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개학(4)
김삼진은 사부님의 파격적인 변화에 말문이 막혔다. 대체 무엇이 사부님을 저리 변하게 했을까? 그도 답은 알고 있었다. 확실히 충격을 받을 만하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평생 알고 지낸 사부님이 다른 사람 같았다.
“창공마검이 약한 건가?”
“약하기는, 10대 용병이라고!”
“그런데 저게 뭐야? 마치 한 단계는 차이가 나잖아.”
“창공마검이면 후작급 초반은 되지 않나?”
“그렇다면 길드장님는 대체 뭐 하시던 분일까?”
“김석천…… 아! 투귀잖아!”
전대 10대 프리랜서 용병.
수십 년째 활동하지 않아서 그 자리를 다른 용병이 차지했지만, 투귀를 아는 사람이라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잊히기에는 그가 쌓은 과업이 엄청났다. 특히 권왕과의 사투는 여전히 회자가 되었다.
대강 따지고 보면 창공마검은 투귀의 직속 후배였다. 후배가 버릇없이 행동하자, 선배가 따끔하게 충고하는 광경이 되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투귀가 다시 돌아왔어!”
“말조심해라. 우리 길드장님이시다!”
“이러면 대형 길드도 우릴 무시하지 못하겠지!”
“투귀를 알면 당연히 못 하지!”
다시 돌아온 투귀의 역량은 과거보다 월등히 강해진 것 같았다. 같은 10대 용병인데도 역량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어른이 아이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하하하하하, 실로 대단하구나. 강 이사, 정말로 큰일을 했어!”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 운이라면 나도 좀 받고 싶구먼.”
“휴가를 주시면 됩니다.”
“휴가?”
“제주도에서 만났거든요.”
못마땅해하던 진 회장은 김석천의 정체가 투귀란 사실을 알게 되자 활짝 피었다. 저만한 명성을 가진 각성자를 데리고 오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공작급 헌터가 필요했는데, 훌륭한 인재를 스카우트했다.
“남 실장, 이거 우리도 분발해야겠는걸.”
“……송구합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더 좋은 인재를 데려오겠습니다.”
“사람이라면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게. 자네라면 분명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 게야.”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남 실장은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속은 그 어느 때보다 끓고 있었다. 그 앞에서 별거 아니라는 듯 겸양을 떠는 강 이사에 대한 분노였다.
‘정말로 귀찮군.’
진 회장의 전폭적인 신뢰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그저 조금 뛰어난 인물인 줄 알았는데, 사사건건 방해가 되었다.
“회장님, 제 아들이 태수 군과 아카데미에서 일을 하나 하는데 그룹과 연계를 하면 어떠신지?”
“그게 대체 무엇인가?”
“건전한 아카데미를 만드는 일입니다.”
“하하, 그런 건 원래 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누구도 주도적으로 나서진 않았지요.”
“나쁘진 않군. 계획서를 제출해 보게.”
“알겠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돈도 안 되는 일에 나서지 말라고 할 진 회장이지만, 산하가 해 놓은 빌드업이 있기에 마냥 무시하진 않았다.
“오늘 같은 날 회식이라도 같이해야 할 텐데, 선약이 있어서 안타깝군.”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길드장과 함께 식사라도 하게. 단, 자네 아들은 부르면 안 되네.”
“아무렴요.”
진 회장은 투귀를 성운 길드의 길드장으로 낙점했다. 잠적한 지 오래되어 명성이 바래지긴 했어도, 자리야 다시 찾으면 그만이었다. 실력을 보니, 그룹에서 조금만 밀어주면 되었다.
산하는 회장이 준 회식비를 길드원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상은 돈 앞에서 인심이 나는 법이고, 보는 앞에서 줄수록 효과가 컸다.
회장이 자신을 밀어준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데도 탁월할 테고. 누가 실세인지 이제는 알게 됐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내 돈을 나눠 주지 않아서 마음이 든든하다.
길드원들과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기로 했다. 투귀와 김삼진을 데리고 고가의 오마카세 집에서 술과 음식을 먹은 후 돌아가는 중이다. 김삼진은 의외로 술을 하지 않아서 운전을 대신 해 주었다.
