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자업자득(2)
“역시 패륜아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아.”
“닥치고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배신자들답게 사제의 죽음 따윈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무진도 김오진을 제압하긴 했지만, 고기 방패로 내세우지 않은 것이다.
기절해 있는 김오진으로선 자다가 뒈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으니, 살아서 사지근맥이 잘린 채 평생 불구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학교 다닐 때 제 별명이 일진파괴자였습니다. 그러니 일진이는 제가 맡겠습니다. 아무래도 부상자나 심신미약자가 맡기에는 여러모로 탈이 나기 쉬울 테니까요.”
“벌써부터 뒷방 늙은이 취급하지 말거라…… 쿨럭!”
그러면서 핏물을 수돗물처럼 흘리시면 어쩌라는 겁니까? 이건 치료제나 포션을 달라고 협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거나 드시고 싸우세요.”
“이게 뭐냐?”
“독을 잠깐은 중화시켜 줄 겁니다. 성분은 드레이크의 피와…… 어?”
꿀꺽!
어떤 성분이 들었는지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투귀는 병을 낚아채더니 단숨에 마셔 버렸다.
“됐지.”
“듣던 대로 성급하시네요. 그러다 기간제 해독이 필요한 맹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무진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투귀는 묻지도 않고 김이진과 김사진에게 돌진했다.
김삼진도 정신을 차리고 사부의 뒤를 쫓았다. 법적으로만 유리한 상태인 심신미약이어서 쓸모가 없을 줄 알았는데 아예 맹탕은 아니었다.
찌릿, 찌릿!
김일진은 죽일 듯이 노려보며 가공할 살기를 발산했다. 투귀와 김삼진의 빈틈을 노릴 때마다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유리한 이점을 끌고 가려고 했으나, 모든 게 꼬이고 말았다.
“어차피 사부와 삼사제는 못 이겨. 너로 인해 모두 죽게 된 거다.”
“사부를 잡아먹은 후, 사제들도 잡아먹으려고 했으면서 아닌 척 굉장히 역겹네.”
이 몸 앞에서 감히 격장지계를 써!
어림도 없지.
무진은 그딴 개수작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해도, 남이 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허, 왜 이렇게 화가 나지?
“허튼소리 하지 마라!”
“처음부터는 아닐 테고, 누군가 상대를 흡수하는 스킬이나 아이템을 주었겠지.”
“네놈, 대체 뭐야?”
“그래도 선택은 네가 한 거야.”
“이 새끼가, 죽엇!”
김일진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속내를 들키자 섬뜩함을 느꼈다. 마치 놈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놈의 언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사부와 대치 중이던 이사제와 사사제가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무서운 놈이다.’
기습이라고 하나 단숨에 사제들을 무력화한 무위만큼이나 심계가 뛰어났다.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해 보려고 했는데, 역으로 탈탈 털리고 있었다. 더는 입을 놀리게 둬선 안 된다는 위기감이 밀려왔다.
스왁!
김일진은 신속히 놈에게 쇄도해 검으로 아래서 위로 사선을 그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보법과 발검이 절묘하게 이어진 검공이었다. 사실 작금의 일검은 나중을 위한 페이크였다. 통하면 좋고, 안 통해도 다음이 있었다.
한데.
까앙!
상체를 뒤로 젖혔을 때 찌르기로 전환 후 일도양단을 노렸던 김일진의 연환검공은 시작부터 막혔다.
맨손이었던 무진이 검을 든 채 사선으로 내려치며 김일진의 검과 크로스를 이루었다.
채애애앵!
검날이 부르르 떨리며, 검력(劍力)을 겨루는 형태가 되었다. 발검으로 얻어진 속도를 제대로 된 검력으로 전환하는 데 실패한 이상 상하(上下)의 차이는 컸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다면 모를까, 위에서 내리찍는 무진의 검력이 한층 더 강했다.
파아앙!
아래에서 위로 뚫고 나가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김일진은 검병에서 힘을 뺀 후, 무진을 끌어들였다. 팽팽한 힘겨루기에서 한쪽이 물러섰을 때를 노린 것이다.
차작!
무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앞다리에 힘을 주며 검을 멈추고 횡으로 베었다.
채앵!
검로를 따르기 어려웠을 텐데, 김일진의 검이 무진의 검과 재차 마주했다. 위기일발에서 김일진은 검병을 역수로 쥐었고, 사선으로 재차 휘두른 것이다.
