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맛집 투어(2)
“제가 정리한 첩자들의 목록입니다.”
무진은 집에서 문서로 작업한 내용을 프린트한 후, 각각 1부씩 돌렸다.
문서를 읽을수록 표정들이 심각해졌다.
가문, 길드, 정부로 나뉘며, 광범위하게 분포되었다. 적지 않은 숫자로, 인지도가 높은 자들도 있었다. 이런 자들이 암중 세력의 하수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니 혀를 내두르게 했다.
“이것도 일부에 불과할 겁니다.”
“믿기지가 않는구나.”
“좀 더 파헤치려고 했는데, 금제가 단계별로 강해지더니 더는 파고들지 못하도록 막더라고요.”
“뭘 숨기려는지 모르겠지만, 의도도 굉장히 모호하구나.”
“어쩌면 자기들만의 완벽한 유토피아를 원하는지도 모르죠.”
“그런 세상이 가능할 리 없지 않느냐.”
암중 세력은 만만치가 않았다. 오랫동안 활동해 왔으며 광범위한 조직 구도를 갖추었다. 이만한 세력을 구축했으면서도 드러내지 않았고, 의도조차 감추었다는 점이 이상했다.
“게다가 습격을 주도한 놈은 중간책에 불과한 것 같더군요.”
“아버지와 비교하면 어떠냐?”
“알고서 싸웠다면 모를까,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린다면 꽤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진다는 거군.”
가주의 단언에 권왕이 발끈했다.
아들놈이 아버지를 믿지 못하고 패배를 선언하다니, 제자만 아니었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사특한 술책으로 죽어도, 죽지 않는 전투는 질색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10대 초인이 중간책보다 못하다니, 도무지 이해 못 할 족속들이군.”
“아들아, 꼭 그렇게 두 번 강조해야 하겠느냐?”
“아버지, 진실을 외면하지 마세요. 막싸움은 몰라도, 음모가 중첩된 전투엔 취약하잖아요.”
“내 아들이라서 그런지 나를 아주 잘 알고 있구나.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자식이라서 살려 줬다는 사부의 협박에도, 가주께선 아주 꿋꿋하셨다. 저 뚝심이야말로 가주의 장점이었다. 단, 성장하면서 바른말만 하다가 많이 처맞았을 것 같기는 했다. 세상 혼자 잘 살 능력이 안 되면 굽힐 줄도 알아야 덜 맞는다.
차마 살인멸구할 수 없었던 사부는 다른 놈들에게 불똥을 떨어뜨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자고로 내 가족 아니면, 나쁜 놈은 막 죽어도 되는 법이다. 하물며 중화친일매국노의 박쥐 같은 놈들이라면 더더욱.
“내 이놈들을 당장 쳐 죽여야겠다!”
“진정하세요. 지금 손을 쓰는 건 하책입니다.”
“이런 박쥐 같은 놈들을 내버려 두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저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걸 모르니까요.”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상황, 어디까지 정보가 누출되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다. 금제까지 걸려 있으니, 정보 유출에 관해서는 의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불같은 성향을 알고 있을 테니, 얌전히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겠지.”
“손을 쓰면 속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위험의 근원은 남겨 두는 셈이 되죠.”
무진과 가주는 손목 크로스를 하지 않았음에도 의기투합이 되었다. 의견을 끊임없이 내세우며 뚜렷한 목표와 결론을 도출했다.
쩝!
칫!
권왕과 지수는 대화에 끼지 못한 채 겉돌았다. 우리도 알고 있었다고 했지만, 끼어들기에는 대화의 진입 장벽이 높았다.
“적을 안심시키고, 예측한 정보를 풀어서 우리가 원하는 구도로 만들자는 거군.”
“저들도 작금의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과 자금을 투자했을 겁니다. 그러니 쉽사리 기존 체제를 물갈이하진 않겠죠.”
“하나, 수틀리면 언제든 치워 버릴 수도 있겠지.”
