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개학(3)
꾹!
진경애, 진경운, 진경산은 입을 닫은 채 대결장을 바라보았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기를 바라지 않았다.
실제로 아버지는 심사가 뒤틀리면 꽤 오래갔다. 또한, 뒤끝도 있어서 계열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지금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편이 나았다.
끙!
말실수가 되어 버린 진경수는 입맛이 썼다. 셋째에 대한 총애가 깊어지자, 만회를 해 보려고 했거늘.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난하게 셋째에게 회장 자리를 내어 줄 판이었다.
흠!
진 회장은 길드원의 평균적인 실력이 나쁘지 않음에도 심적으로 편치는 않았다. 자신과 남 실장이 뽑은 3명을 빼고, 전부 강 이사의 길드원에 패했다. 다만, 최상위 티어인 길드장을 뽑는 마지막 대결이 남았기에 선전하기를 바랐다.
‘보기보다 안목이 훨씬 뛰어나군.’
편치 않은 심경과는 별도로 강 이사에 대한 믿음은 전보다 더 짙어졌다. 이런 쪽으로 능력을 갖추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한편으로 그걸 알아보고 이사에 올린 자신의 안목을 칭찬했다.
‘암암, 내 눈은 정확하지. 틀릴 리가 없어.’
이제는 남 실장이 증명해 주어야 했다. 자신과 같이 뽑은 후보가 길드장이 되어야 체면치레라도 할 것이 아닌가. 동시에 남 실장에게 인력 수급의 전권을 준 걸 후회했다. 그간 잘해 왔기에 아무래도 너무 믿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도 길드장만 된다면야.’
강 이사가 선정한 길드원의 전체적인 실력이 뛰어나긴 해도, 길드장은 길드의 얼굴이었다. 다른 대형 길드와 자웅을 겨루려면 그에 걸맞은 실력과 명성이 필요했다.
진 회장은 강 이사를 불렀다.
명성과 별호가 속성을 증명하는 세상이었다. 누군지 아는 것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갔다.
“강 이사, 이번에 데려온 자는 누구인가? 그만한 실력은 있고?”
“이름은 김석천 길드원입니다. 실력은 직접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미리 말하면 김이 빠지지 않겠습니까?”
“이사가 되더니 능구렁이처럼 잘도 빠져나가는구나.”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입니다. 회장님이 회장님이신 것처럼요.”
“끄음, 이걸 보면 누가 그 완고했던 강 부장이라고 하겠나. 하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을 걸세. 그렇지 않나, 남 실장?”
“그렇습니다.”
남 실장은 정중히 대답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완고한 냉면(冷面)을 유지 중이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만 봐서는 알기 힘들었다. 다만, 그의 몸에 힘이 꽤 들어가고 있었다. 여태 회장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적이 없었기에 강 이사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귀찮게 하는군.’
남 실장으로선 처음 있는 오판이었다. 강 이사의 업무 능력은 높이 사지만, 각성자를 고르는 안목은 다른 문제였다. 대체 어떻게 특성 있는 자들만 골라내고 있는 건지? 어쩌면 관찰안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검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각성자가 아닌 건 아니니까.’
각성 스텟이 높지 않은 부류는 헌터가 되기보다는 일반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어 특이하진 않았다.
더욱이 강 이사는 성운 그룹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 왔다. 능력이 있음에도 이사가 되지 못했던 걸 상기하면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적성이 맞나 보군. 그래도 이번엔 쉽지 않을 거다.’
강 이사가 숨겨 놓은 비장의 수가 무엇이든, 남 실장도 만약을 위해서 실력자를 데리고 왔다.
창공마검(蒼空魔劍) 관유비.
칠대 가문이나 대형 길드에 들어가지 않은 각성자 중 10대 프리랜서에 꼽히는 인물이다. 5년 전 혜성처럼 등장하여 10대 프리랜서인 암기술의 달인 흑염룡 신호광을 쓰러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길드장 선출을 위한 마지막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김석천 길드원과 관유비 길드원은 대련장으로 올라오세요.
공식적인 대결이 아님에도 형식은 다 갖추었다. 회장이 지켜보는 자리다 보니 순서와 차례를 지켜야 했다.
