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개학(2)
생도 간의 대련이 끝난 후, 교장의 부름을 받았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불러서 건실한 생도로선 조금 의아하긴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교장이 커피를 타고 계셨다.
방학 동안 다이어트를 하셨는지 살이 빠지셨다. 나이가 들수록 혈당과 체중 관리가 중요하니 좋은 징조였다. 다만, 눈 밑에 고민이 많아 보이기는 했다.
“개학하기가 무섭게 사고를 쳤더구나.”
“가벼운 대련이었습니다.”
“두 번 가벼웠다가는 장의사부터 불러야겠구나.”
“싸우면서 정이 드는 법이죠.”
권왕가와 창황가의 대립이 보는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지 오래였다. 정이 들기는커녕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 와중 가문의 영약을 홀라당 처먹었으니, 눈이 돌아가는 것도 당연했다.
“교관이란 자가 너무 고지식해.”
“구태의연한 면이 없지 않아 있으세요.”
“알면 좀 적당히 했어야지.”
“겉만 다친 거지, 내부는 이상이 없잖아요.”
“잘도 골병들지 않게 팼더구나.”
공식적인 대련은 아니더라도, 교관의 참관이 이루어진 이상 법적으로 생도가 책임질 일은 없었다. 물론, 정해진 원칙을 어기거나, 살상 병기를 썼다면 다른 얘기였다.
“이제 겨우 1갑자 반이네요. 하아아.”
“영약을 대체 얼마나 처먹었으면 1갑자가 넘어?”
“별거 있나요, 남들 먹는 만큼 먹었죠.”
“아주 매를 버는구나.”
무진의 형편없는 마나흡수력을 알기에 교장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많은 영약을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했다면 상급 생도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했을 텐데.
‘이 녀석의 자질도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실제로 나쁘기는커녕 고학년도 이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역량이었다. 그동안 부족하다고 여겼던 부분을 채웠으니, 등에 날개를 달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또 얼마나 설치고 다닐는지!’
부족한 부분이 있을 때도, 아카데미의 역사에 획을 긋는 짓을 대놓고 벌였다. 그런 녀석이 이젠 부족한 부분도 희석되었으니, 교장으로서 고생길이 훤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신 거죠?”
“몰라서 묻는 게냐?”
“보통 알고서 묻지는 않죠.”
“말꼬리 잡지 말고, 정녕 모르느냐?”
“몰라요.”
보통 어른이 강하게 추궁하면 주눅이 들거나, 눈치를 보게 된다. 하지만 이 녀석은 당당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처음 본 사람이면 정말로 모르는 줄 알겠지만, 그간 당한 기억들이 많았다.
하아아!
교장은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이 순순히 대답해 주리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괜히 그걸 핑계로 더 뜯어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교장이 말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생도의 신분을 망각했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네가 만든 단체 말이야.”
“아, 마조군단이요.”
“이름을 왜 그따위로 지은 게냐?”
“주변에서 그리 부르기에 편의상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실력이 중요하지,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이놈이!
왜 맞는 소리를!
이름만 거창하고 실속은 없는 쭉정이가 태반이다. 보통 이 나이 때는 속에 바람이 들어서 휘황찬란한 듣도 보도 못한 어휘력을 발휘하거늘. 그런 낭만도 없이 귀찮아서 무미건조하게 대충 지어 버렸다. 그러니 몰랐다는 말도 이제는 납득이 간다. 이름 따윈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름 좀 바꿔라.”
“염두에 두신 이름이라도 있으신가요?”
“내 이름을 팔 생각이냐?”
“아카데미에선 상징성이 있잖아요.”
이건 의도하고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짧은 순간 가장 필요한 말을 하고 있었다. 어린 녀석이 인풋 아웃풋이 엄청나게 빨랐다. 그 짧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팔 생각을 하다니, 정말 보통 영악한 녀석이 아니다.
‘그렇다고 바꾸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애초에 영향력이라도 없으면 무시하고 지나가면 그만이었다. 한데, 1학년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생도가 마조군단에 들어갔다. 아카데미 내에서만 그러면 상관없는데, 생도들이 돌아가서 부모님에게 말하는 바람에 망신이었다.
‘이놈 봐라, 네가 갑이라 이거냐?’