힘을 주고, 빼는 파지법의 기민함이 실로 놀라웠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원래대로 검공을 펼치기는 어려웠다. 역수의 이점은 돌발적인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단검의 근접전이라면 모를까, 장검 대결에선 불리했다.
스륵!
김일진의 검병이 역수가 아닌 정수로 변했다. 검날이 아래서 위로 검병 내에서 빠져나와 방향이 바뀐 것이다. 하단의 검날이 일순간 사라지고 역방향에서 베어 들어오기에 막기가 쉽지는 않았다.
솨아악!
간발의 타이밍이었다. 검날은 허공을 베었지만, 검에 실린 검력이 날카로운 예기를 발했다.
피가 튀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무진은 위기를 직감하고 보법으로 멀어졌다.
쇄액!
김일진의 검극에서 검기가 길게 늘어지며 물러서는 무진을 따라잡으려고 했다. 1차, 2차, 3차에 이어지는 쾌검공의 연환이었다.
슈우웅!
김일진도 제압한 기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법을 밟으며 무진을 쫓았다. 쫓고 쫓기는 공방에서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었다. 초 단위로 맞물리고 있는데도 검력의 전환이 무섭도록 빠르다. 검강이라는 더욱 강력한 패가 있는데도 강약을 조절했다.
슈슈슈슉, 채채채채챙, 타아앙!
힘을 줄 때 주고, 뺄 때는 과감히 빼며, 속도의 가감을 통해 검공의 위력을 더한다.
투귀의 천병류에서 파생된 김일진의 천병검은 완성도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천병검은 공력의 우위보다는 공방을 통해 고도의 수 싸움을 벌이는 검공이었다.
이제 처음과 달리 무진이 하단에 있고, 김일진이 상단에서 내리누르는 형국이 되었다. 힘과 힘의 대결에선 팽팽한 듯 보였으나, 무진이 우위에 있었었다.
우웅!
마치 이때를 노린 것처럼 김일진의 천중검 스킬인 [검압]이 발동했다. 달의 인력이 발생하듯 무진의 검을 흡착하듯 빨아들였다.
파아앙!
검이 내리찍히려고 하는 순간, 김일진은 물러서야 했다. 팔목을 들어 막기는 했어도 살이 타는 듯한 파괴력이었다.
번개처럼 이루어진 무진의 발길질이 김일진의 옆구리를 노린 것이다. 한 타이밍만 늦었어도, 한 발로 서야 했기에 균형을 잃을 뻔했다.
츠으으으!
빠르기만 한 각법이 아닌 힘이 제대로 실렸다. 그 여파로 용광로에 달군 쇠처럼 김일진의 팔목이 달아올랐다.
욱신욱신!
살가죽을 관통해서 뼈를 울렸다. 김일진의 팔의 감각이 일시간 둔해지자, 무진은 놓치지 않고 공세로 전환했다.
채채채채챙!
김일진도 물러서면 안 된다는 걸 직감했기에 천병검을 극한으로 끄집어내며 막아섰다.
참, 격, 극, 회로 이어지는 검공이 일로일검처럼 맞물렸다. 눈으로 따르지 못하는 검속과 검력의 파문은 검풍이 되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쇄애애애앵!
쩌억, 쩌억!
검풍의 파편이 지나간 자리마다 허공과 대지가 갈라지며 예기를 발산했다. 저토록 빠른 쾌검의 공방임에도 불구하고, 버리는 검로가 없다. 서로의 빈틈을 만들기 위한 연계일 뿐, 속고 속이는 검공일체의 공수공방이었다.
김일진의 허수에 무진의 검이 허공을 그었다. 역수로 방향을 바꾸어 노린다면 치명타였다.
파앙, 파파파팡!
다만, 무진의 각법과 권공이 더 빨랐다. 검로가 흐트러질 때마다 검병을 한 손으로 잡은 채 주먹과 발을 사용했다.
‘빌어먹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김일진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검법으론 분명히 앞서갔다. 놈도 상당한 수준이기는 해도, 약간의 빈틈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변수를 제공하는 권각술이 예사롭지 않았다.
“네놈, 권법가였나?”
“맞아. 아주 똑똑하다.”
“이 시건방진 새끼가! 죽여 버릴 테다!”
“재능의 차이지.”
