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종신 고용?(3)
투귀는 천병류를 완성하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비무를 벌였고, 무인들의 무공을 훔쳐 왔었다. 남의 무공을 훔쳤다고 손가락질하던 무인에게 ‘그러게 잘 숨겼어야지.’라고 되레 큰소리를 쳤었다. 그런 주제에 비기를 알려 달라고 했으니,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나,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끝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른 건 몰라도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다. 이 끝나지 않을 갈증을 채우려면 놈의 수작을 알아내야 했다. 그러려면 다시 도전하는 수밖에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하자.”
“두 번째 조항을 넣겠습니다.”
“맘대로 하거라.”
“그렇게 자기 인생을 던지지 마십시오. 꼼꼼하게 확인을 하고 도장을 찍으셔야 합니다.”
아까는 굉장히 친절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굉장히 얄미웠다. 마치 두 번째 조항도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을은 갑이 부를 땐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야 한다.
큭!
이놈이 내가 똥개도 아니고!
첫 조항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심히 자존심이 상하는 문구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핸디캡은 줘야 대결이 성사되었다.
“하시겠어요?”
“하마!”
그때 알았어야 했다.
이것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란 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되새겨야 했다. 도박이 이렇게나 무섭다. 하물며 상대는 도박장의 최고수 타짜처럼 자신의 패를 모조리 다 읽고 있었다.
물론, 아예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막으셨네요.”
“……환술을 썼구나!”
이제야 놈의 환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실로 놀라운 수준의 환술이었다. 일반적으로 환술은 무의 경지가 높은 고수에겐 잘 통하지 않는다. 절대경에 들어선 자신을 환술에 빠뜨렸다는 사실 자체로 경이로웠다.
분명 일반적인 환술이 아닌 특별한 비기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하나, 절대경의 무인은 환술에 빠졌다고 해도, 찰나의 틈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찰나를 이놈이 파고들어 왔다는 사실이다. 최소한 근접하거나 비슷한 수준이어야 했다.
그나마 이제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환술을 자각했기에 무력화는 아니더라도 방어는 가능했다.
호사다마일 텐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공백으로 가득 들어찼던 계약서엔 100개나 되는 조항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환술을 파악하는 데까지 100번의 패배가 쌓였다. 평생을 싸워 왔고 승패를 반복했지만, 이처럼 일방적인 패배는 처음이었다.
-갑이 명하면 을은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기어야 한다.
“이건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는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더냐?”
“헐, 똑똑해지셨네요.”
얼렁뚱땅 넘어가려던 무진은 신속히 100번째 조항을 수정했다. 실수를 인정하고 이쯤에서 멈추었다.
“제 진정한 실력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환술 빼고?”
“……악마 같은 놈!”
이건 못 참지!
사람은 100번쯤 실수를 하고 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했다. 한데, 너무나 강렬한 유혹이었다. 눈앞에서 천하제일미녀가 발가벗고 춤을 추어도 이보다 강렬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속는 셈 치고 수락했다.
쿠다다당!
당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번엔 마법을 빼고 할까요?”
무진에겐 아직 12개의 매직이 남아 있었다. 빼곡한 조항을 볼 때마다 배가 불렀다.
“그만해, 이 미친놈아!”
“참고로 제 이름은 강무진입니다. 앞으로는 강 과장님으로 불러 주세요. 저도 김 사원으로 부르겠습니다.”
인턴에서 신입 사원이 됐으니 좋다고 해야 할까? 국민연금을 탈 시기가 1년 남기는 했다.
“쿨럭…… 주화입마가!”
“괜찮습니다. 힐!”
크억!
우리나란 아직 안락사할 권리가 없듯, 강제로 회복되고 있었다. 내외상은 물론, 내력까지 원래 상태로 돌아가자 투귀는 기겁했다. 이쯤 되자 긴고아를 쓴 건 제자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숫제 괴물이 아닌가?’
제자를 키우면서 무공의 벽을 넘어섰고, 10대 초인이 아니면 적수가 없다고 자부했다. 그런 자신이 일초지적이 되지 않았다.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기분이다.
-을은 갑이 계약을 끝내지 않으면 고용을 보장한다.
