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의협단(1)
오후 6시, 무진이 아카데미에서 돌아왔다.
김석천 사원이 소파에 앉아서 넋 나간 채 tv를 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리모컨을 눌러 댔다. 리모컨이 나이고, 내가 리모컨인 몰아일체의 상태. 고달픈 현대인의 어쩔 수 없는 비애였다.
무진은 냉장고에서 주전부리와 맥주를 내왔다. 아카데미 끝나고 마시는 이 한 잔의 차가운 맥주가 정말 좋다.
캬아아!
이게 바로 생도의 낭만인가.
“요즘 tv가 볼 게 없죠. 이러고선 시청료를 받는 건 죄악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안 내고 싶네요.”
“……뭔 소리냐?”
“재미가 없다고요. 막장만 나오고, 이러고서 연봉 올려 달란 건 도둑놈 심보죠.”
“누가 도둑님인지 모르겠구나.”
따지고 보면 이놈이야말로 대국민 사기꾼이다. 대체 누굴 보호하라고 한 건지 원! 대련을 상기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초절정의 극에 도달했더구나.”
“아버지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내공은 5갑자고.”
“천 년이 되려면 11갑자나 필요하네요.”
“철골지체를 완성했더군.”
“금강지체도 아니잖아요.”
“아이템을 대체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거야?”
“s급은 4개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자잘한 a급들이고.”
때릴까? 무작정 패고 싶어졌다. 이런 개소리를 어떻게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무심히 하느냐고? 지나치게 당당해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줄 착각할 뻔했다. 더 짜증 나는 현실은 이놈이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과잉보호!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는 거면 이해라도 하지. 이놈의 애새끼가 아버지를 위한답시고 초월자를 만들려는 건가? 과유불급도 정도가 있지, 과해도 너무 과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아비한테 투자한 것 몇 개만 빼도 길드 하나는 우습게 차릴 수 있었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이 그만큼 위험해요. 아버지 같은 일반인에겐 끔찍한 재앙이죠.”
“대체 일반인의 기준이 뭐냐?”
“심권을 쓰냐, 안 쓰냐 정도겠죠.”
“……?”
이 새끼가, 그럼 나도 일반인이냐?
자기랑, 권왕 빼고 죄다 일반인 될 팔자다. 일반인을 벗어나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 말을 하면 할수록 엿 먹는 기분이었다.
“하물며 아버지는 유능한 인력이잖아요. 인재는 항상 타깃이 되죠.”
“나를 길드장으로 뽑은 것도 꿍꿍이가 있었구나.”
“아니 뭔 그런 당연한 말씀을 하세요. 제가 할 일 없이 김 사원을 성운 그룹에 추천했겠어요? 그럴 거면 제주도에도 안 갔습니다.”
남의 목숨이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 생사가 걸렸다고, 이놈아!
“암중 세력보다 네가 더 무섭구나!”
“아군일 땐 누구보다 든든하지 않을까요?”
“……망할!”
아니라고 답할 자신이 없어졌다. 무진이 적이 됐을 때를 상기하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더욱이 이놈은 자신과 주변을 너무나 잘 알고 이용할 줄 알았다. 한계를 모르는 괴물 같은 놈이 자만하지도 않는다. 다만, 세상을 너무 자기 기준으로만 봐서 주변인을 자괴감에 빠지게 했다.
잘난 체가 끝나자, 무진은 겸손을 드러냈다.
“전투 경험과 임기응변이 부족한 아버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두 번 부족했다가는 제명에 못 살 듯싶구나!”
“대련과 실전은 다르잖아요.”
“네놈이 한 짓을 생각해 보거라!”
실전 경험이 없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련을 해 본 결과 실전이든, 아니든 이놈의 아비는 최적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지간한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그러면서 걱정이 된다니,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집 밖이 그 정도로 위험하면 외출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저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김 사원에게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일단 뒷배가 없다고 여긴 김 사원에게 성운 그룹이라는 배후가 생깁니다. 차후에 노릴 수도 있겠지만, 성운 그룹이 야심차게 준비한 길드의 길드장인 이상 대놓고 건드리진 못할 테니까요.”
