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자업자득(3)
스왁!
붉은 선이 횡으로 그어졌다. 떨어지려는 목을 잡을 손도 없는 김일진은 힘을 잃어 갔다. 생에 대한 마지막 열망은 냉혹한 현실 앞에 무력했다. 미끄러지듯이 수급이 떨어져 내렸다.
데구르르르!
꽈드드드득!
무진은 징그러운 대가리를 분쇄했다. 초절정을 뛰어넘는 전투 기술과 감각은 놀라웠으나, 시간을 준 이유는 천병공과 천병류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사부님조차 고전했다는 투귀의 전투술을 알고 싶었다. 확실히 전투 감각만은 사부 못지않았다. 또한, 병기를 다루는 기술은 한 차원 높았다.
‘이놈을 선택하길 잘했네.’
투귀에게 얻는 방법도 있겠지만, 제자에게 배신당한 이상 순순히 알려 줄 것 같진 않았다. 더욱이 회사 식구로 받아들인 데다, 구두긴 해도 계약관계였다. 이럴 땐 아쉬운 소릴 하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쐐애애액!
무진은 천참만륙으로 김일진의 주검을 갈가리 찢어 주었다. 사부를 배신한 놈에게는 당연한 처우였다.
어딜 사람처럼 편안하게 가려고.
퍼퍼펑, 꽈아앙!
한쪽에선 여전히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원래 상태의 투귀였다면 다섯이 합공했어도 상대가 되지 않았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위험할 뻔했네.”
극복한 줄 알았더니, 김삼진은 심신미약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진 못했다. 더욱이 자질만 놓고 봐도 다른 투귀의 제자들보다 낫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대로는 또 당하겠는…….
응?
방금 좀 이상했다. 위험하단 판단이 설 때마다 김삼진을 압박하는 김사진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무언가에 저항하려는 듯 이를 악물었다. 그럴 때마다 다문 입술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흠.
생명이 위급할 시 김삼진이 중얼거렸고, 김사진의 공격이 흐트러졌다.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기는 했어도. 이상한 일이 반복된다면 우연이 아니었다.
팩트 폭력, 언어폭력?
이게 현실화가 되려면 힘이 있어야 했다.
‘언령?’
음파 공격이라고 하기에는 위력이 없다. 그저 중얼거렸을 뿐, 다른 어떤 속성이나 마력 발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한데, 위압이 발생해 상대를 옭아맸다.
-멈춰.
독심술을 마스터한 보람이 있었다. 중얼거리는 입술의 모양으로 단어를 확인했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대상인데, 멈추란다고 멈출 리 만무하다. 실로 편이하면서 만능에 가까웠다.
문제는 자유자재로 발휘되는 것이 아닌 살고자 하는 본능이 극대화한 찰나에만 가능했다.
‘꼬임에 넘어가지 않은 이유가 있군.’
김삼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김일진의 수작에 동조했다. 정신적으로 흔들릴 때를 노렸을 테지만, 언령을 사용하는 김삼진은 보기와 다르게 정신 보호가 되었다. 처음 심신미약 상태를 상기하면 극과 극이긴 했다.
‘극과 극은 통하는 건가?’
언령이 대단해 보이긴 해도, 따지고 보면 권능의 영역이었다. 스텟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언령을 사용하면 지금처럼 속성에 먹히는 수가 있었다. 언령을 사용할 때마다 김삼진도 상당한 피로도를 보였다.
‘김일진이 언령을 얻었을 수도 있었겠어.’
지수의 말대로라면서 투귀의 제자인 김일진은 차후 천병제라는 거창한 별호를 얻는다. 막대한 내력과 전투 감각으로 모든 병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또한, 투귀의 제자답지 않게 소통이 잘되었다. 그러니 마지막에 모두에게 거대한 빅엿을 날렸겠지.
‘그런 놈이 혼자만 살아남았다면 필시 곡절이 있을 수밖에.’
지수는 천병제를 제거해야 한다는 점에만 목적을 두었지만, 무진은 그 과정을 살폈다.
그는 던전에서 사부와 사제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자신만 겨우 살아남아 여론의 동정을 유발했고,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았다.