공무원이 아닌 이상 고용 불안이 심한 현시대에선 필요한 조항이었다. 하물며 고연봉을 보장하고 있었다. 100세 시대에 300세까지 고용을 보장하겠다니 훌륭한 근로계약서였다.
“저는 사람을 함부로 자르지 않습니다.”
“이건 노예 계약이지 않느냐!”
“김 사원이 수락한 일입니다. 제가 언제 강요를 했나요?”
“당장 명퇴는 안 되겠니?”
“공과 사는 분명히 하셔야죠.”
공과 사를 구별하기엔 24시간 초과근무였다. 격일제도 아니고, 종일 공적인 자리가 되었다. 그러니 업무 외 시간도 단순 말장난에 불과했다. 망할! 신안 염전 노예보다 못한 조항을 제 눈으로 체크하고, 제 손으로 도장까지 박았다. 원망을 하려거든 제 눈을 찌르고, 제 손을 잘라야 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투귀는 주저앉고 말았다. 새하얗게 불태운 듯 넋이 나갔다. 살면서 느껴 보지 못한 무력감과 허탈함이 밀려왔다.
에헴!
왜 안 나대나 했다.
거들먹거리는 권왕을 본 투귀는 울화가 치밀었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권왕과 싸워 봤기에 안다고 생각했다. 한데, 무진의 무위는 차원이 달랐다.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는 청출어람도 정도가 있었다.
“어떠냐, 본왕의 제자가?”
“가르치는 실력이 있을 줄은 몰랐군.”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또 이렇게 잘해. 나만큼 안목이 뛰어난 스승도 없지, 암암!”
“이딴 놈에게, 세상 참 불공평하구나!”
가진 놈이 더 많이 가지는 세상이다. 불행할수록 불행이 더 잘 찾아오고. 세상 제멋대로 산 권왕이 제자 복도 있을 줄이야.
그러나 불합리하다고 하여 불평만 하진 않는다. 사내라면 응당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
투귀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차라리 후련하긴 했다. 나이가 어리긴 해도, 실력만 놓고 보면 그 누구보다 뛰어난 무인이다. 그뿐인가? 무공 외에도 재능이 넘치다 못해 과유불급의 괴물 같았다.
“인정하마, 참으로 대단하구나. 앞으로 강 과장으로 부르겠네.”
“반말이 거슬리긴 하지만, 상사로서 너그럽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는구나.”
“알면 잘하세요.”
앞으로의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얄미운 상사 놈이 증명해 주었다. 한숨이 나오지만,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쉽고 단조로운 삶이 재미가 있겠는가. 인생은 굴곡이 있어야 보람도 있는 법이다. 지금까지의 준비 과정만으로도 강 과장이 상대해야 할 적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했다.
‘더 강해지겠다!’
강 과장의 수작에 넘어가 종신 계약을 했지만, 천병류의 한계를 극복할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강적과 싸워 나가며 천병류의 극의를 넘어서리라.
“이제부터 전력으로 보좌하마.”
“무슨 말씀이세요?”
“널 보좌하라는 거 아니었느냐?”
“아, 모르셨구나. 지금부터 성운 그룹에서 창립할 길드의 길드원이 되셔야 합니다.”
“나보고 길드원을 하라고?”
“파견직이긴 한데, 노력하시면 길드장도 될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김 사원의 직속상관은 제 아버집니다. 가드 겸 길드원이니까, 최선을 다해 주세요.”
헐!
노인할당제를 무시한 편한 내근직도 아니고 파견직이라니! 한술 더 떠 자기 아버지까지 봉양하란다. 요즘 같은 시대에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이제 볼 장 다 봤다 이거냐!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신생이긴 해도 대기업이 직접 발 벗고 나선 길드의 초대 길드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나저나 가족끼리 다 해 처먹고 있었다. 권왕가, 블랙마켓에 이어 성운 그룹까지 마수를 뻗쳤다. 계획대로 된다면 음지와 양지를 통합한 한국 제일의 초거대 야합 집단이 되어 버린다.
이런 (가)족같은 놈이 다 있나!
드륵!
연무장의 문이 열리고 닫혔다.