마조군단의 영향력은 갈수록 강해질 수밖에 없다. 파벌의 중심축인 무진도 그렇고, 지수를 비롯한 수뇌부의 역량과 단원의 결집력이 다른 어떤 파벌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3학년의 중심 파벌 중 하나인 성운과 협력 관계였다. 성운이 3학년에서 가장 강력한 파벌은 아니더라도, 성운 그룹이 배후에 있었다. 사회적인 영향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질 것이다.
“마조군단이란 이름으로 인해 손해를 입을 수도 있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참 비싸게도 구는구나.”
“그냥 이름 하나 지어 달라니까요. 왜 자꾸 말을 빙빙 돌려요.”
“내 이름을 파니까 그렇지!”
“교장 선생님의 위명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교장이 생도를 편애한다는 소문이 날 수 있었다. 한 생도에게 두 번이나 보고를 열어 주면서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하지만 마조군단을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의협단으로 하자꾸나.”
“고리타분하지만, 좋은 이름이네요.”
레트로가 대세인 만큼, 고전 무림 컨셉의 협객도 나쁘진 않았다. 교장도 밀어주겠다, 단체의 기반이 착착! 진행되어 간다.
차후 단(團)을 넘어 맹(盟)이 된다면 성운맹으로 승격하여 초대 무림맹주로 태수 선배를 추대할 계획이다. 당장은 단의 강령을 만들고, 단주를 비롯해서 조를 나누어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했다.
‘얼렁뚱땅 만들었지만, 잘되면 그만이지.’
의도를 가지고 마조군단을 조직하진 않았다. 그저 적당히 견제할 만한 파벌을 구성하려고 했던 것인데, 효과가 너무 좋았을 뿐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좋다면 만사오케이였다.
누군가는 과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화룡점정의 연유는 명확했다. 1등만 중시한다고 욕해 봤자, 2등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너무 요란만 떨지 말거라.”
“누차 말하지만, 저는 피해잡니다.”
교장은 앓는 소리를 속으로 냈다. 도무지 갱생이 안 되는 녀석이다. 그렇다고 나무라기에는 맞는 말을 하고 있었다.
“모난 돌은 정을 맞기 마련이다.”
“의협단에 누를 끼칠 순 없지요.”
***
‘망할 놈, 죽지도 않고 더 강해져서 돌아왔구나!’
방학 기간에도 환술을 연구했는지, 오자마자 남의 아까운 절기를 알맹이만 쏙쏙 빼먹고 있었다.
개학 첫날의 국롤도 위반하고,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냐고!
생도면 생도답게 좀 행동해야지!
환천비기의 환몽까지 빼앗긴다면, 자신도 닿지 못했던 환술의 극의 환세(幻世)만 남았다. 환세는 자기만의 세상을 구현하는 경지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환천비기의 초월경이었다.
‘알려 줘, 말아?’
어차피 안다고 해서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다. 제아무리 날고뛰는 놈이라도, 환세를 완성하진 못할 것이다. 환세를 빌미로 정신을 현혹한다면 효과적이긴 했다.
‘그새 약점을 극복하다니.’
빈틈이었던 내력흡수율을 질과 양으로 때려 박아 해결했다. 내력으론 견줄 생도가 고학년에서도 손가락에 꼽혔다.
‘3갑자를 못 넘겨서 다행인 건가?’
누군 평생 보지도 못할 만년삼왕과 대환단을 비롯한 각종 영약을 밥 먹듯이 처먹었다고 알려졌다. 저 중 하나면 먹어도 흡수율이 좋은 인재는 3갑자에 도달할 수도 있었다.
무공의 경지에서 3갑자는 상징성이 있었다. 3갑자는 되어야 강기를 의지대로 쓸 수 있어서다. 문제는 강기를 쓰는 이상 최소 초절정에 올랐다는 뜻이고, 이때부턴 환술이 잘 먹히지 않는다. 내력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정기신이 균형을 이루어야 강기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술은 정신의 균열을 흔들어서 원하는 대로 유인하는 수법이었다. 정기신이 굳건하다면 파고들기가 여의치 않았다. 환력의 소모도 상대적으로 크고. 정신방어에 막히기라도 하는 날엔 역으로 막대한 충격을 입는다.
‘설마 또 영약을 처먹진 않겠지?’
비집고 들어갈 틈과는 별개로 경시하진 않았다. 내력과 속성을 제외하면 천재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녀석이다. 더욱이 주변에 포진한 생도들도 특별했다. 어쭙잖게 유인했다가는 의도만 노출하게 된다.
‘권왕이 이 정도로 놈을 밀어줄 줄이야!’
