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간 보기(3)
“하긴 나도 좀 고생하고 있어.”
“네가 조금이면 우리 같은 미천한 소인은 평생을 시달려도 해결이 안 된다고. 이래서 천재들이 재수 없다는 소릴 듣는 거야. 바로 너 같은 애들 때문에!”
“아는 사이에 겸손할 순 없잖아. 겸양 떨면 더 혐오할 거면서.”
“누가 그렇대.”
“아냐, 계속 싫어해도 돼.”
가스라이팅에 하마터면 여지를 줄 뻔했다. 오래가야 할 여사친일수록 선을 선명하게 그어 주어야 한다. 괜히 흘리고 다니다간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럼 그렇지’가 되어 버린다.
“제주도에서 아주 팔자가 좋으셨어!”
“일이잖아.”
“그년들하고 팔로우도 하셨던데, 그것도 일이냐?”
“사진 올리니까, 신청이 오더라고. 사람 일 아무도 모른다고, 순수한 선의에 대한 거절은 예의가 아니지.”
“좋은 말로 할 때 차단해.”
이런 일로 말싸움하기 귀찮은 무진은 바로 앞에서 차단했다. 어차피 나중에 풀고, 실수였다고 해명하면 그만이었다. 자고로 미녀와의 인연은 거절하는 게 아니다. 여자도 미남과 만남을 선호하잖아.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세상은 외모가 전부였다. 내면의 아름다운 마음씨는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와 맞지 않았다.
“인연을 거절하다 보면 악연이 될 수도 있어.”
“상원이는?”
“지금 그런 사소한 문제로 말싸움할 때가 아니야. 네 말대로 암중 세력이 곳곳에 암처럼 퍼져 있다고.”
“얼레, 유정이하고 혜진이는 받아 줬네.”
“누르는 걸 깜빡한 거야.”
“죄다 여자잖아!”
“우리 사생활은 존중하자고.”
왜 남의 핸드폰을 뒤지니…… 응? 비밀번호 어떻게 알았데?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인간미가 있었다. 무진은 지수의 말처럼 인간미가 없지 않았다.
“아주 그냥 양식업자 나셨네!”
“사내는 아버지 빼고 다 늑대라잖아. 나도 조심하고 있는 거야.”
소수의 취향을 존중은 할 뿐, 나한테 다가온다면 다른 문제였다.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 언제 원숭이 두창에 걸릴지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고, 쪽팔린다.
“그건 딸한테나 하는 말이지!”
“요즘엔 그렇지도 않잖아. 난 솔직히 두려워, 그런 세상이.”
영화도 그런 물이 들어서 재미가 없어졌다. 세 번 볼 영화를 한 번도 보기 싫게 만든다.
“……젠장, 그건 맞아.”
“자연의 순리를 어기면 벌 받는 거야.”
그렇게 자연의 순리를 어기고 싶으면 절대경에 오르든가, 9계식의 폴리모프에 도달해야 했다. 그 전까지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순 없다.
“우린 그렇게 키우지 말자, 안 그래?”
“……그렇지.”
말렸음에도 무진은 반박하지 못했다. 맞는 말 같은데, 굉장히 찜찜한 기분이다. 후일을 위해서라도, 자유로운 영혼을 간직해야 했다. 세상은 넓고, 여자는 반이잖아.
“눈 좀 그만 내리게 해.”
“한여름의 눈은 낭만이야.”
“이상기후라며!”
“우리 지수 많이 똑똑해졌네.”
아파트 경비원을 수고스럽게 할 순 없으니 땡볕으로 권역을 완성했다. 쌓이던 눈은 게눈 감추듯 녹아내렸다. 다만, 지금 다른 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진은 팔로우를 뒤로하고, 한라산으로 틀었다.
“그놈의 중계자는 가는 곳마다 있냐!”
“놈들의 정보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뜻이지.”
알려지지 않은 특정한 정보들을 분석해서 필요한 인재를 찾아냈다. 영입 대상이 당장은 대단치 않아도, 차후 악명을 떨치게 할 재능을 소유하고 있었다. 칠대 가문, 대형 길드, 정부의 정보력을 넘어서거나,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돌아가는 정황을 봐선 둘 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갑자기 주체가 바뀌는 경우를 살펴봐야겠네.”
“이럴 수가, 우리 지수가?”