“나를 위한 일이다?”
“놈들이 노린 건 김 사원만이 아니거든요.”
혼자 있다 다구리당하지 말고, 우리 편으로 들어오라는 무진표 핵우산이었다. 물론, 도와줄 때까진 스스로 버틸 능력이 있어야 했다. 세상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무조건 도와주기엔 조직력과 규모가 완벽하진 않았다. 사람 몸은 하나고, 선택해야 한다면 무진의 우선순위에 김 사원은 없었다.
‘젠장, 꼬일 대로 꼬였구나!’
투귀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체감했다. 자신만이면 모르겠으나, 제자들이 남아 있었다. 평생 숨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체조차 불확실한 암중 세력을 홀로 도모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이 녀석의 손안에서 놀아나야 할 팔자였다.
왜 안심이 되고 지랄인지, 원!
‘완전히 코가 꿰였구나!’
투귀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사람을 사로잡는 과정이 실로 놀라웠다. 힘만으로 강압했다면 죽더라도 끝까지 싸웠을 텐데,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왔다. 이런 걸 열일곱 살 생도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이놈은 날 때부터 종을 초월한 괴물이 분명했다.
“그러니 일주일에 한 번씩 사전 점검을 하겠습니다.”
“내가 북어도 아니고, 일주일마다 패겠다고?”
“다 김 사원을 위한 복리후생입니다.”
“그딴 후생 필요 없다!”
“심권을 쓰고 싶지 않으세요? 제 사부님을 아실 텐데요.”
이런 무지막지한 약장수를 봤나?
이러면 안 할 수가 없잖아!
보면 볼수록 무서운 놈이 아닐 수 없다.
***
“이 새끼가, 방학 동안 돈도 안 벌고 뭘 한 거야?”
“우리 말이 우스워!”
4명의 생도가 한 생도를 사각지대로 끌고 가 벽으로 민 후 윽박지르고 있었다. 겁에 질린 생도는 고개를 숙인 채 두려움에 떨었다.
“일할 시간이 없었어! 미안해, 다음에 준비할게!”
“얼레, 안 본 사이 몸 좀 좋아졌다. 이거 혹시 우리 패려고 몰래 훈련하는 거 아냐?”
“아냐, 그런 거. 집에 일이 있었어!”
“시끄러워, 누가 변명하래! 우리가 그러라고 했냐? 이상한데. 이상할 땐 맞아야지.”
“미안해, 제발…… 흐억!”
대역죄를 지은 사람처럼 생도는 살려 달라고 매달렸지만, 넷은 지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짓밟았다. 생도는 동네북이 되어 반격은커녕 웅크리며 몸을 피하기만 했다.
“씨발, 꿈틀거리는 게 굼벵이 같네! 크크크크!”
“야, 그건 굼벵이한테 모욕이야. 이 새끼는 구를 줄도 몰라!”
“어디 굴러 봐라! 넌 자존심도 없냐!”
“혹시 모르지, 어느 날 갑자기 이계라도 갔다가 올지!”
“헉, 그럼 이놈을 잘 모셔야 하는 거 아냐? 어이구, 이세계 용사님을 몰라봤습니다!”
생도들에게 비웃음을 사며 짓밟히는 장구용은 이세계 용사가 되는 꿈도 꾸었었다. 한순간에 달라져 지금까지 당한 모든 설움을 돌려주고 싶었다.
‘왜 나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각성하여 아카데미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그때는 세상을 다 가진 줄 알았다. 현실은 꿈과 달랐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표적이 되어 2년 동안 지옥처럼 살았다. 방학이 되어 겨우 벗어나나 싶었지만, 개학날부터 시작된 폭력에 2년의 재탕이 되었다.
‘난 왜 이 모양이냐고, 싸워 줘!’
