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선의의 거짓말(2)
“혹, 선배가 질 것 같으세요?”
“고얀, 도발하는 솜씨가 제법이긴 하다만 무리한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
“들어줄 수 있는 소원입니다.”
“좋다. 하지만 반대로 네가 지면 어쩔 거냐?”
“사부님과 연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말, 꼭 지켜야 할 거다.”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권왕이나,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자들은 줄을 섰다. 권왕의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진 회장으로서도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어떻게든 내 사람을 심으면 그만이지.’
진 회장은 유리하단 판단이 섰겠지만, 무진으로선 져도, 이겨도 상관이 없었다. 어떻게든 사람을 꽂기만 하면 되었다.
타앗!
무진과 태수가 거리를 좁히더니 주먹과 주먹이 마주한다. 섬뜩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깨진 유리잔처럼 날카로운 파문이 사방으로 번진다.
파파파팟!
번갯불이 토해질 때마다 충돌의 여파가 상당하다.
남 실장은 디펜더를 펼쳐 충격파를 막아섰다. 자칫 회장님이 다칠 수 있기에 디펜더를 유지해야 했다. 단순 생도의 다툼으로 봤다가 큰코다칠 수 있었다.
“실례가 많습니다. 남 실장.”
“아니오.”
산하는 회장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신속한 판단이었다.
“자네는 어디에 떨구어 놔도 죽지는 않겠구먼.”
“자식 하나 있는데, 너무 힘듭니다.”
“엄살은, 철이 들면 다르겠지.”
“태수 군이 기를 좀 꺾어 주길 바랍니다.”
진 회장은 대결에 심취했다.
손자가 잘하고 있다고 소식을 듣고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무진의 도발이 맹랑하긴 해도, 확실히 보는 맛은 있었다.
“옳지! 잘한다! 어서 자네도 응원하게.”
“그러시다면야. 태수 군 파이팅!”
“……하하하, 원래 그런 성격이었나?”
“이사로 승진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이게 다 무진을 위해서라는 산하의 합리화에 진 회장도 한 수 접어주었다. 사회생활도, 가장의 의무도 소홀히 하지 않는 충실함에 믿음이 갔다.
회장과 이사의 화기애애한 관계는 전적으로 태수의 선전에서 기인했다. 서로 쉴 틈을 주지 않고 파상적인 대결을 펼치는데, 태수가 무진을 조금 앞서고 있었다. 전투력의 격차가 크진 않지만, 워낙 속도가 빠르고 강력했다.
쩌어엉!
패왕공을 운용한 태수의 거력발산에 무진이 흠칫하는 사이 틈이 생겼다. 태수는 그러한 빈틈을 놓치지 않고 요격해서 무진을 곤란하게 했다.
일진일퇴에서 우열이 조금씩 갈린다.
주춤, 큭!
무진도 순순히 물러서진 않았다. 주먹이 통하지 않자, 보법을 쓰며 거리 싸움으로 반격을 가했다. 직선이 아닌 좌우 페이크로 동선에 혼선을 주었다.
물고, 물리는 공수공방.
주르르르!
진 회장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눈이 따르지 못하지만, 태수의 성취가 실로 놀랍다는 것만은 확신했다.
‘이러면 조 회장에게 한 방 먹일 수 있겠구나.’
회장 모임에서 백두 그룹의 조 회장과 언쟁이 있었다. 그때마다 자식을 들먹이며 자랑하는 조 회장이 어찌나 얄미운지.
무진이 회장실에 들어올 때 안색이 좋지 않은 건 시험해 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실제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었다.
‘고얀 놈, 입심만큼 실력은 있구나.’
진 회장은 남 실장을 통해서 무진을 조사했었다. 권왕의 제자로 발탁이 되었으며, 아카데미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반면에 실력에 비해 자신감이 지나치다고 했다.
그런 녀석들은 대개 과대평가된 경우가 다반사지만, 입만 산 쭉정이는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 나이가 같았다면 태수가 밀렸을 수도 있었다.
‘하나, 그 차이를 영원히 깰 수 없을 것이다.’
진 회장은 태수에 대한 지원을 더욱 늘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지금 정도면 아카데미 내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면 공작급 헌터도 머지않았다.
설렘 가득한 진 회장의 바람과 달리 태수의 등은 축축이 젖고 있었다.
‘우측으로 5cm가 벌어졌고, 방향이 틀렸잖아.’
‘내가 허리를 비트는 이 타이밍에 들어왔어야지.’
‘체중 이동 좀 했다고 중심이 어긋났잖아. 그러니까 위력이 전에 비해 못한 거고.’
‘간격 싸움에서 보폭을 조절하라고 했어, 안 했어?’
‘이래서야 내가 선배를 믿고 맡길 수가 없잖아.’
시어머니도 아니고!
태수만 치열했다. 앞에 있는 괴물은 겉으로만 혼신을 다할 뿐, 훈계 테러를 자행하고 있었다. 뇌리를 직통으로 파고들어 와서 외면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틀리기라도 했으면 반박이라도 하지, 훈계가 너무 정확했다.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고 있는데, 태연한 척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언제까지 싸워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슬슬 끝내기는 해야 하는데, 엔딩이 쉽지가 않았다.
