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종신 고용?(1)
그레이 길드는 총통 길드에 흡수되었다. 명분상으론 동등한 형태의 협상이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예상보다는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블랙마켓은 4개의 길드가 경쟁하는 구도로 바뀌었다.
“누나는 아쉽지 않아?”
“서둘러 먹다가 체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다고 의심하진 않을 텐데.”
“떠보는 건 그쯤 해, 어차피 당장 먹을 수도 없잖아.”
그레이 길드가 총통 길드에 흡수되면서 테라 길드와 보부상 길드로선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애초에 그들의 것이 아니긴 했어도,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더욱이 둘이 하나가 되어 규모가 커졌다.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저들도 계산이 섰으니, 이쯤에서 물러선 걸 테고. 아마 양패구상을 노린다고 봐야겠지.”
“이 바닥이 원래 그렇기는 해도 씁쓸하네.”
제인은 총통 길드와 그레이 길드를 쓰러뜨릴 때까지 보부상 길드와 테라 길드에게 경매에서 나오는 수익의 일정 비율을 나누어 주었다.
같이 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을 줄 알았다. 배신을 당하고도 너무 순진하게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사람을 잘못 봤다는 뜻이었다.
보부상 길드와 테라 길드는 쉐도우 길드에서 그레이 길드를 처리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레이 길드를 흡수한 총통 길드와 대치해 봤자 피해만 커질 테고, 쉐도우 길드와 대립하기를 바란 것이다.
수가 뻔히 보이는 얄팍한 계책이나, 두 길드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차피 총통 길드가 있는 이상, 쉐도우 길드로선 두 길드와 반목하기 힘든 형편이니 말이다.
“의리를 기대하진 않았잖아. 이제부터 우리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 주자고.”
“어쩌려고?”
“총통 길드와 손을 잡는 거지.”
“나연준이 믿을까?”
“믿고 안 믿고가 뭐가 중요해.”
제인은 무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보부상 길드와 테라 길드가 이리 나온 이상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총통 길드와 손을 잡는다고 해서 온전히 믿을 만큼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작금의 판을 역으로 이용한다면 블랙마켓을 양분할 수도 있었다.
결판은 그다음에 봐도 된다.
“어쨌든 고마워, 뇌정폭으로 날려 버린 건 아주 시원했어.”
“돈 낭비는 아니고?”
“네가 정체를 드러내거나, 온전히 나서는 것보다는 훨 나아.”
“그래도 필요할 땐 나서야지.”
무진은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라고 보았다. 블랙마켓을 장악하려던 암중 세력이 잠잠한 이 시기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최근 계속 찔러봤다. 어디까지 참나? 확인을 겸했고, 경계선에 왔다고 판단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겠지, 네 말대로 할게. 대신 아주 귀찮아질 거야!”
“귀찮은 건 감수할 일이고, 아무 때나 부르는 건 곤란해. 난 모범 생도거든.”
제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까지의 행보 중 일부만 아카데미에 알려져도, 퇴학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렇기에 괴리감이 상당히 컸다. 어느 누가 최근에 일어난 대형 사건의 중심에 일개 생도가 배후에 있으리라 생각을 하겠는가. 그야말로 완벽한 위장 신분이었다.
“이 사람들을 찾아봐.”
“누군데?”
“도후 형과 상성이 좋은 사람들.”
“네가 그렇다면 맞겠지.”
무진이 살펴보란 자는 연금술사와 야장이었다. 이제는 강화만이 아닌 장비를 제작해서 시중에 풀어야 할 때다. 다만, 기존의 야장과 연금술사를 데려오기는 어렵다고 봤다. 목록에 있는 자들은 가능성이 있지만, 비운의 천재들이었다.
무진은 그들이 원하는 환경을 제공하고, 만들어 낸 제품대로 선별하여 등급을 매기기로 했다. 총 3단계로 최고 단계에 오를 때마다 성과급을 준다면 효율성을 높일 수 있으리라 본다.
‘변신 로봇은 남자로의 로망이지.’
무진은 우리나라 최고의 흥신소인 제인 누나에게 일임한 후, 정식 파견서를 챙겨서 집무실에서 나왔다.
밖에는 김오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현재 긴고아의 통제권을 제인 누나에게 돌려준 상태였다. 그는 삼장법사를 수호하는 손오공처럼 성심을 다해야 했다.
