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판을 깔다(3)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글들이 있기는 했어도, 대다수는 피 튀기는 대결을 소망하고 있었다. 근래에 좋지 않은 일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풀어 보자는 글이 많았다.
자고로 남의 집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구경이 싸움 구경이라고 하지 않는가.
창황가로선 날벼락이나 다름이 없었다.
칠대가문이 서로 반목하곤 있지만, 공식적인 대립은 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협의가 있었다. 그런 칠대가문의 룰을 권왕가가 대놓고 어긴 것이다.
천룡각.
창황가의 중요 안건을 처리하기 위한 회의실이다. 상석에 앉은 창황을 두고 좌우로 가주, 형제들, 장로들이 모였다.
굳어 있는 표정들만 봐도 이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기도 했다.
전처럼 비공식적으로 비무를 벌였다면 문제가 될 여지가 줄어들었겠으나, 공식적인 제안을 한 이상 공개 비무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는 대놓고 모욕을 주겠다는 의도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각 가문에 공문을 보내서 권왕을 탄핵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를 철저히 무시한 행위고, 가문 간의 규약을 위반한 행윕니다.”
“권왕가에 압박을 넣는다고 한들, 권왕이 순순히 말을 듣겠습니까? 권왕의 성격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오.”
“그렇다고 이대로 권왕의 뜻대로 하자는 건가요?”
“권왕이 이리 나온 이상, 뒤를 돌아볼 여지는 없습니다.”
이미정 장로, 백탁현 장로, 전유란 장로가 언쟁을 벌였지만, 누구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진 못했다. 장로들이 나선다고 문제가 종식될 사안도 아니고, 결국은 창황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권왕의 공식적인 제안을 우리로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다른 가문이 협조한다면 판을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장로의 발언에 장로들은 공조하지 않았다. 도의상으론 동조해야 하나, 권왕이 물고 늘어지면 같이 엮이는 수가 있었다. 잘못 개입했다가 화를 당할 수도 있기에 다른 가문이 여태까지 조용한 것이다.
수 시간째 갑론을박이 이어졌지만, 해결은커녕 원점으로 돌아갔다.
오랜 참오 끝에 창황이 침묵을 깼다.
“날짜로 잡도록.”
“안 됩니다. 권왕과 붙으면 어찌 되실지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지리라 확신하는군. 아니면 권왕에게 사정을 설명하길 바라느냐?”
“그런 뜻으로 말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전대 가주님의 체면을 위해서.”
“그만.”
창황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장로들은 소름이 돋았다. 자리를 물려준 이후로는 나서지 않았을 뿐, 창황의 성향을 알기에 장로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더욱이 이번 사태의 내막을 아는 가주와 장로들은 권왕의 제안을 막무가내로 깎아내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유경운을 통해 사실을 알아낸 이상, 발뺌한다고 해서 해결되진 않는다. 그나마 증거가 없기는 한데, 권왕이 이리 나온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권왕은 요구하는 것이다. 뒤통수를 노린 건 묻어 줄 테니, 공식적으로 망신을 당하라고.
“권왕에게 끌려다니지 않도록 너희들은 그에 걸맞은 무대나 준비를 해 놔. 내 말뜻 알겠지?”
“……알겠습니다.”
창황은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도중에 나온 이유는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말을 마친 후 곧바로 개인 수련실로 돌아갔다.
창황이 천룡각을 나서고 난 후에야 가주와 장로들은 숨통이 조금 트였다.
“권왕이 심권을 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승산이 없어요.”
“대응하려고 했으면 진작 했어야지. 지금까지 시간을 끌다가 거절하면 여론이 뭐라고 떠벌릴 것 같아?”
“그렇다고 이대로 당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건 나중 문제고, 지금은 권왕가를 흔들 방법이나 찾아봐.”
권왕과의 대결은 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론의 분위기라도 바꾸어야 했다. 대결의 성패를 떠나 권왕가의 약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우릴 이딴 식으로 대해!’
창황가주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반드시 받은 굴욕 이상으로 되돌려주어야 했다. 그러려면 패하더라도 최소한 그럴듯한 대결 구도가 나와야 한다.
***
권왕과 창황의 대결 날짜와 장소가 잡혔다.
창황가로선 원치 않은 일이나, 여론을 가볍게 여기는 바람에 일을 더 키운 꼴이 되었다. 무인 전용 공식 대련장에서 대결하기로 정하자, 벌써부터 관람 예약이 성화였다.
허!
조던으로선 예상치 못한 사태의 연속이었다. 창황가에 파견한 육영의 보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창황을 의심했었는데, 다른 문제가 있는 듯했다.
“권왕을 이길 순 없겠지?”
“현재로선 불가능합니다.”
“혈기단을 쓴다면?”
“그가 복용할지 의문입니다. 던전 웨이브 이후로 저희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모든 책임은 유경운과 합공을 하고도 권왕을 이기지 못한 창황의 무능에 있었다. 그런데도 실패를 자신에게 돌리는 창황의 적반하장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 주제에 도움을 바란다고?”
“창황가주의 요청입니다.”
“결국, 창황의 뜻이잖아.”
“그렇긴 합니다.”
맘 같아서는 혈기단을 쓴 후 폐기 처분하고 싶으나 창황이 따라 줄 것 같지 않았다. 의심의 싹이 튼 이상, 신뢰를 유지하려면 기대에 걸맞은 영약을 내어 주어야 했다.
‘빌어먹을, 대체 얼마나 손해를 입는 거야?’
최소한 스텟과 내력을 배 이상은 끌어 올려 줄 영약과 아이템이 필요했다. 그래야 창황에게 심어진 불신의 씨앗을 씻어 내리고, 차후를 도모할 수 있었다.