‘똑똑한 놈이긴 해.’
임자를 잘못 만났을 뿐. 아니, 제대로 만난 건가? 1명의 악인을 죽여 만 명을 살렸다고 쳤다.
어쨌든 혼자만 살아남았으면 모두를 배신해야 했는데, 실력만 놓고 봐선 남은 이들을 처리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필시 조력자가 필요한데,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다. 지금처럼 투귀가 전력을 펼칠 시기가 필요했다.
‘언령을 사용했다면 호소력이 짙어졌을 테고.’
사부와 제자의 복수를 다짐하며 자발적으로 던전을 공략했다고 한다. 던전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노렸다면 모를까? 오롯이 복수를 위해서만 움직였으니 의심을 살 리 있겠는가.
퍼엉, 커억!
무진이 차분히 심사숙고하는 사이 투귀와 김삼진이 일방적으로 밀렸다. 해독제의 효과가 사라질 때가 되기는 했다. 누차 말하지만, 오래가기 어렵다고 했는데 투귀답지 않았다.
‘손 속에 사정을 두니까, 또 당하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보고 맛을 아는 것도 문젠데, 찍어 봤으면서 고추장이라고 우기는 격이었다.
이 역겨운 놈들이 투귀의 불안정한 감정 상태를 알고, 위험한 순간 동정심까지 유발했다. 한편으로 인성 교육은 몰라도, 전투술 하나는 기가 막혔다.
‘그것도 자기 제자일 때나 그렇지.’
배신자가 되니 이보다 더 골치 아픈 적도 드물었다. 사부를 속속들이 다 알고 있어서 약점을 정확히 찔러 왔다. 반면, 사부는 제자들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절대고수로 불려도 손색이 없으나, 투귀는 사부나 부모로선 꽝이었다.
꽈아아앙!
밀리는 와중에도 투귀는 투귀였다. 치명타는 피해 냈다. 전투 감각은 실로 놀라웠다. 하나, 시간을 끌수록 상황이 점차 악화되었다. 투귀의 약점을 본 김이진과 김사진이 김삼진을 물고 늘어지며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힘이 빠지며 급격히 기울어진 전투는 생사의 갈림길을 제공했다. 투귀는 절망에 몸서리를 치며 발악하듯, 전력을 끄집어냈다. 본원진기를 모조리 다 끌어 쓰려고 했다.
‘안 되지.’
구두계약도 계약이다. 회사의 일원이 되기로 약속한 이상, 본원진기를 전부 사용하면 곤란했다. 진기의 양을 체크한 후, 고갈 직전에 움직였다.
휙!
공간에서 사라졌던 무진이 나타난 장소는 김이진의 배후였다. 투귀를 몰아붙이며 승기를 잡았다고 여긴 김이진이었다. 일절의 망설임도 없이 사부의 심장에 도를 박아 넣으려고 했다.
학대가 의심되어 배은망덕을 거론하지 않겠지만, 손속을 자비가 아닌 사비로 냈다.
이게 다 돈이거든.
서걱!
휙!
아쉽게도 대가리가 굴러떨어지는 장면을 보진 못했다. 김삼진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건 인지상정이라고 했으니.
서걱!
목이 허전해 보이는 김사진에게 명품의 붉은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막 몰아치다가 반동을 이기지 못한 김사진의 수급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떨어지며 데굴데굴 굴렀다.
한참을 구르다 멈춰 선 김사진의 동공은 여전히 의문에 휩싸여 있었다. 왜 죽었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혓바닥은 왜 이렇게 긴지, 추하게 늘어졌다.
“행복한 죽음이지.”
사부와 사제 앞이라 따끔한 백신 주사처럼 단칼에 베어 주었다.
백신 부작용이 왔다고 치자고.
무릇 패륜과 배신에는 혹독한 고통과 정신적 고문이 필수였다. 편한 죽음을 내려 준 것만으로도 김이진과 김사진은 고마워해야 했다.
헉!
투귀와 김삼진은 헛바람을 삼켰다. 죽겠다 싶었는데 김이진과 김사진의 수급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목숨을 건 최후의 일전과는 다른 허망한 상황 종료였다.
