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간 보기(5)
‘빌어먹을, 어쩌지? 왜 안 오는 거야?’
채성만은 사태가 심각하게 꼬였다는 걸 체감했다. 제압이라도 했으면 적당히 속임수를 썼다고 꾸미면 그만이었다. 되레 제압당하고 말았으니 앞이 깜깜했다.
주변의 소란이 잠잠해지자, 채성만은 더욱 불안해졌다.
“왜 말이 없지?”
“잠깐, 시간을 좀 줘.”
“언제까지 뜸을 들이려고, 보안실에서 메모리카드만 가져오면 되는 거 아닌가?”
“길드장님의 보안 코드 없이 메모리카드를 빼면 지워지게 되어 있어!”
“안에서 돌려 보면 되잖아. 영상은 이쪽이 볼 수 있게 하고. 그게 아니면 너희들도 돌려 보지 못한다는 소린데, 말이 안 되잖아.”
개소리 그만하고, 어서 밝히라는 무진의 요구였다.
채성만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길드장의 보안 코드를 들먹였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궁지에 몰리는 바람에 전후를 재지 않고 말해 버린 탓이다.
“결국, 돈을 잃었으니 책임을 전가했다는 소리잖아. 대단하네. 이 도박장은 돈을 따면 무조건 안 되는구나.”
“……헛소리다! 절대 그렇지 않아!”
어차피 도박에 중독된 자들이야 소문이 번지든 말든 상관없겠지만, 자칫 거물들을 놓칠 수 있었다. 그들이 훨씬 많은 돈을 쓰기에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돈을 주겠다는 거지?”
채성만으로선 어떤 선택도 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오해였다고 한다면 이 사달을 벌인 책임은 오롯이 자신에게 있었다. 그렇다고 목숨 걸고 발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강 과장이란 놈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꽈아앙!
별안간 폭발이 일어나며 도박장의 벽면까지 충격파가 일었다. 무언가 부딪혔다는 걸 깨달은 채성만은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오셨나?’
소리만으론 감이 오지 않았다. 눈이 보여야 상황을 파악하기가 수월할 텐데. 그나마 초점이 맞지 않기는 해도, 흐릿한 잔상이 보이기는 했다.
다행히 목소리가 익숙하다.
“네놈들은 누구냐?”
“쉐도우 주식회사 소속 강 과장입니다.”
“상장도 안 한 주제에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군.”
“하하, 명함 하나 판 겁니다.”
난장판이 된 도박장의 광경에 조관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수하의 다급한 보고를 받고, 도박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염려하지 않았다. 가는 중에 소란을 제거했으리라 보았다. 웬걸! 소요가 진정되기는커녕 기름을 부어 놓았다.
한데도 섣불리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방금 일수의 격돌이 가볍지 않았다. 호위인 독혈권의 주먹을 간단히 막아 낸 것도 부족해 밀어내 버렸기 때문이다. 길드 서열 5위에 드는 독혈권
장충이었다.
“이것이 쉐도우 길드의 뜻인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카드나 하러 왔을 뿐입니다.”
“이런 짓을 벌이고서 카드나 하러 왔다고?”
“오햅니다. 이 사태는 전적으로 도박장의 관리인이 벌인 짓입니다. 선량한 사람을 사기꾼으로 몰고서 알력 행사를 하는데, 얌전히 있으면 호구가 아니겠습니까?”
꿀꺽!
그제야 흐릿한 초점이 맞춰진 채성만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을 노려보는 길드장을 봤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렇다고 하는 순간, 자신은 두 번 다시 공기를 마시지 못한다.
“절대로 아닙니다, 이놈은 속임수를 쓴 사기꾼입니다!”
“방금 전과는 다르네.”
“……네놈이 나를 겁박하지 않았느냐!”
“증거도 없이 사기꾼으로 몰았으면서 발뺌은.”
“속임수를 쓰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번 돈을 따!”
결국,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확실히 이런 더러운 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놈이라서 그런지 말이 쉬지 않고 바뀌었다. 자기 목숨을 위해서는 부모도, 자식도 팔아 버릴 놈이었다.
어쨌든 기대한 대로였다.
무진은 채성만이 아닌 조관진을 보았다.
“이거 어쩌죠? 이분도 아니고, 우리도 아닌데.”
“사기를 치지 않았다는 거냐?”
“당연하죠.”
“돈을 내어 주마.”
“역시, 일개 지배인과는 통이 다르시군요.”