“평소에 나를 대체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투귀를 치워 버리자고 한 분이 누굴까나?”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반박 참 쉽게 하네.
현재 명성을 날리고 있는 유명인들, 야욕을 숨기고 있는 2인자와의 관계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암중 세력은 약점을 쥐고선 대상을 부정한 쪽으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약점이 될 만한 숨기고 싶은 과거나, 갑작스러운 변고를 살펴봐야 했다.
“어때, 그런 자들이 있었어?”
“몇 명 있는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아.”
“차차 알아보면 될 일이고, 이번에 가장 큰 행사는?”
“교류전일 것 같은데.”
무진은 지수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항상 기대치를 최대한으로 낮춰서 준비해야 했다.
병풍 같아 보여도, 지수는 꼭 필요한 인류의 구원자였다. 특히 미래의 변곡점이 될 만한 사건들을 흐릿하게나마 알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한다.
“교류전에서 역공을 취하는 건 어때?”
“좋은 방법이지만, 좀 걸리네.”
“어떤 점이?”
“매번 성공만 했거든.”
인생과 마찬가지로 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기 마련이다. 빛과 어둠처럼 성공과 실패는 따라다닌다. 시선을 돌리고, 투귀를 회유하기 위해서 제주도를 여행했었다. 이만하면 의심을 사지 않을 테지만, 암중 세력으로선 근래에 들어서 매번 실패의 연속이었다. 과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까?
“우리를 찾으려고 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러니 큰 사건은 쉬어 갈 필요가 있지.”
우리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예측하는지 알려지면 곤란했다. 운이 겹치거나, 불특정 다수의 변수로 보도록 유인할 필요가 있었다.
“방임했다간 피해가 커질 수도 있어.”
“그래도 본문은 나서지 않는 편이 이로워.”
권왕가와 연관된 사례가 많아졌다. 본문의 개입이 지금보다 많아진다면 저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측하기 힘들다.
“알고서도 모른 체하고 싶진 않은데.”
“정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힘이라도 좀 빼 놓을까?”
“어떻게?”
“자잘한 사건으로 전력을 분산시키는 거지.”
지수와 이견 조율을 하는 중 예약하지 않은 불청객들이 난입했다. 상원, 혜진, 유정이 어서 문을 열라며 초인종을 눌러 댔다.
“부르지도 않는데, 왜 찾아온 거지?”
“찾아올 만하지.”
“어째서? 선물도 보냈는데.”
“돌하르방을 보냈잖아.”
순산을 기원했을 뿐이라고.
방송으로 고딩 아빠, 엄마를 버젓이 내보내는 세상이거늘 뭐가 어때서. 자기들은 아주 세상 아름다운 사랑이지만, 부모들 표정은 참!
***
-독룡창.
-피닉스의 깃털.
-타이탄의 권갑.
-헬라의 질투.
-마력정수.
오늘 블랙마켓에 올라온 물건이었다. 하나같이 상당한 효율로 스텟과 속성을 올려 주었다. 경매에 물건이 올라가기가 무섭게 가격이 치솟았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경매인들의 낙찰 경쟁이 치열했다.
하루에 100억이 우습게 거래가 되었다.
쉐도우 길드는 매번 경매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근래에 들어 쉐도우 길드에 내놓은 물건은 하나같이 최상급이기 때문이다. 경매인이 줄을 서며 없어서 못 판다는 말까지 나왔다.
상대적으로 다른 길드에서 내놓은 물건은 예상된 낙찰가 이상으로 받기가 어려웠다. 그마저도 쉐도우 길드에서 일정 비율을 양보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총통 길드와 그레이 길드로선 어렵게 구한 물건임에도 정가 이상으로 받아 내지 못해 손해가 쌓였다.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a급 이하였을 텐데.”
“독룡창도 전보다 등급이 올라갔다고.”
“스텟을 어떻게 올린 거지? 저만한 등급의 강화는 쉽지가 않잖아.”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
총통 길드의 길드장 나연준과 그레이 길드의 길드장 조관진이었다. 블랙마켓의 경매장에서 원하는 만큼의 이득을 챙기지 못하면서 길드의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장은 버틸 만하나, 계속 이런 식이면 블랙마켓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그때 없애 버렸어야 했는데.”
“그년 때문에 사신까지 죽어 버릴 줄은 미처 몰랐네.”