또 우리만 진심이었나?
저벅, 저벅!
발소리에 투귀와 김삼진은 정신이 들었다.
한라산 던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식의 결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불과 2시간 만에 사부와 제자는 건너선 안 되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왔으며, 다시 돌아가기엔 늦었다.
응?
방향이 이상했다. 자신들에게 오는 게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것도 제자의 수급을 벤 검을 들고서.
투귀는 서둘러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뭘 하는 겐가?”
“뭘 하긴요, 목을 베야죠.”
당연히 베어야 한다는 무진의 심드렁한 태도에 투귀는 마른침을 삼켰다. 차라리 감정적으로 원한이나 분노를 드러냈다면 이해하겠으나, 차분하며 사무적이었다.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하지 말라는 직장인의 표본처럼 건실했다.
“그만하게!”
“어쩌시려고요?”
“내가 알아서 하겠네.”
“자기 몸도 건사하기 힘들어 보이는데요. 어르신의 중독을 정화하려면 일반적인 해독제론 어림도 없어요. 그 말은 이놈들이 아주 치밀하게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도 살리고 싶은 겁니까?”
“이미 셋이나 잃었어. 또 잃어야 하느냐?”
“남은 하나라도 건사하려면요.”
김삼진이 남아 있으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내 드리겠다는 무진의 상조 서비스였다.
의식이 없을 때 목이 잘리는 편이 그나마 편히 가는 방법이었다. 깨어나면 현실을 파악할 테고, 자신의 처지가 그리 편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반성해도, 하지 않아도, 껄끄럽기는 마찬가지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연애처럼 임시처방의 땜질은 곧 파탄이 나기 마련이었다.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서 가다니 전투 생물인 투귀답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진은 투귀의 우유부단함을 탓하진 않았다. 사람은 항상 이성적일 수 없고, 관계가 깊을수록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네놈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이더냐?”
“그럴 리가요. 저는 어르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애초에 죽일 생각도 없었고요.”
“……날 시험했구나!”
“어르신의 신념처럼 계약의 충실한 이행을 부탁드립니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투귀는 타 본 적도 없는 자이로드롭에서 안전띠가 풀린 기분이었다. 정말로 방심 못 할 애송이가 아닐 수 없었다.
‘어디서 이런 놈이?’
제자의 배신에 분노했고, 죽었을 때 서글픈 감정에 휩싸였었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었지 않냐고 따지려고 할 때, 남은 제자마저 죽이려고 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숨이 막히도록 딱딱 맞아떨어졌다.
섬뜩!
마치 하나의 짜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뭔가를 깨달은 듯한 투귀가 사납게 외쳤다.
“알고 있었느냐?”
“예.”
“이놈, 알았으면서도 왜 말을 하지 않았지?”
“제가 말하면 믿으셨을 겁니까?”
“……그래도 말을!!”
자고로 괴롭히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얄밉다고 했다. 군사부일체의 사부와 제자를 이간질한다고 여겼겠지.
“저와 회사를 적대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어차피 어르신은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 믿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제자들에 대한 정이 깊으니까요.”
“……젠장!”
말문이 막힌 투귀는 하늘에 대고 공허한 분노를 토했다. 저놈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만, 정론이라 비수가 되어 심장을 난도질해 버렸다. 어느 하나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보기 전까지는 놈의 말을 듣지 않았을 테니까.
“미리 언질이라도 줬으면……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야.”
“오히려 더 비극적인 참상이 벌어졌을 겁니다.”
무진은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투귀에겐 충격 요법이 필요했다. 괜히 여지를 주었다간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었다.
“잔인한 놈!”
“저는 어르신의 욕받이가 아닙니다.”
“그만, 네놈이 잘난 거 안다고.”
“원망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어르신 본인입니다.”
“알았다고!”
네가 잘 가르쳤으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을 사고라는 무진의 팩트 폭력에 투귀도 결국 참지 못하고 악을 질렀다.
“긴고아가 쓸모 있겠네요.”
“……?”
설마 이것도 예측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