을 했다면 모를까? 반항을 예상하지 못했던 조예정은 또다시 맞고 말았다. 이번에는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고개가 팩! 하고 돌아갔고, 몸까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씨발, 죽여 버릴 거야!”
당황한 것도 잠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조예정이 민서연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바람 소리가 날 만큼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