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동상이몽(2)
-권왕은 언제 봐도 헬창이구나!
-저게 어떻게 환갑을 넘은 몸이냐고!
-너희들이 운동을 안 하는 거겠지! 사람은 원래가 왕(王) 자가 있어요.
-창황도 상당하네. 이건 뭐 나이를 거꾸로들 먹는 건가?
-인생은 환갑부터구나.
-나이를 똥구녕으로 먹는 새끼들이 더 많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노년 무인의 탄탄한 육체와 기세였다. 단순히 걸어서 비무대로 올라가고 있을 뿐인데도, 경기장을 단숨에 장악했다.
“방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더 강해지냐. 씨발, 세상 더럽게 불공평하네. 아빠한테 또 혼나겠어.”
“별로.”
“잘난 체하기는, 네 본색을 다들 알아야 하는데. 이년이 원래는 이런 년이라고요!”
“강하면서 약한 척 엄살떠는 게 더 얄미운 거야.”
“와 씨발, 반박을 못 하겠다.”
관중석 아래 야구장의 더그아웃처럼 관계자실에는 유정, 혜진, 상원이 앉아 있었다. 대결이 공표된 직후부터 친구들은 지수의 전화기에 불을 질렀었다. 하도 성화를 하기에 지수는 어쩔 수 없이 관계자 출입증을 마련해 주었다.
“누가 이길 것 같아?”
“실례야. 할아버지한테.”
“창황이 졸라 만만한가 보구나.”
“그렇다고 봐야지.”
대결의 성패는 중요하진 않았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으면 족했다. 특히 대회장의 센터 위층에 따로 마련된 귀빈실에 모인 각 가문, 길드의 고위 인사들이 있는 그대로만 봐 주면 되었다.
‘짜고 치는데, 승패는 무슨.’
***
칠대가문이나 대형 길드쯤 되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비밀 장소 몇 개는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권왕가도 불편한 문제를 은밀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비밀 장소를 만들어 놓았다.
모든 시선이 대결에 쏠려 있을 때 조속히 옮겼다. 인원은 가문 내에서 지원을 받았고, 가주가 따로 선별하였다.
장소는 강화군 석모도 서쪽 민머루해수욕장의 위쪽에 만들어 놓은 별장이었다. 던전이 오픈되어 해수욕장이 문을 닫고 개장하지 않은 상태로 10년이 흘렀다. 5년 전에 그 주변을 헐값에 사들여 별장을 세웠다.
별장 주변으로 펜스를 쳐 사유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외부에선 잘 지어 놓은 근사한 별장이지만, 최첨단 방범 시설을 갖추었다.
실제로 별장 근처로 허락받지 않은 사람이 접근하면 곧장 본가로 신호를 보낸다. 특히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공간이동진을 통해 무인을 소환할 수 있었다.
별장의 내부는 3층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핵 공격을 받아도 안전했다. 또한, 기계 설비와 아티팩트가 곳곳에 설치되어 외부와 내부를 완전히 차단하는 구조다.
지하 3층.
외부에서 보는 별장과는 달리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여러 사람이 사용해도 불편하지 않으며, 1년간 생활할 식량을 갖췄다. 경호 시 지루하지 않도록 오락 시설을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도 있었다.
별장의 인원은 총 11명이었다.
감시 대상은 유경운과 유지호 부자였다. 그들은 내공을 잃었고 잘린 사지근맥은 겨우 치료되어 운신만 가능한 일반인보다 못한 처지였다.
유경운과 유지호는 지하 2층과 3층으로 나누어 각각 감금해 놓았다. 서로 간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도록 방과 층에 결계를 걸어 놓았다.
팅!
1층 조리대에서 전자레인지로 돌린 음식을 그릇에 담아 2층과 3층의 서빙 엘리베이터에 담았다.
2층으로 내려온 음식을 확인한 감시 무인은 거실을 지나 방문을 열었다.
그는 쟁반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드시오.”
“나가.”
“먹으라고.”
“이 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 컥!”
“꼭 말로 하면 듣지를 않는다니까.”
그는 반항하는 지호의 뺨을 좌우로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입술이 터지면서 핏물이 벽면을 물들였다.
허!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던 지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 자신이 겪은 일이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었다. 그저 입술에서 흐르는 선혈이 현실을 증명했다.
“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컥!”
“당연히 무사하지, 가주께서 허락하신 일인데.”
“내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것 같아! 나가기만 하면 네놈 따윈…… 컥!”
“하, 새끼. 말 더럽게 안 듣네. 자존심 세운답시고 버틸수록 너만 손해야.”
그는 지호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순순히 먹을 때까지 뺨을 후려치며 치욕을 안겨 주었다.
‘……이 내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비상하기만을 기다렸거늘. 이제는 알지도 못하는 개잡놈에게 처맞았다.
분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공을 잃었고, 사지근맥이 멀쩡하지 않았다. 무인은커녕 일반인의 공격도 막지 못하는 폐인이었다.
“원래 상태였으면 너 따위…… 커억!”
“가정은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먹지 않을 거면 이빨은 필요가 없겠지.”