조관진은 강 과장이란 놈이 아닌 그 옆에 서 있는 이상한 호랑이 가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나오는 사나운 투기를 마주하자 손바닥에 진득한 땀이 뱄다. 붙어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위험하다는 경고가 뇌리를 울렸다.
그걸 증명하듯 독혈권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내가중수권에 입은 내상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어디서 이런 놈들이?’
쉐도우 길드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신했거늘, 천진우의 계획이 어긋난 이후로 되는 일이 없었다. 더욱이 이만한 전력을 아무도 모르게 숨겨 놓고 있었다는 점이 걸렸다. 준비도 없이 어설프게 손을 썼다간 되레 당할 수도 있었다.
“오해였다고 하니, 이만 돌아가게.”
“내일 또 오겠습니다.”
“난장판을 수습하려면 며칠은 걸릴 걸세.”
“못난 지배인 때문에 길드장께서 고생이 많습니다.”
어르고 달래는 강 과장의 언행에 조관진의 미간은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기세로만 따지면 옆에 선 호랑이 가면이 훨씬 위험하겠지만, 이놈도 만만치 않음을 직시했다.
살얼음판에 서 있는 걸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천진우 이상의 영악함과 흔들리지 않는 배포였다.
‘이놈이구나.’
제인을 제거하는 데 실패한 연유가 짐작되었다. 쉐도우 길드의 두뇌가 천진우가 아닌 강 과장이란 놈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천진우를 버리는 패로 사용해 배신자를 색출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제인과 이놈한테 철저하게 농락을 당한 것이다.
그걸 빌미로 이렇게 대놓고 난장을 까고 있었다.
‘젠장, 속을 썩이는군.’
이 바닥 소문은 번개처럼 빠르다. 곧 도박장의 일이 퍼질 테고, 쉐도우 길드라면 이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설상가상으로 총통 길드장이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꼴이 우습게 되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다음이 있을진 모르겠군.”
또 한 번 눈에 띄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조관진의 엄포였다.
무진은 똥개도 자기 안마당에선 짖는다는 듯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네가 짖는다고 뭘 어쩔 거냐는? 의사가 분명했다.
바르르르!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 보았던가? 블랙마켓의 독사로 불리며 흉명(凶聲)이 자자한 조관진이었다. 서른도 안 된 애송이가 정말 주제도 모르고 기어올랐다.
덜덜덜!
채성만은 몸서리를 쳤다. 길드장이 오면 해결될 줄 알았거늘, 예상 밖의 점입가경이었다. 이제 이 모든 소요의 책임은 지배인인 자신에게 있었다.
“길드장님, 용서를!!”
“괜찮아. 살다 보면 실수도 하는 거지.”
분노가 극에 이르렀지만, 조관진은 내색하지 않았다.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채성만을 처리한다면 그것조차도 흠이 된다. 은밀히 독혈권에게 시선을 주었다.
‘찾지 못할 거면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지!’
할 거면 확실하게 조지든가.
실내 주차장에 세워 놓은 최신의 대형 벤츠 SUV에 탔다. 제인 누나가 우릴 생각해서 나쁘지 않은 차를 내주었다. 인터넷에 검색했더니 적당히 2억이었다.
부르릉!
시동 소리마저 아름답다. 자고로 차란, 폼과 가오의 상징이다. 실용성을 따지는 것부터가 가오 빠지는 행위다.
차를 누가 운전하려고 타나, 자랑하려고 타지.
이런 속내를 드러내면 허세에 찌든 속물로 취급하겠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였다.
성적에 맞게 대학교에 가고, 능력에 맞게 직장을 다니고, 돈에 맞게 집과 차를 사고.
보통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지만,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았다. 학생은 서울대에 가고 싶고, 구직자는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고, 부부는 서울 중심부에 집과 외제차를 사고 싶은.
그렇게 못 하니 실용성을 따지는 거다. 물론, 유별난 사람이 없지는 않다. 남들과는 다른 자기 주관과 소신이 있는, 그들의 삶이 대단한 것이다.
무진은 딱히 차별화된 삶을 바라진 않는다. 남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많이 해 보고, 더 많이 가지고 싶었다.
스윽!
다들 호랑이 가면을 벗었다.
선풍도골의 호인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되는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무진을 노려보았다.
“왜요?”
“네 시다바리나 시키려고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냐?”
“인턴은 원래 사수를 따라다니는 겁니다.”
“내가 언제 인턴을 하겠다고 했어?”
“그럼 처음부터 정사원이 되신 줄 알았습니까? 쯧쯧쯧, 이래서 사회생활을 해 보지 않으면 현실감각이 없는 겁니다.”