제대로 싸워 보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이놈들만 보면 몸이 굳었다. 수업 시간에는 진도를 따라갔지만, 막상 싸우려고 하면 두려움에 굴복했다. 몸이 말을 듣지를 않고, 정신은 멍해져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거지같은 현실과 무력한 자신이 너무 싫었다.
“이 새끼는 진짜 자존심이 없나 봐.”
“그래도 동생은 제법 예쁘잖아.”
“호오, 이번에 아카데미에 들어온다고 하지 않나, 그 전에 우리가 시식 겸 실력 좀 봐 줄까?”
“그러자, 이런 기회는 흔치 않지. 씨발, 이 맛을 보면 그년도 애걸복걸하게 될걸.”
생도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저급하고, 더러운 말을 서슴없이 해 대고 있었다. 어른들이 봤다면 경기를 일으킬 만하다. 한데, 요즘 생도들이 다 그렇다. 아무것도 모르는 예전의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큰코다친다. 내 아이는 아닐 거란 확신은 금물이다. 오히려 내 아이가 더할지도 모른다.
‘……개새끼들! 씨발 놈들! 죽일 거야! 다 죽일 거라고!’
장구용에게도 지켜야 할 하나는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여동생이었다. 하나뿐인 동생이 이런 개새끼들한테 짓밟힐 걸 상기하자 정신이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나도 깡패가 될 수 있다고!
“얼레, 개기고 있네! 왜, 우리가 네 동생 좀 먹으면 안 되냐?”
“같이 좀 먹자고, 너만 먹으려고? 이 이기적인 새끼야!”
노려봤던 장구용은 더 잔인하게 짓밟혔다. 반항을 해 보지만, 분노만으로 넘어서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순위도 이놈들이 더 높았고, 실력으론 안 되었다.
다만, 장구용의 눈빛이 어둠으로 점점 물들어 가고 있었다.
‘도와줘, 제발 누구라도 도와줘!’
매번 외쳤다. 교관에게도 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놈들은 영악하게도 보이는 장소에서는 건드리지 않았다. 교관의 눈에서 벗어나면 용의주도하게 괴롭혔다. 말을 하면 더욱 잔인하게 괴롭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내일 저녁 우리 아지트로 데리고 와. 안 그럼, 너네 집까지 찾아간다.”
“대답 안 해, 씨발 놈아!”
“얼씨구, 꼴에 오빠라 이거냐?”
“어차피 싸구려 창녀나 될 거, 경험도 쌓고, 돈도 벌고 좋잖아.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중딩도 용돈이 필요하다고. 크크크크!”
장구용은 더는 참을 수도, 들어 줄 수도 없었다. 차라리 이 세상 모든 걸 부숴 버리고 싶었다. 자신을 구박하는 이놈들도, 이렇게 만든 세상도!
그때였다.
“동작 그만.”
……?
여기가 군댄가?
군대가 없어진 지가 언젠데, 저딴 소리를 하느냐고. 사각지대였기에 교관인 줄 알고 이명진, 고주진, 천용만, 백설운은 살짝 놀라긴 했다.
패도 조용히, 들키지 않게 패는 선수답지 못한 패착이었다. 자신들은 멍청하게 들킬 것 같은 짓을 하지 않았다. 우린 아카데미를 즐기고, 사회에 나가 헌터로서 인정을 받을 인재들이었다. 멍청한 새끼는 사회에서도 멍청하겠지만.
“허, 씨발, 들킨 줄 알았네.”
“너 뭐야? 얼씨구, 1학년이잖아!”
“선배한테 반말한 거냐?”
“요즘 1학년은 왜 이렇게 개념이 없냐,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한 살 차이가 이렇게나 무섭다. 꼰대는 어느 세대에나 적용이 되는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나이나 직위가 위면 꼰대 짓을 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멀쩡한 사람도 완장을 차면 미친놈이 된다고 했는데, 옛말 틀리지 않았다.
“뒤지고 싶지 않으면 봐줄 때 그냥 가라.”