움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심한 시선에 지호는 소름이 돋았다. 말로만 하는 협박이 아님을 본능이 느꼈다.
“원한다면 하는 수 없지.”
“……먹으면 되잖아!”
숟가락을 들어 국을 뜬 지호는 굴욕적인 현실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당장에라도 놈을 회를 쳐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당장은 저항해 봤자 악화만 될 뿐이다.
그래서인가? 이놈은 대체 뭐지?
가문의 무인은 얼굴을 다 알고 있었다. 별장으로 공간을 이동했을 때도 안면이 익었다. 반면에 이놈의 얼굴은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길가 다 흔히 볼 법한 평범한 얼굴이라 긴가민가했다.
“너 누구야?”
“가주님의 부탁을 받고 너희 부자를 관리·감독하게 된 강운이다. 아무래도 내부인에겐 껄끄러운 일일 테니, 나한테 맡겼겠지. 앞으로 고분고분 말 잘 듣고, 그간의 죄를 깊이 반성해야 할 거야.”
“나는 이 본가의 직계야. 이러고도…… 컥!”
“닥치고 먹으라고 했다.”
밥을 먹다가 목이 잡힌 지호는 숨이 컥! 하고 막혔다. 목구멍이 막히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강운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마치 자신을 인간이 아닌 장난감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오싹!
분노가 가라앉으며 공포가 엄습해 왔다. 지호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살려!”
“지수 아가씨 말대로 겁이 많군.”
부르르르르!
지호는 지수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살겠다고 구차하게 개처럼 빌었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기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그렇지,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괜히 주제를 모르고 눈 돌아가면, 나는 꽤 즐거울 거야.”
“……(빠드드득)!”
화가 나는데도 공포에 질려 말문이 막힌 지호였다. 그런 현실이 치가 떨리도록 싫고,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은 대권왕가를 이끌어 갈 후계자다. 어째서 이런 대접을 받고, 이따위 놈에게 고개를 숙인 채 밥을 처먹어야 한단 말인가?
“빨리 좀 처먹지. 교대 시간도 다가오는데 기다리게 하는 건 비매너지. 하긴 사촌 동생이 잘나간다고 죽이려는 놈에게 매너를 바라는 것도 웃기는 소리긴 해.”
“……여자는 본가의 주인이 될 수 없어!”
“어휴, 시대에 뒤떨어진 놈일세. 무인에게 남녀가 중요한가? 강하면 그만이지. 실력이 없으니 열등감만 남았구나.”
“할아버지가 그년을 편애하고 나를 차별한 거다! 내가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면 상황은 달랐어!”
“일단 처먹고 말해, 튀잖아. 뒤질래?”
강운의 유치한 도발에도 지호는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이러지 않았겠지만, 연이은 실패와 자격지심이 지호를 한계까지 몰아넣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주가 꽂은 낙하산에게 귀싸대기를 맞고, 살려 달라고 구걸까지 했으니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가기만 하면 네놈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지호는 결국 참았다. 화를 내 봤자 돌아오는 것은 뭉개진 자존심뿐이었다. 속으로 다짐했다. 오늘의 분노를 거름 삼아 모조리 불태우고 말겠다고.
지호의 복심에 강운은 피식했다.
‘재기가 가능하다고 보는 건가?’
내공과 사지근맥은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지만, 엘릭서 이상의 치료제가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성좌화를 비롯해 이 세상을 전부 안다고 자신하진 않았다.
두웅!
죄인이 식사하는 동안, 강운은 TV를 틀었다. 예능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스포츠 채널로 돌렸다.
마침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었다.
-권왕가와 창황가의 대결이 벌어지겠습니다.
밖의 사정을 모르고 있었던 지호는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보았다. 강운이 노려보는 걸 느끼자,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집어넣기는 했다.
-권왕가의 유지수 양과 창황가의 정우철 군의 대결이 있겠습니다.
지호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필이면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지수가 나오고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거나, 재수가 없거나.
그것도 아니면 노렸거나.
“빌어먹을!!”
“밥 잘 먹다가 욕하기는.”
“저 병신들이 뭐 하는 거야?”
“본가를 응원해야지.”
대결이 시작되기 전이지만, 지호는 누가 이길지 알고 있었다. 3학년 통이든 뭐든, 지수를 상대로는 이기지 못한다.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몰라도, 지수는 생도의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주제 파악 못 하는 창황가를 보고 있자니 복장이 터졌다.
안 된다고 알려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호는 예상대로 흘러가는 대결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속에서 천불이 터지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유지수 양의 승리입니다.
부릅!
승리는 당연했지만, 지호는 지수의 무위가 남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창황가의 정우철도 못하지 않았다. 그 나이를 뛰어넘는 실력을 보였다. 그런데도 반격은커녕 완벽하게 찍어 눌렀다.
“우리 아가씨는 천재가 분명해. 하긴 우물 안의 개구리들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진짜 앞에서는 뛰어 봤자 벼룩이지.”
“시끄러워! 닥쳐…… 큭!”
쫘악!
가뜩이나 열등감에 시달리는 지호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강운은 귀싸대기를 후렸다.