너 정도는 검으로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는 무진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김일진은 불같은 노성을 토했다. 그로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자, 과거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던전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으며, 투귀의 제자로 팔려 가 무공을 익혔다. 검에 두각을 나타내어 천병류의 천병검을 익혔고, 손발이 부서지도록 혹독한 수련을 이겨 냈다. 그제야 겨우 천병검식을 완성했다고 자부했었다. 수십 년의 피나는 노력을 놈은 재능의 차이로 가볍게 뭉개 버린 것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김일진의 기세가 삽시간에 돌변하며 무시무시한 살의에 휩싸였다. 놈을 제압해 생채로 갈기갈기 찢어발겨야 성에 찼다.
우우우우웅, 뚜드드득!
천병공이 8성에 도달해 한계를 초월했다. 아직 9성에 이르지 못했지만 일시간 모든 능력치를 배로 늘려 주는 천병공의 오의였다.
“죽어랏!”
천병검류 극쾌극속 천참만륙.
검속, 검경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눈이 돌아갔는지, 광기가 검신에 스며들어 부딪칠 때마다 심력에 충격을 준다. 반발력이 커질수록 속도를 가속하는 천병검류의 반탄회류경이 증폭했다. 어느 순간 공간 전체가 검기의 바다를 이루더니 거대한 파도가 되어 무진을 덮친다.
하늘을 뒤덮는 검의 파도, 천참만륙이라 붙인 이유가 있었다. 저 검의 파도에 닿는 순간 육신이 조각조각으로 찢어져 버릴 것이다.
번뜩!
무진의 눈빛이 가상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0과 1의 데이터처럼 변했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관통안이 발동한 것이다. 김일진의 모든 수를 숫자로 변환하여 낱낱이 분석해 나가며 지금까지 받아 낸 천병검류와 결합했다.
채챙, 꽈콰콰쾅!
검기를 초월한 검강이 발출되어 눈의 각막을 강타했다. 빛의 포화 속에서 어느 것도 구분하기 힘든 검의 파상 공세였다. 극한극점에 도달하여 마지막을 알리듯 용트림을 하며 천지 사방으로 파문이 번졌다.
후아아아아앙!
크레모아를 수십 배로 압축한 후폭풍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갔다. 바람이 잠잠해지며 흙먼지가 가라앉았지만, 희비의 교차가 극명하다.
부르르르!
믿기 힘든 현실과 마주한 김일진의 동공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배제한 일격필살이었다. 전력을 쥐어짜듯 발출한 검격을 막아 내다니, 이제까지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한눈팔 때가 아닌데.”
“……이놈!”
당황했다고, 많이 놀라셨냐고 위로라도 할 줄 알았나.
무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으로 찔러 넣었다. 마치 천병류의 진정한 전승자처럼.
슈슈슈슉, 채채챙!
무진의 검은 직선, 곡선, 사선, 회류로 이어지며 검경, 검폭, 검파, 검천으로 속도와 내력의 결합이 완벽했다. 극한의 완성도에 이른 검식은 김일진에게 좌절을 불러왔다.
“……말도 안 돼!”
“별로 어렵지 않아.”
말보다 검이 더 빨랐다. 대답은 해 주지만, 방심은 허락하지 않았다. 김일진의 동요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그도 그럴 것이 마주하는 검식이 거울처럼 판에 박았기 때문이다.
솨악, 파앗!
베어진 옆구리에서 핏물이 튀었다. 반응이 늦은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지 않도록 반진력을 이용해 물러섰지만, 그마저도 예측했던 검로에 불과했다.
서걱!
붉은 선이 왼쪽 어깨 아래로 그어지더니, 팔이 떨어져 나갔다. 비릿한 선혈이 터져 나오면서 김일진은 균형을 일었다.
휘청!
팔은 단순히 물건을 잡고, 옮기는 기능만 있지 않았다. 몸을 중심으로 양팔은 균형추와 같았다. 한쪽 팔을 잃었을 때와 잃지 않았을 때의 차이는 크다.
부르르르!
분노는 허망함으로 변해 갔다.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체감했다. 자신이 이루어 놓은 모든 걸 단숨에 따라잡아 초월해 버렸다. 인간으로선 닿지 못할 영역에 있었다.
김일진으로선 존재해선 안 될 괴생명체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넌 대체 뭐야?”
“더는 없다고 봐야겠지.”
김일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 무진의 검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만약 지금의 검속을 처음부터 펼쳤다면 결과는 자명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