이는 부대에 군단장이 왔을 때와 비슷하다. 일개 사병이 실수했다고 군단장이 부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갈구진 않는다. 그러나 간부들은 죽었다고 복창해야 했다.
그렇듯 일개 길드원을 회장이 나서서 갈구진 않아도, 위에서 쪼아 대면 아래는 피곤할 수밖에 없다.
젊은 사람들은 이를 꼰대 문화로 취급하겠으나, 형식을 마냥 무시해선 안 되었다. 격식이란, 태도와 마인드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시였다.
저벅, 저벅!
김석천이 먼저 대결장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 뒤 관유비가 대결장에 올라가 쓰고 있던 후드 로브를 벗어 던졌다.
휘릭!
체격의 대비는 크지 않았다. 김석천은 나이가 있어 왜소해 보이기는 하나, 관유비의 몸집도 호리호리한 편이며 키는 175cm에 지나지 않았다.
“기권하는 편이 나을 거다. 나는 노인이라고 어중간하게 손을 쓰지 않아.”
“나이도 어린 놈이 초면부터 반 토막이구나.”
“흥, 나이 따지는 놈치고 오래 사는 놈을 못 봤다.”
“가는 데 순서 없다. 이놈아.”
“먼저 가서 기다리게 해 주지.”
별호에 마(魔)가 들어가 있다는 것만으로 관유비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피를 봐야 끝나는, 손 속이 유독 독하기로 유명했다. 프리랜서 용병계에서 그를 경외시하는 연유였다. 속된 말로 같이 일하기는 피곤한데, 실력은 뛰어나서 외면하기 어려운 위인이다.
-시작하십시오.
스륵!
대결을 알리기가 무섭게 관유비가 움직였다.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새털처럼 가벼우면서도, 섬전과 같은 신형이었다. 바닥을 걷지 않고 저공으로 날아 일순 잔상을 완성했다.
“나를 잡아 보거라. 그것이 네놈에게 베푸는 처음이자 마지막 자비니…… 억!”
“잡았네.”
자비로 왔으니, 자비로 치료해라.
김석천의 손에 멱살이 딱 잡힌 관유비는 숨이 막혔다. 사로잡은 동시에 명치 부근의 거궐혈을 두들긴 것이다. 육신이 찰나간 마비가 되었다.
“느리네.”
누군가에는 삽시간이지만, 김석천에게는 넉넉한 시간이었다. 상대성이 이렇게나 잔인하다.
휘익, 꽝!
퍼어억!
관유비를 들어서 바닥으로 내리찍는다. 연결 동작으로 팔꿈치를 들어 명치를 내려찍었다.
커억, 부르르르!
털썩!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일수유였다.
두 눈 뻔히 떴음에도 진 회장과 수뇌부는 물론, 길드원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시작과 동시에 쉭쉭! 하더니 끝이 나 버렸으니 과정이 생략되었다. 수학 선생이 가장 싫어하는 답만 찍어서 맞힌 결말이었다.
헐!
뭐야?
가족을 죽인 범죄자를 용서한 주인공처럼 허무한 결말에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쨌든 관유비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이상 승패는 정해졌다.
“창공마검이 졌어?”
“이렇게 질 사람이 아닌데!”
“씨발, 김석천이 누구야?”
“함부로 말하지 마라, 길드장님이셔!”
“아, 이제 길드장님이시구나.”
프리랜서 인생들답게 의리는 개뿔! 반으로 갈렸던 파벌이 어느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승패 병가지상사를 들먹이기에는 이 한판의 대결로 잃을 게 많았다.
승자가 갈리자, 갈팡질팡했던 길드원이 강 이사의 파벌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론이긴 하다. 남은 길드원은 남 실장이 특별히 데리고 온 자들뿐이다. 다수결이 급격하게 기울었다.
“거보십시오! 강 이사의 안목이 대단하다니까요.”
“시끄럽다!”
제 말이 맞지 않느냐고 환호했던 진경수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입을 닫았다. 이번에도 타이밍이 맞지 않은 것이다. 내심 대통령의 명대사인 ‘왜 나만 가지고 그래.’라며 따지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가문의 장남인데, 울화가 치밀었다.
진 회장은 남 실장에게 화를 내진 않았다. 창공마검은 자신도 적극적으로 데려오라고 추천했었다. 그저 해 보지도 못하고 끝나서 아쉬울 따름이다.