“인상 좀 펴지. 오는 손님도 달아나겠다.”
“난 원래 이렇다.”
“원래 그런진 모르겠고, 일단 길드장님에게 말해 둘게.”
“……펴면 되지 않느냐!”
“아휴, 무서워.”
“……이러면 됐냐?”
“아, 원래 그렇구나.”
이 개새끼가!
긴고아가 주는 고통은 육체만이 아닌 영혼에도 충격을 주었다. 더욱이 단계별로 고통을 조절할 수 있기에 최고 단계에 이르면 차라리 죽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한데, 이 망할 놈의 긴고아는 착용자의 육신을 최선의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잘해, 100년 후에는 자유야.”
“……100년은 너무하잖아!”
“손오공은 500년 동안 동굴에 갇혔어. 그에 반하면 100년은 연금도 있겠다, 금방이지.”
“넌 분명 지옥에 갈 것이다!”
“패륜아보단 좋은 데로 가겠지. 하늘이 보고 있거든. 탕감이라도 받고 싶으면 잔말 말고 길드장님의 경호에 최선을 다해.”
긴고아의 통제권을 가진 소유주가 죽으면 김오진도 같이 죽는다. 김오진으로선 길드장을 위해서 살신성인을 해야 했다. 단순히 같이 죽는다고 해서가 아닌, 진짜로 지옥에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옥 가는 거 보고 싶기는 한데.”
염라대왕은 뭐 하나, 저 새끼 안 잡아가고!
김오진은 사형들의 꾐에 넘어가서 사부를 배신하는 자충수를 왜 뒀을까, 땅을 치고 후회했다. 이런 놈이 있을 줄 알았으면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게 잘해야지.”
만약이란 가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딴 가정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전에 샀으면 부자 됐겠다고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김오진도 패륜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와 후회하는 건 실패자의 가증스러운 한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1일 3갈굼은 필수였다. 하루도 갈구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제인 누나에게 당부했다.
정신교육도 끝났겠다, 슬슬 기다리다 지쳐 가는 어르신을 볼 시간이다. 며칠 동안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르신도 사부님처럼 맞고 후회하는 성향이었다. 물론, 사부님의 도전 정신은 칭찬을 받아도 부족했다.
무진이 방에 들어서자, 투귀는 기다렸다는 듯이 투기를 뿜어 댔다. 싸우지 못해서 안달인 점은 사부님과 판박이였다.
시간을 확인한 무진은 말했다.
“가시죠.”
“어딜 만지는 게냐?”
“공간이동을 해야 해서요.”
“공간이동은 6계식일 텐데?”
“그런데요?”
별것도 아닌 일로 촌스럽게 놀라지 말라는 무진의 물음에 투귀와 김삼진은 할 말을 잃었다. 불과 며칠 전에 한 우물을 파라고 조언을 했었다.
만류귀종이란 듣기 좋은 허울뿐, 이도 저도 아닌 경지에 머물게 된다고. 금과옥조와 같은 조언을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공간이동을 한단 말인가?
6계식을 이도 저도 아닌 맹탕으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그들이 비록 무공부심(武功負心)의 무인일지라도, 6계식에 올랐다면 달리 봐야 했다.
‘이 새끼, 천재였어?’
‘마법에도 달통하시다니, 정말로 동안이었구나. 그레이 길드장을 처리할 때부터 심계가 보통이 아니긴 했지.’
무인은 마법사를 간교한 고자로 모사한다. 왜냐고? 탁상머리에서 책만 읽는 정력 잃은 변태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리를 쓰는 부분에서는 마법사를 인정했다. 간사한 계략을 짜는 데 마법사만큼 유능한 자들도 드물었다.
여하튼 파이어를 쓸 때와는 의미가 달랐다. 파이어치곤 화력이 대단하긴 했어도, 그래 봤자 1계식에 불과했다.
투귀는 6계식의 공간이동을 순순히 믿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공간이동 아이템을 쓴다면 또 모를까.
“아이템이지?”
“사람은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군요. 한데, 세상은 자기 편한 대로 흘러가지를 않지요.”
영끌로 부동산을 산 사람은 오르기를 바라고, 사지 못한 사람은 폭락하기를 바라고. 그런데 현실은 둘 다 바람대로 잘되지 않는다.
“이놈이, 지금 돌려 까는 거지?”
“역시 자기를 아는 분은 무섭습니다.”
