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개학(1)
개학은 누구에게나 괴롭다.
학교나 아카데미나 마찬가지로 가고 싶은 장소와는 거리가 멀다. 졸업 증표를 받기 위한 불가항력의 의무였다. 군대처럼 자유가 박탈을 당하진 않았어도, 규칙과 규범 속에서 정해진 일정을 소화해야 하기에 개학을 좋아하는 생도는 없다.
개학이 다가올수록 생도들은 조바심이 날 테고, 남은 기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학이 끝난다.
후회를 해 봤자 개학은 시간의 흐름이다. 가기 싫다고 연기되는 경우는 희박하다. ss급 던전이 오픈되거나 중국발 전염병이 창궐하지 않고서는.
다만,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어떤 생도에게는 졸업을 위한 통과의례이고, 어떤 생도에게는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이고, 어떤 생도에겐 가고 싶지 않은 지옥이었다.
물론, 모두가 가고 싶지 않은 아카데미를 즐거운 놀이터이자, 배움의 장소로 보는 생도도 개중에 있었다. 실력을 뽐내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우두머리가 되고 싶은 생도들에게 아카데미는 성공을 위한 발판이었다.
단, 그런 생도는 전체의 1%도 많았다. 서글프게도 나머지 99%는 상위의 1%를 도드라지게 하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다들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줄 착각하다가 나이가 들수록 부속품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개학이다.
생도들은 반갑든, 반갑지 않든 급우와 만나게 된다. 새 학기가 아닌 중간 이후라 무리는 정해졌다. 친한 부류끼리 만나 파벌이 형성되었다. 그중 힘과 권력을 가진 파벌이 대세를 이룬다. 파벌에 들려는 생도와 낙오하는 생도에겐 가혹한 현실이다.
아카데미에서도 파벌의 조직과 낙오자에 대해서 사회적 문제로 인식은 하고 있었다. 차후 사회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으므로 될수록 파벌과 낙오자의 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하나,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만 잠깐 하는 척하지, 실제로는 훈계에 지나지 않았다.
말로만 때운다고 보면 된다.
그럼 생도들이 ‘예’ 하고 순순히 따를까? 어른들도 학창 시절을 돌이켜 봐야 했다. 자기들은 순순히 따랐는지.
사실 생도를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가혹한 체벌이다.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체벌만큼 효과적인 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이 왜 나왔을까? 인간도 동물에 지나지 않으며, 폭력은 통제의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폭력을 옹호하지 않는다. 세상은 바뀌었고, 체벌이나 폭력은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아카데미의 명성에도 치명타를 입힌다.
초창기 아카데미가 설립할 때만 해도 일정 수위의 폭력은 용인했으나, 자살하는 생도가 나오면서 원칙적으론 금지되었다.
현실적으론 교관을 비롯한 어른의 개입은 한계가 있었다. 생도들도 그것을 알기에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존재했다. 실제로 급우 간의 폭력 사태로 목숨을 잃거나, 대외적으로 비화가 되지 않는 한 조용히 넘어갔다.
학폭을 차단하기 위해서 아카데미도 노력은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결국에는 방치하다 사고가 터지면 뒷북을 쳤다.
개학 첫날은 새 학기나 다름이 없지만, 빡빡한 교관을 만나면 강도 높은 수업이 진행된다. 방학 동안 뇌에 낀 나태함과 방만함을 치유한다는 목적으로.
강도가 높든, 나태함을 치유하든 무진에게는 별 의미 없었다. 관건은 단물을 빼먹을 수 있는지였다. 1학기 수업 중 더는 배울 필요가 없는 과목을 빼고, 새롭게 배울 과목을 선정했다.
‘정령, 연금, 환술, 주술을 중심으로 해야겠다.’
마법은 발칸의 지식을 얻으면서 중복이었다. 하나, 던전 공략에 관한 필수 과목은 들어 놔야 하기에 효율적인 시간 배분이 필요했다. 아카데미의 졸업장을 따려면 6년간 이수해야 할 필수 과목의 총 시간이 있었다.
‘태수 선배와 마조군단의 협조도 필요하겠고.’
1학년에선 실세지만, 저학년은 권한이 많지 않았다. 성운을 창립해 파벌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태수 선배와 공조한다면 마조군단의 권한도 덩달아 올라가게 된다.