‘이제 패왕의 팔찌를 써서 사자후를 발휘해.’
다행히 시나리오의 각본부터 촬영까지 혼자 다 한 강 감독이 끝을 내 주었다.
크아아아아아!
사자후의 파문에 전력을 끄집어내려고 했던 무진이 휘청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주르르르!
입가에 흐르는 실핏줄이 내상을 증명한다.
부르르, 빠드드득!
일어설 시간이 필요했던 무진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분노를 표출했다. 분노의 양치질과 맞먹는, 그야말로 연기대상감이었다. 대형 사고를 쳐도 연기로 보답해도 될 만큼 완벽하다. 앞으로 사과를 받으려면 최소 이 정도는 해야 했다.
그래도 까는 세상이긴 하지만.
‘설마 쿠키 영상이 또 있는 건 아니겠지?’
하도 소름이 돋아서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은데, 엔딩 크레디트 다음에 쿠키 영상이 3개나 더 있으면 환장할 수밖에.
짝짝짝짝!
하하하하!
마무리까지 훌륭해서인지 관객의 호응이 대박이었다. 할아버지의 입가가 자신도 모르게 씰룩쌜룩거렸다. 회장으로서 체통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안에서 새는 팔불출은 어디서나 새는 법이다.
이제 무대 인사가 남았다. 낙하산 주인공인 태수가 나서서 화룡점정을 장식했다.
“어쩌지? 또 졌네.”
“잠깐 맡겨 뒀을 뿐이야.”
“그 전까지는 말을 들어야겠지.”
“젠장, 나도 사내거든.”
약속은 지킨다는 오글거리는 멘트로 무진은 빌런의 역할을 마무리했다.
우웅!
이동식 대련장을 해제하자, 회장실로 바뀌었다. 충격에 시달렸던 대련장과 달리, 회장실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아공간을 응용한 이동식 대련장은 일대일 맞다이를 하고 싶을 때 유용한 아이템이었다.
단, 공간을 전이하는 아이템은 희소성이 있는 데다,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어려워 가격이 비쌌다. 최소 7계식은 되어야 아공간을 창출할 수 있으며, 인챈트 마법을 통달해야 했다.
그렇더라도 칠대가문이나 대형 길드의 정예 요원들은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등급에 따른 차이는 있어도.
무진은 차기작에도 기여했다.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악당의 전형적인 멘트를 더해서.
“회장님이 이겼습니다. 참 좋은 손자분을 두었군요.”
“녀석, 성깔은 아직 남아 있구나.”
“지고 나서 히히 호호 할 만큼 대인배가 아니라서요.”
“약속만 지킨다면 문제가 있겠느냐. 사내라면 그만한 승부욕은 있어야지.”
“제길, 회장님도 보통이 아니시네요.”
“당연하지, 그 피가 어디 갈까?”
분하지만 인정하는 무진의 태도에 진 회장은 기꺼운 듯 호탕하게 웃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비의 속은 썩이더라도, 자기 주관은 확실한 녀석이었다. 손자의 발전을 위한다면 반드시 데리고 가야 할 인재였다.
“피를 흘렸더니 배가 고프네요. 오늘은 소고기 먹고 싶습니다.”
“하하하하, 얼마든지 먹고 싶은 대로 먹거라.”
흥미진진한 대결을 눈앞에서 목도했으니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오늘 같은 날 부하의 아들이 고기를 사 달라는데, 회장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스윽!
남 실장이 진 회장의 귀에 속삭였다.
들리지 않도록 조절해서.
진 회장은 웃음을 뚝! 그쳤다.
“설마?”
“진짭니다.”
법인카드 남용의 주범, 소살마(소고기 살인마)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회장님, 카드 놓으세요.”
“……아, 그렇지.”
***
무진은 태수 선배와 회사 근처의 최고급 한우집을 찾았다. 아버지는 업무 시간이라 일을 하고 계셨다. 부모는 자식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 부른다지, 아버지도 뿌듯하실 거다.
“잘 먹었습니다. 선배님.”
“이럴 때만 선배지.”
“재벌 3세가 쪼잔하기는.”
“네가 한 짓을 생각해 봐.”
2시에 찾은 고깃집이다. 먹고 나왔더니 어둠이 내리앉아 있었다. 날이 흐리거나 겨울이라면 이해라도 하지, 여름 방학이었다. 무인도에서 처맞고 삼겹살을 먹을 때부터 보통은 아닌 줄 알았지만, 자영업자들을 위한 돈쭐맨이었다. 먹는 내내 소고깃집 사장님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카메라를 찾았었다.
“아니, 도중에 화장실은 반칙 아니냐?”
“뷔페도 아니고, 화장실은 갈 수 있지.”
“넌 뷔페에서도 화장실을 갈 것 같아.”
“솔직히 나도 그건 못 하겠다.”