같은 문장을 두 번 반복했을 뿐인데, 투귀는 백 번이나 엿 먹는 기분이었다. 망할! 치미는 울화를 인지하기도 전 공간이동 좌표가 설정되면서 다른 장소에 도착했다.
헉!
주변의 환경이 바뀌고 나타난 장소는 연무장이었다.
공간이동은 마법 실력에 따라서 돌아오는 반진력도 다르다. 자연히 공간이동의 최하 단계인 6계식은 현기증과 멀미를 동반했다. 반면에 지금처럼 스무스한 공간이동은 최소 7계식은 되어야 한다.
‘7계식이라고?’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경지는 위로 갈수록 거대한 벽처럼 다가온다. 6계식과 7계식은 고작 한 단계의 차이지만, 하늘과 땅의 격차였다.
그렇다면 아이템을 썼다고 봐야 하는데, 그런 낌새를 전혀 못 느꼈다. 바로 옆에서 사용하는데도 몰랐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졌다.
하하!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불신에 사로잡혔던 투귀도 떨떠름하지만 인정했다.
“……대단하구나!”
“기본이죠.”
“어째서 말해 준 거…… 잠깐, 네 모습은 또 뭐야?”
“이게 본모습이에요.”
무진은 공간이동을 하는 동안 역용술을 풀었다. 강운 과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조금 작은 몸이었다. 원래로 돌아오자 숨 막힐 듯한 근육이 자리했다. 확실히 본신으로 돌아오니 좋기는 하다. 이 몸이야말로 최고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고성능 육체였다.
“여기가 어디냐?”
“사부님이 오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오냐, 어디 얼마나 대단한 분에게 사사했는지 확인해 보마.”
“어르신도 아시는 분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알아? 그럴 리가!”
녀석의 무공을 제대로 확인은 못 했지만, 아는 인물이라면 눈에 들어와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무공의 유파를 구분하는 데 자신을 따라올 자는 거의 없었다.
이는 천병류를 익히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안목이었다. 모든 무공을 익힐 수는 없어도, 그 무공의 특징과 장점을 병기에 접목하기 위해선 필요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닫혔다.
연무장 안으로 들어온 거구의 중년인을 마주했다. 투귀의 동공은 그 어느 때보다 흔들렸다.
“……권왕!”
“오랜만이구나, 예전에 처맞은 자리는 다 나은 모양이군.”
“이놈이 네 제자라고?”
“그래. 내 유일한 수제자지.”
상상도 못 한 전개에 투귀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권왕일 줄이야.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도 하고.’
저 싹퉁머리 없는 건방진 말투를 보건대, 권왕의 제자임을 부정하긴 힘들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과한 모습까지도 아주 빼다 박았다.
“혹시 자식이냐?”
“그건 제 아버지한테 실례인데요.”
“크음, 미안하구나.”
“다른 건 다 참아도 제 아버지를 부정하는 건 참을 수 없으니 호칭에 신중을 기해 주세요.”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했구나.”
투귀가 파파보이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었다. 하긴 용의주도한 제자 녀석이긴 했다. 권왕은 투귀의 어벙한 모습이 자신과 닮아서 조금 짜증이 치밀었다.
맞은 날과 안 맞은 날의 차인가?
사실은 별 차이 없는, 기분 탓이긴 했다.
“여긴 권왕가겠군.”
“그럼 창황가겠어요?”
“쉐도우 길드는 권왕가의 지부였느냐?”
“그건 비밀인데요.”
영업 기밀이라면서 표정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 말마따나 권왕이 동네방네 소문낼 위인은 아니다.
더욱이 칠대 가문 정도 되면 공간이동이 통하지 않는다. 가문 에 외부 침입에 대비한 마력방해장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왕이 손수 마력방해장을 치웠다는 의미였다. 귀찮은 건 질색하는 위인이 제자의 말에 순순히 따른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했다.
“수제자가 맞기는 한 것 같군.”
“같군이 아니라, 맞는다니까.”
“맞는다가 아니라 맞다겠지.”
“어쨌든 둘 다 맞아.”
사부님의 중의적 표현이 나날이 늘고 있었다. 애초에 선택할 수 없는 갈림길인데, 선택권을 내어 주는 모습까지. 사면초가의 벼랑에서 우물쭈물하지 않고 밀어 버리는 훈훈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