내력흡수율은 무인의 성장 가능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였다. 극악의 흡수율을 보인 이상, 적당히 손녀의 방패막이로 쓸 줄 알았다. 웬걸,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권왕의 무식한 성향처럼, 영약을 때려 박았다.
그래! 권왕은 원래 그런 무식한 놈이니까 그렇다 치자고, 권왕가를 지탱하는 가주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달리 보면 권왕이 그놈을 제자 이상으로 아끼는 것이다.
‘혼외자?’
얼굴은 몰라도, 몸은 정직했다. 일반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규격과 창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철근 같은 근육만 봐도 부전자전이었다. 충분히 의심이 간다. 자기 자식도 아닌데, 영약을 퍼부을 무인은 많지 않았다.
‘어쩌면 이쪽이 정답일지도 모르겠군.’
권왕의 혼외 자식이 맞는다면 권왕가를 흔들어 볼 여지가 생긴다. 일전의 실패를 만회하고, 불안한 입지를 바로 세울 기회였다. 설령 자식이 아니더라도, 제자를 그토록 애지중지한다면 어느 쪽이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권왕을 정상적인 범주로 예단하진 않았다.
‘당장은 어렵겠지.’
그리드6이 죽으면서 외부 지원이 끊어진 상태였다. 아카데미 내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인원만으로 해결해야 한다. 상부에 손을 내밀기에는 새로운 주인이 너무나 무섭다. 지금까지의 실패는 덮어 둔다 쳐도, 최소한 흠은 잡히지 말아야 했다.
‘성과가 필요해.’
그러려면 기존에 뿌려 놓은 작물을 수확하는 수밖에. 교장의 암검이 활동하는 바람에 시간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조만간 수확물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당분간은 괜찮겠지.’
재물로 시간을 번 후, 놈을 포획할 작전을 짜야 했다. 본 교관이 직접 나서는 이상,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때까진 최고의 스승이 되어 주마.
***
성운 그룹 산하 길드 지하 대련장.
초기 길드원으로 모집한 인원이 임시로 사용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대련장이 구식이기는 해도, 시설적인 문제는 없었다. 새로 신설될 건물은 현재 검단 신도시에 지어지고 있었다.
대단지 아파트 규모의 대지를 매입했기에 지어질 건물의 규모가 상당했다. 진 회장이 길드 창설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진 회장과 그룹의 수뇌부가 대련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귀빈석에 앉아 있었다.
모집한 길드원은 50명으로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개개인의 능력은 검증이 된 상태였다. 기본적으로 자작급 이상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상위의 티어는 백작급에 이른 길드원도 포섭했다.
우우웅!
막 길드를 조직한 상태라 어수선하긴 해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반으로 갈린 채 투기를 발산했다.
많지 않은 인원에서도 두 패로 갈려서 파벌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거 보면 우리나라만큼 파벌에 대한 종속이 심한 국가도 드물었다. 어디에든 소속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며, 떨어져 나가면 낙오자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이 중요했다.
성운 그룹의 진 회장과 사장단이 보는 자리다. 두 파벌로 나뉜 오늘, 성운 길드로서 통합을 이루어야 했다. 그러려면 성운 길드를 이끌어 갈 수장이 있어야 한다.
오늘이 바로 길드장을 뽑는 날이기에 양쪽의 신경전이 여느 때보다 날카로운 것이다.
두 패로 나뉜 까닭은 길드 창립의 실무를 감독하는 강 이사와 외부 인력의 수급을 맡은 남 실장의 경쟁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누가 더 능력 있는 사람을 데려왔는지, 안목을 평가하는 자리가 되었다.
“오랜만이군요, 남 실장의 타율이 저조한 날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실력이 없다기보단 상대가 나빴다고 봐야죠.”
그룹의 계열사를 가지고 있는 사장단은 진 회장의 핏줄들로 전자, 유통, 던전 가공, 건설, 항공 순서였다. 그중 성운 그룹에서 사활을 거는 던전 가공을 진경운이 맡았다.
진 회장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롯이 진태수의 아버지여서다. 셋째가 차기 회장으로 거론되면서 혈육 간의 신경전도 날카로웠다.
첫째인 진경수가 강 이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근래에 아버지의 관심을 받고 있기에 주목하고 있었다.
“강 이사의 안목이 남다르긴 하군요.”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결과를 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
진 회장의 거친 말투에 진경수는 고개를 숙였다. 강 이사를 총애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 듯해서 당혹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