산하는 투귀와 아재다운 대화를 이어 갔다.
정치 아니면 스포츠로.
“나는 일본을 좋아하지 않네. 그놈들이 한 짓을 생각해 보게.”
“전범국이긴 해도 음식 가지고 국가를 나눌 필요는 없지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 노랜 거의 다 일본 겁니다.”
표절이 아니라 레퍼런스라고 주장하지만, 창작의 고통으로 포장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표절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다르긴 하나, 현시점에 와서도 꾸준히 오르락내리락한다면 문제가 있었다.
현실은 걸려도 벌금을 내는 것도 아니고, 판별이 어려우니 일단 성공하고 보자는 주의였다. 그러면서 일본 제품 불매를 외치는 걸 보면 일관성이 없다.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도중에 자기 취향대로 선택적으로 하지 말고.
“그렇다 해도 놈들이 벌인 만행은 용서할 수 없지. 지금도 반성조차 하지 않는 걸 보면 말이야.”
“그건 맞습니다. 반성이 있어야 용서도 있는 거죠.”
산하는 그쯤에서 마무리했다. 이런 정치적인 논쟁을 해 봤자 평행선만 유지될 뿐, 끝이 나지 않는다. 결국, 감정이 상해 싸우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누가 맞고, 틀리다의 문제가 아닌 서로 존중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하는 정치에서 현실로 방향을 바꾸었다. 사회생활을 할수록 이런 쪽으로 잔기술만 늘어 씁쓸하긴 했다.
“팔꿈치, 목 뒤, 관자놀이, 옆구리는 명품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연환격은 대단했습니다.”
“……봤나?”
“스크린도 있고, 적당히 봤습니다.”
“눈이 좋군.”
투귀는 내심 다르게 봤다. 평범한 회사원이 그 속도를 눈으로 본다는 건 불가능하다. 단순 시력이 아닌 동체시력이 좋아야 했다. 이는 전문적인 수련을 하거나, 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속성 자체가 동체시력일 수도 있으나,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그 녀석을 낳은 씨앗의 발원지가 평범한 인간일 리 없지.’
호부 밑에 견자 없듯, 견자 위에 호부가 있진 않았다. 전부가 그렇다고 일반화할 순 없으나 유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일례로 조선 시대부터 과거를 본 선비의 후손은 머리가 좋은 축에 속했다. 물론, 머리가 좋다고 해서 선하다고 보면 곤란하다. 그 좋은 머리로 나쁜 짓을 더 잘할 수도 있으니까.
콩 심은 데 생태계 교란 대왕콩이 난 격이지만, 그 씨앗의 우수성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리 생각하니, 강 이사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러워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무공을 익혔나?”
“아들 녀석이 극성이라서 조금 익혔습니다. 공개적으로 보인 적은 없지만.”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보셨다면 다행이지만, 아들한테 매일 아직 멀었단 꾸사리만 듣고 있습니다.”
산하는 언제까지 수련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다. 어떤 분야든 끝은 존재하지 않으니 극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솔직히 지치긴 해.’
무공이 전문 분야도 아닌 데다.
이놈아, 아비는 회사원이라고!
부자간의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지만, 투귀는 산하의 무공이 일류 이상은 되리라 보았다. 자신이 간파하지 못한 건, 특수한 아이템을 착용했기 때문일 테고.
주변의 도움 없이 홀로 평사원에서 이사까지 올라간 경력을 상기하면 절정은 무리라고 봤다. 만약 절정급이라면 칠대 가문이나 대형 길드에 소속되지 평사원을 하진 않는다.
“실력 좀 보세.”
“집으로 가시죠.”
“집에서?”
“극성맞은 아들 녀석이 집에서도 쉬지 말라고 훈련장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흠, 그런 녀석이긴 하지.”
투귀는 산하의 무공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가드를 하려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어야 했다. 무작정 경호를 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른 대처가 필요한 법이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자.
야옹!