지수가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녀는 무진이 블랙마켓에서 일을 진행하는 동안 유정, 혜진, 상원, 4인방의 수련을 맡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태수 선배와 똘마니들도 두들겨 주었다.
애들 훈련이 끝나면 연무장으로 와서 사부님과 겨루었다. 호적수로 만난 조손녀 간의 피나는 결전이 재미가 있었다. 누가 더 강한지에 대한 호승지심은 혈연, 지연, 연령과는 상관이 없었다.
지수는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왠지 모르게 후련해 보이네.”
“혜진이 고것이 얼마나 집요한 줄 알아? 그래서 더 세게 밟아 줬지.”
“그 정도로 밟으면 잡초도 죽어.”
“지금 혜진이 걱정한 거야?”
“애초에 중요한 전력 중 하나라고 한 건 너야.”
“그래서 혜진이야, 나야? 누가 더 소중하고 섹시한 전력이냐고? 똑바로 말해.”
“너.”
무진의 대답에 지수는 만족한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남사친의 의무 중 하나는 여사친의 기를 살려 주는 것이다. 또한, 여사친의 일과와 건강 상태를 챙겨야 했다. 그것이 남사친의 의무였다.
‘섹스어필은 중요하지, 암암!’
무진은 함께하게 된 투귀를 지수에게 소개했다. 완전한 비밀을 공유하진 않아도, 대계를 이끌어 가기 위해선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었다.
“이분은 김석천 사원이야.”
“안녕하세요. 유지수예요.”
지수의 인사에 투귀도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주었다. 저번에 열렸던 창황가와의 대결을 tv에서 보고 인상이 깊었다. 저 나이에 생도의 신분을 뛰어넘는 공수의 운용과 노련함을 엿볼 수 있었다. 권왕이 뿌듯한 듯이 바라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차기 한국을 대표하는 10대 초인이 될 자질을 갖추었으니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응?
굉장한 부조리함이 투귀의 뇌리를 스쳤다. 작금의 대화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중요한 맹점을 잊고 있었다. 그 맹점을 부각하고, 또 부각하면 부자연스러움의 극치가 되었다.
“아까 강 과장하고 말을 트던데?”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니까 당연하죠.”
“같이 자란 오빠구나.”
“친구라니까요, 동갑이에요.”
나이에 아주 민감한 지수의 확인 사살에 투귀는 기겁하고 말았다. 이제까지 강 과장이 나이에 비해 빼어난 광세절학의 절대고수라도 생각했었다. 서른의 나이로도 믿기 힘든 성취였다. 천재적인 자질을 넘어선 괴물 같은 녀석이긴 한데,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정말로?”
“유치하지만, 리얼리요!”
“왜~~~?”
“그건 무진이 아버님한테 따지세요.”
지수의 나이를 알기에 투귀는 물론, 김삼진까지 덩달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동안인 줄 알았는데, 열일곱 살을 동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어리다.
털썩!
내가 생도한테 지다니!
승패를 병가지상사로 여겼던 투귀에게도 충격적인 현실이었다. 무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생도에게 일방적으로 처맞고 패했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에는 괴리감이 지나치게 크다.
김삼진이 얼른 상심이 큰 사부를 부축했다. 100번이 넘게 해 봤더니 이젠 자동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사부님, 괜찮으세요?”
“네가 보기엔 어떠냐?”
“안 괜찮은데요.”
“내가 인생을 헛살았구나!”
“사부님 탓은 아닙니다.”
김삼진도 허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사부와 자신을 구해 준 강 과장이 생도일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하물며 눈앞에서 보여 준 무위는 실로 놀랍다 못해 천외천이었다.
천재에게도 시간은 중요하며, 현실은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자 생리였다. 한데, 강 생도는 태어날 때부터 완성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전생자가 아닐까?’
다른 세계의 절대자가 우화등선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절대자가 되는 스토리.
[절대자의 귀환]
[무신 대륙정벌기]
[9계식 그랜드마스터]
[헌터, 이계독존기]
김삼진은 요즘 웹소설에 푹 빠져 살고 있었다. 버는 족족 결제를 하는 바람에 요금만 해도 족히 달에 100만 원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