최소 3학년까지는 학생회의 역할을 맡게 되며, 고학년을 관리하는 파벌과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차후, 아카데미 전체를 관리하는 체계를 완성해야 했다.
타아앙!
부르르!
마조군단을 키울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무진은 현재 수업 중이었다. 철협십좌의 일좌, 마라창 정 교관의 실전 대련 수업이었다.
새 학기 때와 마찬가지로 정 교관은 첫날이라고 해서 방만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실전 대련을 통해서 방학 때 풀린 감각과 경쟁심을 벼려 주었다.
무진의 상대는 1학기에서 곤욕을 치르며, 성적상 감점을 받은 창황가의 정우민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욕을 먹고, 가문에서도 찬밥 신세로 전락해 인생이 가시밭길로 전환이 되었다.
나락의 원흉이 대전 상대였으니 전력을 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 교관도 인과관계를 알고 있기에 태연히 둘을 붙인 것이다. 맘에 맞는 경우에만 하면 좋겠으나 현실이 어디 그런가. 서로 안 맞아도 싸우다 보면 해결된다는, 구시대적인 마인드였다.
채채챙, 타아앙!
정우민은 필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방학 전에는 당했을지 몰라도, 그간의 절치부심한 창술을 보여 주려고 했었다. 한데, 여의치가 않았다. 놈의 제어권을 흔들기는커녕 권갑에 부딪힐 때마다 창대를 타고 들어오는 반진력에 되레 충격을 받았다. 어떤 식으로 창을 찔러 넣어도 권갑에 여지없이 막혔다.
‘빌어먹을 놈이!!’
정우민은 무진의 철벽같은 권공보다 무관심한 표정에 열이 받았다. 자신 따윈 이제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명백한 무시였다. 무진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방학 기간에 폐관수련을 했었다. 벽곡단을 철근처럼 씹어 먹으며 복수를 다짐했거늘.
휘리리릭!
폭풍보를 밟으며 빈틈을 만든 후, 천극창의 오의 파멸세를 사용했다. 이전에 펼쳤던 파멸세와 같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팔성에 도달한 파멸세에 전 내력을 실어 발출했다. 창극의 날카로움이 [절삭]에 의해서 더욱 예리하게 벼렸다.
‘죽엇!’
다른 건 몰라도 내력과 스피드에선 앞선다고 자신하는 정우민이었다. 약점을 보완하기보다는 장점을 극대화한 것이다. 오롯이 무진을 대적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했다.
꽈아아아아앙!
가볍지 않은 충돌의 여파에 생도들의 시선을 이끌었다. 범위가 고학년은 되어야 할 만큼 대단했다.
허억, 쿨럭!
대련장 투명 결계의 가장자리까지 속절없이 밀려난 정우민의 동공은 그 어느 때보다 흔들렸다. 전력을 기울인 절초였기에 쓰러뜨리진 못해도 충격은 줄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막은 것도 부족해 튕겨 내 버렸다. 창대에 남아 있는 내력은 그간 알고 있었던 범주를 넘어섰다.
방학 전만 해도 이 정도의 내력은 아니었다. 불과 두 달 남짓의 기간에 이만한 내력을 쌓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마나지체나 마나흡수력이 높았으면 이해라도 하지.
“어떻게?”
“대환단을 복용했거든.”
“대환단이라니? 대체 어디서?”
“어디긴, 너희 가문에 있던 건데.”
“……뭐?”
“잘 먹었어.”
정우민은 그제야 사태의 전말을 파악했다. 대결에서 이긴 권왕가가 본가에 대환단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내력이 증가한 인과를 파악하자 억장이 무너졌다.
‘나도 못 먹은 걸!’
대환단은 만년삼왕에 버금가는 희대의 영단이었다. sss급의 영약이라 가문에서도 특별히 관리했을 테고,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감추어 둔 대환단을 원수 같은 무진이 꿀꺽했단 사실에 정우민은 주화입마가 올 것 같았다.
빠드드득!
정우민은 치미는 울화를 참기 힘들었다. 대환단은 자신이 먹었어야 했다. 저놈의 공력은 내 것이었어야 했단 말이다. 왜 애먼 놈이 먹냐고! 차라리 권왕이나 지수가 먹었으면 그나마 덜 억울하지.