“일단 맞자.”
“뭐? 이 새끼가 돌았나? 죽고 싶어!”
“너희들 말대로 난 개념이 없거든.”
“이 씨발 놈이, 죽엿!”
1학년 생도 마크를 봤으니 3학년으로선 절대 질 수 없었다. 이건 체면과 가오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신중히 움직였다. 넷인데도 겁도 없이 시비를 거는 걸 봐선 보통 놈이 아니기에 다구리를 치기로 했다. 그 정도의 감각은 가지고 있었다.
퍽, 퍽, 퍽, 퍽!
크악, 커억, 허억, 흐악!
달려들던 그대로 넷은 사이좋게 한 방씩 맞고 나가떨어졌다. 다시 일어서려고 해도, 맞은 부위에서 전해지는 충격이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로서의 존심이 육신을 일으켜 세웠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광경이었다.
“어디서 좀 놀았냐?”
“어, 이 새끼? 강무진이잖아!”
“1학년 주제에 잘나간다고 선후배도 없어졌냐!”
“씨발, 공주님 발바닥이나 핥을 것이지, 왜 상관도 없는 일에 지랄이야!”
상대가 1학년이긴 해도 강무진이었다. 권왕가와 관련이 있기에 양아치 생도들도 조금 머뭇거렸다. 그들도 보는 눈이 있고, 주변의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있었다.
막 건드려도 탈이 없는지를 수차례 확인을 하고서 선을 넘었다. 바로 장구용처럼, 자기 동생까지 희롱하는데도 아무것도 못 하는 병신을 노린 것이다.
하나, 상대는 1학년 생도를 대표하는 녀석 중 하나였다. 뒤탈이 날 짓은 가급적 하지 않았다. 다만, 선배로서의 가오가 뇌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름 이성적으로 행동해도, 존심이 물러섬을 막아섰다.
“1학년한테 맞고도 입으로만 나불거리네. 간디도 아니고 이렇게나 관대한 선배들이었나? 잘하면 왼쪽 뺨도 내밀겠어.”
“너 이 새끼, 개 같은 짓도 정도가 있어!”
“그래서 너희들은 정도를 지켰고? 언제부터 양아치 새끼들이 주둥이로만 짖었지?”
“네가 강한 건 알지만, 혼자서 우릴 이길 것 같아! 좀 전에 조금 이득을 챙겼다고 다가 아냐!”
그들은 기습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실력에 크게 차이가 난다고 보지 않는다. 넷이 함께 스킬과 속성을 꺼내 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난 혼자라고 안 했는데.”
“흥, 주변에 아무도 없는…… 응?”
언제부터였을까? 넷은 포위가 되어 있었다. 다들 흉흉한 기운을 뿜으며 살기를 드러냈다. 고유리, 구동성을 필두로 한 10명의 1학년 생도들이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목격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1학년 새끼들이 겁도 없이!”
“이건 하극상이야,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우리 뒤에 누가 있는 줄 알고!”
“씨발, 적당히 해라!”
하도 기운이 흉흉해서 3학년 양아치는 기세에서 밀렸다. 양아치의 근본답게 쫄리지 않으려고 악을 쓰지만, 되레 공허하게 들렸다. 10명의 생도가 철벽같은 포위 진형을 유지하며 점차 거리를 좁히자 마른침을 삼켰다.
“……잠깐! 이건 집단 린치 폭력이라고?”
“괜찮아, 너희들이 한 짓 영상에 담았으니까. 보고 있기 굉장히 역했거든.”
모든 일은 증거가 있어야 했다. 증거 없이 정의로운 일을 해 봤자, 발뺌하면 그만이었다.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기억하고, 불리한 증거는 외면하기 마련이다.
“폭력에는 폭력이지.”
말로 훈육을 한다? 그렇게만 되면 오죽 좋겠냐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폭력에는 더욱 강력한 폭력이 정답이었다. 학폭 무서운 줄 알아야, 학폭을 하지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