투귀는 혈압이 올라 뒷목을 잡을 뻔했다. 이놈의 자식이 지금 사람을 놀리는 게 분명해 보였다. 맘 같아서는 옥상으로 끌고 가서 시원하게 패고 싶었다. 하나, 약속이 발목을 잡았고, 제자 놈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운전 중인 투귀의 제자는 김오진이었다. 그는 김삼진을 제외한 사형들의 죽음 속에서 사부의 간절한 부탁과 노예…… 정식 계약으로 살아남았다. 한편으로 처음 보았다. 사부의 그런 표정을, 매번 엄하기만 했었던 모습과는 다른 인간적인 면모였었다.
‘그래도 이 꼴은, 좀!’
김오진은 살아남았지만, 쉐도우 길드의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머리에는 긴고아가 쓰여 있어 명령을 거부하는 즉시 산고의 고통이 유발된다. 그러나 누굴 탓하기에는 사부를 배신한 죄책감이 없지 않았다.
“네놈은 장유유서도 없느냐!”
“제가 언제 어르신을 함부로 대했다고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이면 아파트에서 경비 서시는 어르신들은 다 시다바립니까? 이건 직업적인 차별인데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무진의 정공법에 투귀는 이번에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이런 일 하려고 무공을 배우진 않았을 텐데. 항의하는 순간 전국의 경비원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따지고 보면 경비원 어르신도 왕년에는 대기업 나온 분들이었다.
말문이 막히자, 투귀는 꼬장을 부렸다.
“나 안 해!”
“제인 길드장께서 어르신의 딱한 사정을 봐서 제자도 살려 주고, 채용도 해 주고, 연봉도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라산 대(大)패륜 사건을 묻어 주지 않았습니까? 이런데도 일을 못 하시겠단 말이지요.”
“그런 게 아니라, 어떻게 된 놈이 한 마디를 안 지냐? 그냥 해 본 소리다, 됐느냐!”
“저도 그냥 해 본 소립니다. 됐습니까?”
“……됐다, 이놈아!”
투귀는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왔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는 되바라진 놈인데, 일 처리 하나는 기똥차다. 어린 나이에 과장의 직함으로 볼 때 싹수없는 엘리트였다.
더욱이 무공도 따지고 보면 약하지 않았다. 자신에 비하면 부족함이 있다지만, 제자를 죽인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데 꼭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해야 하는 게냐?”
“블랙마켓의 생리가 약육강식의 강자존이긴 해도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치고는 죽여 달라고 변죽을 울리는 것 같다만.”
“어르신이 계셔서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런 놈이 이딴 식으로 대우를 해?
가만 보면 앞뒤가 딱딱 맞지는 않았다. 지 꼴리는 대로 하는 것 같은데, 우연히 잘 맞아떨어진 거 아닐까? 그렇다고 하기엔 우연이 반복되고 있었다.
‘지령이 내려오진 않았다는 건데.’
그레이 길드장의 간곡한 협조 요청에도 총통 길드장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둘 사이에 모종의 약조가 있다면 모를까? 암중 세력의 지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은 협조가 어려웠다.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을 테고.’
전면에 나서지 말라는 제인 누나의 당부로 당분간은 위장 신분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내 존재가 드러나는 것보다는, 능력을 일부 감추는 편이 적을 타깃하는 데 요긴했다.
“일 끝나면 파견 나가야 하니, 신분 노출은 하지 마세요.”
“아주 뼛속까지 우려먹을 심산이구나!”
“연봉이 무려 10억이나 되잖아요. 그것도 세금 한 푼 안 내는 빳빳한 현찰로요. 대체 어디가 우려먹는 거예요. 10억 버는 게 쉽나요?”
“내 고용비가 얼마나 될 것 같으냐?”
“어르신이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는 압니다. 그 눈물겨운 사제의 정이란, 참 아름답고 숭고하십니다.”
“……이 썩을 놈이!”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얼굴을 붉히니까, 왜 이렇게 꼴 보기 싫을까? 무진은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저도 사부님을 사랑합니다.”
“……너 미쳤느냐!”
김삼진이 조심스럽게 귓속말로 속삭이자, 투귀는 시선 처리조차 하지 못한 채 선팅이 과도한 창가를 쳐다보았다.
‘대단한 사람이네.’
저딴 말을 대놓고 할 줄이야, 이번에는 무진도 상당히 놀랐었다. 평소 김삼진은 말수가 적고, 숫기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었다.
‘……그만해! 대체 뭔 짓들이야?’
면허 딴 지 일주일인 김오진은 닭살이 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제발 안전 운전을 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우회전을 못 하겠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