육신을 완벽히 컨트롤할 수 있기에 기초대사량을 일순 빠르게 돌려 오장육부를 가속했었다. 먹는 즉시 소화를 시켜 대장에 쌓아 놓은 후, 인풋 아웃풋의 조화를 이루었다. 먹고 나온 무진의 배가 그 증거였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일관적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먹냐?”
“그럴 리가.”
“양심이 요단강을 건넌 거 아니냐?”
“어차피 비용 처리 할 거면서.”
“요즘 세상에 그런 짓 하면 클 나.”
“어이쿠, 그러세요.”
그거야 태수 선배의 사정이고, 무진은 가책 따윈 받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손자가 되고 싶은 태수 선배의 소원을 들어주었으니 말이다.
“회장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 조만간 목록 정해서 보내 줄게.”
“내 인생의 등골 브레이커가 따로 있었네.”
“대신 그에 걸맞게 강해지고 있잖아. 혹시, 강해지기 싫어?”
“그런 건 아니지만, 매일 처맞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냐?”
“후후후.”
“제기랄!”
이 정도면 최소 도끼가 아니라 배틀액스쯤 된다.
자기 발등 자기가 찍은 태수로선 반박 불가였다. 미련 두지 않고 거절하면 그만이긴 한데, 개학 이후가 걱정이었다.
무진의 파벌에서 낙오하는 순간, 나락은 불가피했다. 나락은 곧 할아버지의 실망으로 이어진다. 비록 누구보다 총애를 받고 있기는 하나, 능력을 보여 주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모든 혜택을 잃는다.
사랑하기에 배신을 당하면 지독하게 변하는 것처럼, 사람의 감정이 참 아이러니하다. 할아버지의 총애를 무조건 자신할 순 없다. 또한, 태수는 생도 이전에 재벌가의 후예다. 같은 피를 이은 혈육이라도 등 뒤를 항상 조심해야 했다.
‘망할 놈!’
무진은 재벌가의 역학관계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걸 대놓고 이용하고 있었다.
“인생은 원래가 기브 앤 테이크잖아. 선배도 나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너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냐?”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았지. 조사해서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러니까 더 모르겠어.”
이게 어떻게 열일곱 살 먹은 녀석의 심계냐고? 삶의 쓴맛단맛똥맛 다 본 100살 넘은 능구렁이가 아니고서야.
시작부터 끝까지 설계가 요상하게도 빈틈없이 맞물렸다. 설령 계획이 틀어져도 원래의 궤도로 돌려놓을 능력이 되기에 소름이 돋았다.
“선배도 길드 물려받으려면 최소 후작급은 되어야 하잖아.”
“이대로만 가도 될 것 같은데.”
“공작급이 되면 금상첨화겠지.”
“……유혹하지 좀 마, 나 자꾸 흔들려!”
이러면 못 끊지.
이 사악한 후배는 신종 마약 같은 새끼였다.
무진은 태수 선배와 대화하면서도 기감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일단 회사 근처의 소고깃집을 잡은 것도 기감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확장된 영역에서 아버지를 중심으로 주변의 변화를 확인해 보았다.
‘아직 아닌 것 같긴 한데.’
기감을 확대하여 의심을 살 만한 변화를 감지해 봤지만, 뚜렷한 증거를 찾진 못했다. 사실 큰 기대 하진 않았다.
진 회장님과 태수 선배와의 계획되지 않은 만남에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간을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듯, 불특정한 상황을 만들어 적의 심기를 흔드는 행위는 전략전술의 기본이다.
‘찔러본다고 드러낼 만큼 어수룩하진 않다는 거겠지.’
지금까지 번번이 계획을 방해하며 화를 계속 돋워 주었다. 평상심을 유지할 때와는 달리 감정적으로 몰리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불똥이 튀면 곤란했다. 진 회장님과 태수 선배를 싫어하진 않지만, 아버지와 저울질할 순 없다. 불시 방문으론 상대의 판단력이 완전히 흐려지지는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어 다행이었다.
‘선택과 집중은 중요하지.’
아버지의 주변은 사부님과 상의해서 경쟁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주의하면 될 것이다. 그 전에 내부 정보를 살펴볼 필요는 있었다.
“새로운 정보가 나오면 즉시즉시 보고하는 게 재벌의 의무라는 걸 알고 있겠지?”
“……?”
그딴 게 무슨 재벌의 의무야!
말만 재벌이지, 이건 하도급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대우는 받아야 했다. 선배로서 하극상에 대해 따끔한 질책을 해야 하는데.
“몇 시에 연락할까? 내가 아무 때나 연락하는 그런 예의 없는 재벌이 아니에요.”
“문자는 뒀다가 국 끓여 먹을 거야? 선배, 보기보다 고문관이었네.”
네 앞에서 고문관이 안 되는 놈이 있기나 하냐?
태수는 그리 반박하고 싶었으나, 자기가 봐도 바보 같아서 흑역사 당첨이었다. 누가 보거나 듣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봤다면 살인멸구지.
무진이 양 엄지와 검지를 돌리며 대각선으로 반복했다.
“저장.”
“야,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