대신, 강 이사를 칭찬했다.
“잘했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진 회장은 강 이사에게 넉넉한 성과급을 약속한 후, 자리를 파하려고 했다. 흥이 깨진 마당에 더 있어 봤자 구차해질 뿐이다. 이럴 때는 신속히 끝내는 편이 낫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업이나 도박이나 항상 아쉬움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패가망신의 지름길이 된다.
“잠깐! 다시 붙어!”
한편,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진 회장은 목소리의 진원지에 미간을 찌푸렸다.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든 했든 패배는 인정해야 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추한 짓을 하다니, 길드장이 되기에는 부족한 인품이다.
“그러자꾸나.”
반면 김석천이란 자는 어떤가.
귀찮을 법도 하건만, 패자의 요구를 두말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강 이사의 안목을 다시 보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그럴수록 남 실장은 계속 실망을 주고 있었다.
흠.
프리랜서 용병이었을 때와 달리 이제는 길드에 소속이 되어 있었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다. 차후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알아봤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남 실장도 난처하긴 매한가지였다.
‘대체 누구지?’
창공마검의 성향이 다혈질이긴 해도, 실력만큼은 누구나 인정했다. 그런 창공마검이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당했다면, 분명 명성이 있어야 할 텐데. 너무 빨리 끝나는 바람에 어떤 능력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마당이었다. 진 회장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구질구질하긴 해도, 승자가 받아 준 이상 대결은 속행해야 했다. 어쩌면 잘된 일이었다. 확실하게 승패를 갈라야, 더는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 테니 말이다.
화르르르!
관유비의 두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작금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이런 식의 패배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속임수를 썼겠다!’
어릴 때부터 천재로 불렸으며, 혼자서도 얼마든지 나라를 대표하는 검객으로 성장했다. 패배란, 버러지 같은 것들에게 주어지는 숙명이었다.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겠다!”
창공마검이란 별호를 얻게 해 준 속성 [비행]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허공을 제 마음대로 유영하는, 가벼운 운신은 [비행]을 통해 완성되었다.
“창공마영검의 극의를 보여 주마!”
“어, 그래.”
명백한 도발과는 달리 관유비는 창공마검세를 완성하지 못했다. 채 검로를 그리기도 전에 검병이 잡혔다. 손목을 내줬으니, 다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꽈득, 커억!
버티던 손목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고통을 만끽하기도 전, 어? 하는 순간 하늘과 바닥이 바뀌었다.
휘익, 뻐어억!
바닥으로 메치면서 뒷머리의 목을 발로 찼다. 평생 호스 끼고 살 수도 있는 위치였다. 다행히 목이 부러지거나, 척추가 꺾이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엎어졌을 뿐이다.
-……김석천 길드원 승!
이제는 인정하겠지, 지도 염치가 있으면.
그대로 끝나나 싶었으나, 정신을 차린 관유비가 다시 대결을 청했다. 보기보다 염치가 더 없었다. 추함의 극치를 보여 주자, 같이했던 길드원들마저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해!”
“그러자꾸나.”
이번에는 관자놀이였다.
맞는 순간 의식이 사라지면서 실 끊어진 허수아비처럼 바닥에 고꾸라졌다.
‘재밌구나.’
이 맛! 당해 본 사람만 안다.
김석천도 그놈한테 말도 못 하게 당하고 난 후,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울화가 쌓여 있었다. 알고 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관유비의 구질구질함이 김석천에겐 불감청고소원이었다.
삼세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봐줬다.
이젠 맘대로 패도 되겠지.
예전의 김석천이라면 상상도 못 할 전개였다. 그는 싸움을 좋아하지, 폭력을 즐기지는 않았다. 무진을 만나면서 성향도 달라진 것이다. 안에서 새는 마조는, 밖에서도 샌다고.
퍼퍼퍼퍼퍼퍼퍼퍽!
지금을 위해 일부러 단숨에 끝을 냈다. 이놈의 눈빛을 보면 패배를 겪어 보지 못한 놈들의 전형이었다.
무진을 만나기 전 자신의 눈깔처럼.
‘내가 네놈의 글러 먹은 성격을 쪽! 빼 주마!’
새하얀 세상이 되도록.
‘……사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