당장 혈정을 복용시켜 세뇌하기는 불가능했다. 권왕과 비교해 손색이 있으나, 창황급 무인을 세뇌하는 작업은 오래 걸렸다. 권왕을 흡수할 때가 적기였거늘, 되는 일이 없었다.
‘권왕가가 문제였어!’
이 사태의 근원적인 원인은 권왕가와 맞물렸다. 권왕이 지랄을 하면서부터 계획이 꼬였다. 이제는 외면하기 어려웠다. 자칫 권왕가와 동조하는 세력이 생기면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승승장구하는 권왕가를 눌러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쩐다?’
권왕을 손보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저주, 독, 스킬이 통하지 않은 데다가 절대경의 중반경을 이뤘다면 어중간한 수단은 독이 되었다.
“가용할 십영과 인원을 불러 모아.”
“예. 마스터.”
날짜가 정해진 이상, 이후로는 다시 손을 쓸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연이은 실패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이때라, 작은 실적이라도 절실했다.
‘어쩌다가 내가?’
승승장구를 기대했거늘, 설상가상의 연속이었다.
***
꽈아앙, 투아아앙!
연무장을 뒤흔드는 강맹한 파문. 난무하는 권영과 활화산과 같은 권파는 태풍과 같았다. 시작하기 전까지의 고요함과는 대비되는 풍림화산의 현신이었다.
폭풍 대련은 장장 15분간 이어졌다. 짧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공수의 연환은 권공의 정수였다. 실로 놀라우리만치 완성된 무리에 거구의 노인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대체 뭘 하면서 놀았던 거냐?”
“놀기는 뭘 놀아요, 그냥 일방적으로 처맞았다니까.”
“그 녀석의 주먹은 기연 덩어리구나.”
“그런 식으로 칭찬하면 안 된다니까요!”
권왕은 본색을 드러낸 손녀의 무공에 대경실색했다. 이전에도 놀라운 발전을 했다고 칭찬했거늘, 여태 할아비를 기만했던 것이다.
허허허허!
분명 화가 나야 하는데, 권왕은 허탈하면서도 뿌듯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무공이 일취월장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파파파파팟!
할아버지와 손녀의 파이팅은 계속되었다. 대결은 점점 치열해져만 갔고, 권왕가의 진신절기가 터져 나왔다. 수십 합이 초 단위로 펼쳐지며, 삽시간에 지나갔다.
빠아악!
까악!
살짝 신음을 지르며 물러선 지수가 인상을 썼다. 분명히 약속했으면서, 할아버지는 흥겹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반격 안 하기로 했잖아요!”
“미안, 나도 모르게.”
“진짜 믿을 사람이 없다니까.”
“이번에는 반격 안 하마.”
“진짜죠?”
“대신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반격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 권왕의 수비는 흉기 그 자체였다. 신화금강의 극의를 이룬 절삭금강륜이 발휘되는 이상, 닿기만 해도 손가락이 ‘댕강!’이었다.
히익!
무형강기와 호신강기가 부딪쳤을 때, 지수는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할아버지의 진의를 마주할 생각이긴 했지만,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었다.
“어떠냐? 손녀 녀석아!”
“정말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네요.”
“당연하지 않느냐.”
“그래도 반격하진 마세요.”
“얼마든지 오거라.”
권왕은 심권만 쓰지 않을 뿐, 상당한 전력을 쓰고 있었다. 그 정도로 지수는 방심 못 할 무인이었다.
한편으로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웠다. 제자의 말도 안 되는 무력은 논외로 치더라도, 지수도 일반적인 재능을 넘어섰다.
손녀와 제자의 무위가 이렇게나 대단하다니, 가문의 홍복이 분명했다. 하물며 제자는 무공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용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결계만 해도 그렇다. 전력을 쏟아 내는데도 연무장은 과학적으로 편안했다.
‘그래도 아직은 아니다. 욘석아!’
제자에겐 도전자지만, 권왕은 손녀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싶진 않았다. 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단단한 우산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해져야 했다.
파팟, 타타탓!
경력이 실린 권각이 불을 뿜는다. 권왕과 지수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공수를 마주했다. 공격과 수비의 단조로운 형태지만, 절대 가볍지 않았다. 빠른 속도 못지않게 정확하고, 묵직한 충돌이 이어졌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비무 대련으로 치부하기에는 굉장히 살벌했다. 집요하게 약점을 노리며 전사경을 발출하는 지수와 와류경으로 막아 내는 권왕의 공수였다.
파앙, 주춤!
결과적으로 지수가 한 끗 차이로 밀리고 있었다. 하나, 공격과 수비로 나뉘고 있는데도 밀린다면 권왕이 한 단계는 앞서 있다고 해야 했다.
“속성을 쓴다고 달라지는 건 없느니라.”
“정말로요?”
“그렇단다, 속성은 무위를 잠시 늘려 주는 증폭기에 불과해. 강해지려면 깨달음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할아버지를 믿어요.”
“이 할아비 아직 안 죽었다.”
안심했는지, 지수는 미소를 지으며 속성 단계를 높였다.
-광폭화 4단 개방.
응?
손녀의 눈빛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일순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기세에 권왕은 아차 싶었다.
“이 녀석아, 정신 차렷!”
“크크크크크크!”
아직 지수는 광폭화 4단을 완벽하게 통제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발휘한 건 할아버지를 전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본인 입으로 그리 호언장담을 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잠깐!”
방어만 해선 골로 가게 생겼다.
“죽엇!”
“그게 할아비한테 할 소리냐!”
권왕의 나이 68세, 이대로 죽는다면 국민연금 개이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