주인을 향해 반기는 반려동물…… 마수가 있었다. 크림이가 냅다 점프해서 산하의 품에 안겼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털을 부비부비하며, 꼬리를 흔들어 절대 충성을 맹세한다. 집 안의 실세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었다.
-요나.
요나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었다. 평소에는 집 안 거실의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는 편이다. 아들이 간간이 소환할 땐, 바람처럼 사라졌다.
허!
투귀와 김삼진은 정령과 마수가 집에서 뛰어노는 색다른 광경에 헛웃음이 나왔다. 주인이 이상하니, 마수도 이상했다. 서로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고 알려졌거늘. 기존의 상식을 깔끔하게 부숴 주었다.
본인은 상식을 주장하지만, 제일 상식적이지 않은 녀석이 무진이었다.
“여깁니다.”
“공간 확장인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렇구먼.”
운동장 같은 넓은 공간, 안락한 결계. 집에서도 대련과 훈련이 가능한 시설을 갖추어 초호화 타워팰리스 부럽지 않았다.
투귀조차 결계의 견고함과 복잡한 흐름에 혀를 내둘렀다. 이건 아무나 만들 수 없다는 걸 체감했다. 훈련장치곤 지나친 면이 있지만, 만약을 대비한 방공호기에 무진이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오냐.”
산하도 궁금하긴 했다. 매일 아들하고만 했더니, 정확히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아들은 말도 안 되는 먼치킨 끝판왕이라 가늠 자체가 불가능했다. 한계를 알아야 위치를 찾지, 망망대해에 떨어져서 좌표를 어떻게 찾아.
‘우선은 가볍게.’
산하는 내력을 일으켜 권격을 뻗었다.
슈웅!
꽈아아아앙!
내지른 동시에 폭발이 번지며 사방으로 내력이 발산되었다. 투귀에겐 거의 불의의 일격이었다. 산하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강해서 적당히 합을 맞춰 주려고 했다.
“권풍?”
“예, 권풍입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산하의 태도에 투귀는 자신이 한참 잘못 판단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었다. 사람 환장하게 하는.
대결이 이어질수록 투귀는 어이가 없어졌다.
“권강?”
“예, 권강입니다.”
“권환?”
“예, 권환입니다.”
대답은 잘하네!
투귀도 만만히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통하는지 긴가민가한 모습에 온실 속의 화초인 줄 알았다. 실력은 있어도 실전을 겪어 보지 않은 초보자의 범주로 보았었다. 웬걸, 전투 스킬이 굉장히 능숙했다. 천병류를 꺼내 들어 변수를 집어넣었음에도 대응과 동시에 반격을 가한다.
파파파파팟!
적당히 하긴 글렀다. 투귀도 전력을 끄집어내야 했다. 강기를 사용할 때부터 산하를 애송이로 볼 순 없었다.
‘이놈의 집안은 사람 놀래 주는 재미로 사나?’
산하는 다른 사람과는 처음 대련을 해 보기에 재미가 있었다. 아들과의 대련은 워낙 막막한 느낌이라, 허공에 대고 삽질하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투귀는 실제로 싸우는 맛이 있었다. 이래서 무인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듯했다. 강함에 대한 집착 못지않게 승부욕이 생긴다고나 할까.
‘티 안 나게 봐주시는구나.’
산하는 자만하진 않았다. 투귀의 길드 입사 지원서를 보면 내력이 있었다. 프리랜서 용병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과 대등하게 싸운다? 상식적이지 않았다. 누차 말하지만, 부자(父子)는 매우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흐음.
투귀는 편치 않았다. 대련이 길어지자, 이쯤에서 끝내려고 한 수를 보여 주었다.
한데, 너무 잘 막는다.
이것도 막아?
저것도 막고!
이러면?
또 막네!
왜 이렇게 잘 막아! 반격하는 타이밍이 늦어지기는 했어도 완벽한 대응이었다. 마치 몸이 알아서 자동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과찬일세.”
방어 능력 하나는 천하제일이었다. 간간이 나오는 반격기도 날카로웠고. 무엇보다 이 대결을 지속하는 연유는 내공의 우위에 있었다.
‘부자 사기단이구나!’
양파도 아니고, 까도 까도 계속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