그런 와중 간의 기별도 안 간다는, 무진의 메소드 연기가 대박이었다.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화를 돋워 주었다.
“30년도 안 돼.”
“그걸 말이라고 해!”
평범한 무인이 복용했어도 최소 1갑자 이상의 효율은 나온다. 하물며 자질을 갖춘 무인이 복용했다면 2갑자는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뭐?
반 갑자!! 이런 개 같은 효용성!
죽 쒀서 개를 줬어도 이보다는 성능이 좋겠다. 정우민이 충분히 억울해할 일이었다. 비무대 주변에서 듣고 있던 생도들도 약이 오르는데, 당사자는 오죽하랴.
“저럴 거면 나를 주지!”
“나도 1갑자는 될 수 있다고!”
“저건 너무하는 거 아닌가?”
“영약이 대단하면 뭐 하냐고!”
2갑자를 허공으로 날리고, 반 갑자에 만족한다는 무진의 안분지족에 다들 기가 막혔다. 극도의 비율적인 흡수력이었다. 반을 나누어서 생도들에게 줬으면 금상첨화였을 것을.
“그래도 꾸역꾸역 1갑자는 달성했잖아.”
“씨발, 누군 없어서 못 먹는데, 누군 배 터져 죽는구나!”
“지금까지 쟤가 먹은 영약만 해도 대형 길드 하나는 세우겠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망할! 나는 루저야!”
무진이 아카데미의 보고에서 보물을 얻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남은 평생을 가도 얻지 못할 보물을 혼자서 독차지하는 중이다. 그러니 시기와 질투를 사기에 충분했다.
부르르르!
정우민은 마치 자기 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분노했다. 1학기 때 당한 것도 억울하건만, 이젠 가문의 보물마저 홀라당 먹어 치웠다. 그런 놈한테 일방적으로 당했으니 분노를 주체하기도 힘들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왜 다가와?
대련 중이었다.
항복을 선언하지도 않았다, 정 교관도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우민은 마치 끝난 것처럼 멍하니 있었다.
무진은 대결 중에 한눈을 파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퍼억, 퍼억!
커억!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무진은 가차 없이 두들겨 주었다. 정우민이 억울하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안 깐 데 때리고, 때린 데 또 때리고, 그냥 마구 때렸다.
‘아버지가 잘 먹었다고 전해 달래.’
잘 먹었다고 했지, 누가 먹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주어를 빼먹었지만, 무진에겐 사소한 실수를 가장한 고의에 불과했다.
“그만!”
화나고 억울해서 항복을 외치지 않는 정우민을 대신해 정 교관이 나섰다. 던전이나 생사투가 아닌 대련에서 불상사를 내버려 두진 않았다.
무진은 그 즉시 손속을 멈추었다.
짧은 순간 정우민은 만신창이에 가까웠다. 속은 어떤지 몰라도, 얼굴은 못 알아볼 정도로 부풀었다.
허허!
정우민의 상태를 확인한 정 교관은 헛웃음이 나왔다. 겉으로 보면 치명상을 입은 것 같았는데, 내부를 관조하니 멀쩡한 축에 속했다. 뼈와 근육도 상하지 않고, 내력도 조금만 다스려 주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마구잡이로 팬 줄 알았는데.
‘아주 절묘하게 팼구나.’
몸은 멀쩡하고, 고통은 극대화했다. 거의 고문 수법에 가까웠다. 일개 생도가 이 정도로 인체의 구조를 세밀하게 알고 있다니, 실로 놀라웠다.
“어디서 배운 게냐?”
“아시잖아요, 제 사부님이 권왕이신 거.”
“……그렇군.”
대한민국에 권왕보다 사람을 잘 패는 사람은 없다. 권왕을 아는 사람일수록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정 교관도 권왕을 알고 있기에 무진의 대답에 설득력을 더했다.
“창황가에 대환단이 있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거냐?”
“그거야 저도 모르죠.”
대환단쯤 되는 영약을 은밀하게 숨겨 두기는 쉽지 않았다. 그걸 콕 찍어 달라고 한 걸 보면 권왕가의 정보 수집력이 생각보다 대단한 듯했다.
물론, 정 교관의 오해였다.
‘발칸이 창황인데, 모를 리가 있나.’
세상에 좋은 건 무조건 아버지가 먹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