“정보 유출을 극도로 경계하는 만큼,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도중에 노출되면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해.”
“그러니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나, 반대의 상황도 고려해야 했다. 암중 세력은 그 정도의 규모와 정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이용할 셈이냐?”
“아비가 죄를 지었으면 자식들이 갚아야지요.”
돈을 빌리면 반드시 갚아야 하듯. 빌리고 나서 오리발을 내밀면 그 발을 잘라야 했다.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사돈은 빼고, 사촌까지도요.”
“……?”
무진의 막돼먹은 묘수에 가족들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들은 아닌 척하려고 했더니, 유전자는 정직했다. 연좌제는 옳지 못하다고 주장할 수도 없게 되었다. 괜히 애들 편을 들었다간 자신들까지 매도당하는 수가 있었다.
“저는 아카데미를 맡겠습니다. 나머지는 사부님과 가주께서 전적으로 책임져 주세요.”
“나머지가 너무 크잖아. 달랑 아카데미만 맡겠다니, 도둑놈 심보가 아니냐?”
“저는 고작 생돕니다.”
“누가 너를 고작 생도로 본다고?”
“나머지가요.”
“……그건 그렇네.”
아니라고 하기에는 무진이 깔아 놓은 포석이 완벽하다. 아카데미에서 잘나간다고 해도 가문, 길드, 정부와 비교하면 성장 중인 어린 생도에 불과했다.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생도보고 나라의 우환을 막아 달라고 부탁하진 않는다.
“말년에 제자를 잘못 둬서 고생길이 훤하구나.”
“그래서 살려 드렸습니다만.”
암중 세력의 계략에 휘말려 죽을 뻔했던 권왕으로선 반박 불가였다. 더욱이 제자와 손녀가 가문을 위해서 나서지 않았다면 더 큰 위험을 초래했을 수도 있었다.
권왕은 한숨을 쉬며 내려놓았다.
뛰어난 제자를 둔 사부의 비애였다. 어쩌다 내 신세가 이리되었을까? 이제는 제자의 말대로 해야 했다. 이는 가문과 국가를 위한 무인의 사명이었다.
“밥이나 먹고 가거라.”
“예.”
그저 사부님의 호의를 받아들였을 뿐인데, 왜 지수 어머님은 씨암탉을 끓이셨을까?
무진은 도통 알고 싶지 않았다.
***
무진은 아버지와 제주도 공항에서 내렸다.
방학하고도 쉬지 않고 달렸다. 17년의 인생보다 반 학기가 훨씬 파란만장했었다. 열심히 깽판을 쳤으니, 열심히 놀 자격이 있었다.
휴식은 더 나은 전진을 위한 원동력을 제공하며,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연관성을 찾지 못해도, 굳이 의혹을 살 필요는 없다.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무계획적인 휴가였다.
불시에 잡힌 휴가였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무진이 전날 진 회장에게 비행기표, 렌터카, 호텔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거절해도 된다고 사족을 달았음에도, 진 회장에게 무진은 손자의 곁에 두어야 하는 핵심 멤버였다. 더욱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그룹의 회장이 되어서 제주도 여행비조차 대 주지 못하면 체면이 상하기 마련이었다.
당돌함을 떠나 무례한 요구일 수도 있었으나, 무진의 당찬 배포가 진 회장의 맘에 들기도 했다. 사내라면 그만한 배짱은 있어야 한다는, 자수성가의 표본다운 마인드였다.
“휴가를 전날 말하면 어쩌자는 거냐?”
“너무 완벽하면 인간미가 없잖아요.”
직장인은 휴가 일자를 미리 말해야 했다. 그래야 서로 조율을 해서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날짜를 조정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느닷없이 휴가서를 내면 일정이 정해진 직원이 가지 못하거나, 업무 공백이 생긴다.
명백한 사내 민폐긴 한데.