매를 버는 것도 있지만, 착착 감겼다.
이 맛, 제법인데.
“너도 보는 눈이 있을 거 아냐. 이게 단순히 권왕 어르신의 총애나 편법만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거냐? 태생이 루저라서 그러나? 왜 인정을 못 하지? 혹시 나이도 어린 년이 너무 잘해서 눈이 먼 거냐? 그럼 찌질이에 너무 병신인데.”
“웃기지 마, 이건 다 거짓이야!”
“공상 속에서 살 거 아니면 현실을 외면하진 말지. 아니면 정식으로 다시 붙든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기면 되는 일이잖아. 왜, 그건 못 하겠어?”
“그만!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너는 그냥 감시만 하면 되는 건데, 왜왜왜?”
맞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개소리였다. 자기가 한 짓을 생각해 봐라. 반성은커녕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패륜을 저질렀으면 편하게 있으면 안 되지. 물구나무선 채로 밥을 처먹어도 시원찮았다.
권왕가의 직계라서 여태 살아 있는 거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했다. 그것이 혈족이 아니라서 뒈진 놈들에게 그나마 덜 미안한 일이었다.
찌지지지직!
전파 수신이 안 되는지 TV 화면에 노이즈가 생기다가 화면 조정이 되었다. 다른 채널로 돌려 봐도 화면 조정이 나오자, 강운은 채널을 껐다.
“가주께선 그래도 사촌이라고, 네놈이 갱생할 여지가 있기를 바라고 계시거든. 하지만 사람은 원래 안 변해.”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이제라도 변한다고 하면 믿어 주기라도 할 거야?”
“못 믿지. 한 번 배신자는 영원히 배신자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죽음을 거론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더 지랄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주저하지 않고 손을 쓰겠다는 의도가 보였다.
“……날 죽이면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제 목숨 귀한 줄 알면서 사촌 동생을 죽이려고 한 거야? 생긴 대로 굉장히 염치가 없구나.”
강운의 비겁한 팩트 폭격에 지호는 부들거렸다. 알고 있지만 듣고 싶지 않은 잔인한 진실이었다.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쩝, 교대 시간이 됐으니 오늘은 이만하지. 어쨌든 잘 지내보자고. 말 잘 들으면 가주께서 선처를 해 주실지 또 알아.”
“그만 나가!”
1층에서 교대자인 진필운이 내려왔다. 적무대 소속의 무인으로 가주의 명을 받아서 차출되었다. 별장에 오고 나서 자주 얘기를 나누어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스스럼없이 등을 맡기고 돌아설 수 있었다.
“잘 살피슈, 딴생각 못 하게.”
“알겠소.”
강운은 교대자에게 당부한 후 위층의 계단으로 가려는데.
스윽!
교대자인 진필운은 지호가 아닌 강운의 등을 보고 있었다. 완벽히 후방을 점한 진필운이 강운의 뒤에서 목을 잡았다.
꽈악!
영화에서나 나오는 첩보 요원의 180도 목 꺾기였다.
우득!
돌연한 사태에 지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쩌면?
***
붉은 황혼이 지는 시각.
땅거미가 길어진다. 멀찍이서 하나씩 빛이 들어오지만, 어둠을 물리기엔 나약하다.
사사삭!
20명의 인원이 어둠을 동반자로 삼으며 목표 지점으로 움직였다. 한데, 습격자치곤 별장 주변의 펜스가 아닌,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웅!
정문이 열리고 닫히자 결계가 작동하며 주변을 에워쌌다. 보기에는 조금 전과 다름없지만, 저장된 영상을 틀어 놓은 듯 외부에선 안의 광경을 보지 못한다.
별장을 지키던 무인 둘이 외부인의 난입에도 조처하기보다는 예를 갖추었다.
“흠, 이상하군.”
“예?”
“너희들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검은색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중년의 사내는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상황에도 불편한 기색을 비치었다. 연이은 실패로 과민한 반응일 수도 있었으나,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우연인가?’
별장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무인의 면면이 걸렸다. 때마침 포섭된 인원이 배치되었다. 다만, 알고 했다고 하기엔 포섭되지 않은 인원이 있었다.
“별장 안에 1명이 더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마스터가 오기 전에 인원을 보냈으니 처리되었을 겁니다.”
“남은 3명은?”
“별장 인근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교대 순서는 누가 정했지?”
“가주가 안에 있는 놈에게 별장 관리의 권한을 주었습니다.”
5일 전부터 교대는 차례로 돌아갔고, 정해진 시각에 3명이 조를 이루어 별장 주변을 확인하게 되어 있었다. 갑자기 순번이 바뀌었으면 모를까, 일정표대로 움직였으니 수상하진 않았다.
‘상관없겠지.’
가문의 핵심 인사들이 대결장에 있었다. 공간이동진을 해제한 이상 알아챘더라도 이미 늦었다. 더욱이 알고 있었다면 이 정도 인원으론 막지 못한다.
“너희들은 돌아오는 놈들을 처리해.”
“예.”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했다. 그래야 뒤탈 없이 손에 넣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