계획 자체는 완벽했다. 철혈의 흑장미로 불린다 한들,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이었다. 쉐도우 길드의 2인자 천진우가 적극적으로 협조했기에 실패는 거론하지도 않았다.
예상과 다른 결과는 당혹스러웠으나, 천진우를 비롯한 배신자의 처리로 공백이 있을 줄 알았다.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기 전에 블랙마켓에서 영향력을 줄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한데, 쉐도우 길드는 내부적인 문제가 없다는 듯이 세를 불려 나갔다. 이전과는 비교도 하기 힘든 광폭 행보였다.
“보부상과 테라만 협조했으면 금방 끝났을 텐데.”
“영악한 년이야, 혼자 다 먹지 않고 보부상과 테라엔 물건을 내어 줬으니까.”
보부상 길드와 테라 길드로선 작금의 경쟁 구도가 나쁘지 않았다. 이 구도만 유지해도 별다른 노력 없이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립 구도를 유지해서 자신들의 입지를 높이는 데만 혈안이었다. 나만 아니면 되는, 참으로 블랙마켓의 길드다운 처세술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년한테 잡아먹히고 말 거야.”
“자네 혹시, 안 되네!”
“마냥 손 놓고만 있을 순 없잖아. 기회부터 만들고 협조를 얻는 건 어때?”
“그리 녹록한 자들이 아실세.”
조관진은 비관적인 전망에도 결정하지 못하는 나연준의 우유부단함에 속이 타들어 갔다. 현재도 쉐도우 길드는 블랙마켓 내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다.
‘겁쟁이 같으니라고!’
그들의 힘을 부정하진 않았다. 블랙마켓의 5대 길드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조력 덕분이었다.
하나, 천진우가 제 역할을 했다면 애초에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자신들만 믿으라고 하고선, 나 몰라란 식이면 곤란했다.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냐고?’
일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는데도, 지시가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모를까, 근래에 들어 이상하게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젠장, 자기는 타격이 덜하다 이건가?’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갈보 년이 은근히 자신을 더 건드리고 있었다. 경매나 물건 납품에서 차질을 빚는 건 전적으로 그년의 작품이었다. 문제는 그 정도가 애매하고, 일부러 했다기엔 공교로웠다. 쌓이다 보니 가랑비에 옷이 젖고 있었다.
단독으로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일전의 실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나연준을 설득하기 위해서 다음 차례는 너라는 경각심을 주었거늘, 마지막엔 늘 미적거렸다.
‘그들을 그 정도로밖에 보지 않다니, 아직 멀었군.’
나연준도 조관진의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쉐도우 길드의 약진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고,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조관진과 다르게 자신은 그들을 일부나마 경험했다.
‘계획이 성공한다고 다가 아닐세.’
성공하면 좋기는 하겠으나, 그들이 명을 어긴 자신들을 내버려 둘 리 만무했다. 어떤 식으로든 처리하고 다른 이를 앉힐 수도 있었다. 그들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으려고 숨기고 있을 뿐이지.
‘길드가 남아 있어도 내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지 않나.’
블랙마켓을 통합해 자금을 쓸어 담아봤자, 남의 것이라면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고, 남의 것보다는 내 것이 훨씬 나았다. 게다가 쉐도우 길드와 그레이 길드가 상잔한다면 나쁘진 않았다.
보부상 길드와 테라 길드를 살쾡이 같다고 그리 욕하지만, 본질은 똑같았다.
“길드장님!”
길드원이 다급한 투로 조관진을 불렀다.
부르지도 않은 자리에 길드원이 허둥지둥대며 나타나자 조관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허술한 지휘 체계를 나연준에게 보여 준 꼴이었다.
화가 날만도 하나, 일단은 차분히 물었다.
“무슨 일이지?”
“하우스에 가 보셔야 할 듯합니다.”
좋지 않은 낌새를 알아챈 길드원은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총통 길드와 협력 관계긴 해도, 길드의 치부를 드러내 놓고 말할 순 없었다.
“오늘은 이만하지.”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하게.”
나연준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자, 조관진은 인상을 굳혔다. 정작 필요할 때는 미적거리면서 이럴 때는 나선다? 약을 올리는 것 같아서 화가 치밀었다. 맘 같아서는 쏘아붙이고 싶으나, 나중을 위해서 참았다.
“일없네.”
“너무 열 내진 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