산하는 아들이 목적 없이 행동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겉으로는 철부지 생도를 둔 아버지의 고민 같으나, 내막을 알면 소름이 돋게 된다.
“남 실장을 흔들어 볼 심산이구나.”
“그것도 있지만, 그냥 아버지랑 제주도에 오고 싶었어요.”
“사람을 의심부터 하면 못 쓴다.”
“공정한 경쟁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아버지를 통해 선별된 인원은 성운 길드의 초창기 멤버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서 아버지의 능력과 성과급이 결정되었다.
한데, 남 실장은 자기가 추천한 인원이 성운 길드의 핵심 멤버가 되기를 바랐다. 현재까지는 아버지의 안목이 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남 실장으로선 쫓기는 처지였다. 어떻게든 진 회장이 납득할 만한 성과를 내야만 했다.
그런 사정을 알기에 무진은 진 회장을 찾아가 여행 경비를 대놓고 요구했다. 아버지에 대한 진 회장의 총애를 시험하고, 남 실장의 대처를 확인할 요량으로.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고 시험하는 못된 버릇은 누구한테 배운 게냐?”
“떨어져도 안 다치는데, 어째서 벼랑이라고만 생각하세요.”
스스로 벼랑을 만들어서 죽고 싶다면 또 모를까? 정해진 규칙 내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진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남 실장에 대한 의혹은 접어 둘 것이다.
‘아버지의 주변에 위험 분자나 그럴 여지가 있는 자를 내버려 둘 순 없지.’
아버지는 회사원치고는 제법 건강하지만, 언제 어디서 무형권강이 날아올지 몰랐다. 평시에도 호신강기가 즉각 발현될 때까지 방심은 금물이다. 최소 절대경에 오를 때까지,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되었다.
“하아, 아들 하나 있는 게 아주 요물이야.”
“이제 다 잊고 휴가나 즐기죠.”
“차라리 말을 하지나 말 것이지.”
“아버지가 묻는데 어떻게 말을 안 해요?”
“그래, 네 똥 굵다. 됐냐?”
“저는 다 굵고, 효잡니다.”
산하는 간혹 알아먹지 못하는 아들의 문장 조합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하튼 편하게 놀기에는 휴가의 내막이 가볍지 않았다. 진짜로 놀다가 가도 되겠지만, 아들의 효율성은 실로 놀라웠다.
‘든든하기는 하네. 이래서 아들을 키우나?’
산하는 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아들은 어떻게든 잘되게 만드는 능력은 있었다.
괜찮다고 하니 고민은 접어 두었다.
“뭐부터 먹죠?”
“공항에선 고기국수지.”
무진은 제주도가 처음이다. 남들 다 가는 제주도를 안 가 봤다고 하니 주변에서 놀라기는 했다. 사실 딱히 메리트를 느끼지 않았다. 고물가에 바가지의 온상이란 편견이 있었다.
아버지는 회사 출장으로 제주도를 자주는 못 가더라도 익숙한 편이다. 늘 그렇듯 출장 시 맛집 방문은 업무 중 그나마 있는 휴식이었다.
공항 근처 고기국숫집을 들렀다. 가게에 들어가서 앉은 무진은 메뉴판을 보며 골랐다.
대표하는 메뉴는 간단했다.
“고기국수 4인분, 비빔국수 4인분, 물만두 4인분, 돔베고기 대짜 2개로 할게요, 아버지는요?”
“나는 고기국수 2인분, 비빔국수 2인분, 물만두 2인분, 돔베고기 대짜 1개.”
키오스크로 주문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이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기계세를 도입해야 한다는 말이 돌고 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총 국수와 만두 18인분, 고기 3인분을 주문했다. 주문서를 확인한 식당 주인이 손님이 더 왔나 두리번거렸다.
“1인분도 많은데, 괜찮겠어요?”
“그래서 평소보다 적게 주문했습니다.”
“아, 먹방 찍는 건가요?”
“남 먹는 걸 봐서 뭐 한데요?”
“그렇긴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