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판을 깔다(1)
날로 드시려는 권왕가주의 간악한 음모는 분쇄되었다.
요즘 같은 더운 날씨에 그렇게 날로만 먹다가는 식중독과 패혈증을 유발할 수 있었다.
인생은 실전이고, 결혼은 스펙이었다.
무진은 지수와의 스펙 차이를 객관적인 근거로 들어 아버님의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친절하게 물리쳤다.
정의는 항시 승리하는 법, 하마터면 꽃다운 17세에 발목이 잡힐 뻔했다.
대신 아버님의 요구 조건대로 usb를 복사해서 건네 드렸다. 차후 요긴하게 유용할 담보물이었다. 말 안 듣는 아버지를 위한 자식으로서의 효심이라나.
하긴 둘째는 맛이 갔으니, 이제 하나 남았구나.
여하튼 아버님의 무리한 요구는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힘들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다.
서울 34평형 집, 외제 차, 예물, 초호화 호텔 예식장, 세계 일주 신혼여행권 등 반드시 필요한 절차가 너무 많았다.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으나, 어른들이 하는 말씀 틀린 것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무진은 스몰 웨딩을 꿈꾸지 않았다. 웨딩은 초빅사이즈 웨딩을 해야 했다. 최소 500년은 같이 살 수도 있는데, 스몰 웨딩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돈지랄로 볼 수도 있으나, 돈이 있으면 지랄도 해 줘야 경제가 돌아간다. 내가 못 한다고 남도 못 하게 하는 건 놀부 심보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 조목조목 이성적으로 설득한들, 여론은 항상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미풍양속인 주변을 의식하는 풍토와 맞물려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사촌이 땅을 샀는데 배가 왜 아플까? 축하를 해 줘도 부족한 일이거늘.
우리나라는 그러한 미풍양속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부자는 악하고, 빈자는 착하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주입했다.
따지고 보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환경에 좌지우지된다고 했다. 따라서 환경이 좋지 않으면 성장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었다. 한데, 이러한 인과를 누구도 받아들이진 않는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삶이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흥, 흥, 흥!
아까부터 웬 콧바람.
유부녀가 될 위기에서 구해 줬는데도 지수는 뿌루퉁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여자의 복잡한 마음이었다.
혹, 후회할 바엔 해 보고 나서 후회하자는 극단주의자였나?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어때서?”
“밥 먹는데 할 소린 아니라서 이만할게.”
“나도 아니거든.”
“다행이야. 우리 서로 윈윈하자.”
“두고 봐, 최후에 우는 사람은 네가 될 거야.”
“알았어, 내가 졌다. 다시는 넘보지 않을게.”
“누구 맘대로 포기해!”
이년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대체 원하는 답이 뭐야? 대충 미안하다고 했으면 알아서 들어 처먹어야지. 세상천지에 여사친을 위해서 상세한 설명을 하는 남사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면서 왜 그랬어? 라는 말도 듣고 싶지 않고.
눈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이 아니었으면 지수는 ‘훈련의 방’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어머님, 요리 솜씨가 정말 대단하세요.”
“내가 한 건 별로 없어, 주방 아줌마가 다 하셨거든.”
“가짓수보다는 메인이 중요하죠.”
“어머, 우리 무진이가 뭘 좀 아네.”
언제부터 우리 무진이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님의 요리 솜씨는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메인 요리인 소고기 찜은 최고급 소고기를 재료로 정성이 깃든 음식이었다.
유경중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사위, 많이 먹어.”
“안 됩니다.”
“혹시 우리 때문에 불편해서 그래?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사부님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이쿠, 예의도 바르구나. 그래야지, 하하하하!”
언제는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라더니, 사부님의 자식 교육이 정말 대단했다. 어떻게 보면 예견된 수순이었다. 낳아 놓기만 하면 다가 아닌 것처럼, 부모와 자식은 서로에게 매너가 있어야 했다.
“그렇게 예의가 발라서 제자가 사부를 두들겨 패요!”
“어허, 그건 정당한 대결이었어.”
“세상 어느 놈이 사부의 목을 잡고서 패냐고!”
“항상 최선을 다하라는, 가문의 예법을 지켰을 뿐이잖아.”
“아빠, 언제부터 이 녀석의 대변인이 된 거예요?”
“어허, 신랑한테! 말버릇 하고는.”
“다음부터는 조신할게요.”
“……?”
“……?”
미국을 찬양하다 일본으로 바꾼 이완용급 태세전환이었다.
무진조차도 순간적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입을 닥치고 말았다. 이 정도의 순발력이라니, 지수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빠는 서운하다.”
“아빠, 하나만 해.”
가족 간에 시답지 않은 대화가 끝나기 직전 사부님이 오셨다.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식탁의 상석으로 걸어가서 앉은 권왕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무진을 보았다.
‘꿈인 줄 알았거늘.’
자고 일어났을 때 상처 하나 없이 말짱했었다. 꼬였던 단전까지도 원상 복구되어 있었다.
망할, 꿈은커녕 냉혹한 현실이었다. 제자에게 일방적으로 처맞고, 치료까지 받았단다.
‘이놈이!’
그나마 멀쩡한 줄 알았던 아들놈이 시시콜콜하게 사정을 다 설명해 주고 지랄이었다. 그러면서 키득거리는 걸 보았더니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갈 뻔했다.
-영상이 있더군요. 좋아할 사람들 많겠지요.
영상을 찍어 복기하겠다는 제자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지우라고 했지만, 용의주도한 아들이라면 복사해 놓았을 것이다.
더욱이 제자의 보디캠이라, 정작 무진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얼마든지 복사본이 돌아다닌다고 해도 거리낄 게 없었다.
무진과 주고받은 대화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열일곱 살 생도에게 권왕이 처맞았다는 걸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숨겨진 수제자나 비밀 병기쯤으로 알겠지.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제자의 무위는 속된 말로, 미쳤다. 나이를 초월한 강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우리나라에서 이 녀석을 이길 무인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종종 겨뤄요, 사부님.”
“다음에는 정말로 죽여 주마.”
“이래서 사부님이 좋다니까요.”
“자만하지 말거라.”
일반적인 사부라면 체면 때문이라도 언짢아해야 하나, 권왕은 그런 부류와는 체질적으로 다르긴 했다. 겨루고 싶어도 사회적 지위 때문에 소원했었던 전투에 굶주렸던 권왕은 제자와의 대련이 기대되었다.
물론, 영상 유출은 목숨 걸고 막아야 했다. 대결과 체면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어디 가서 제자한테 맞고 다녔다고 자랑할 만큼 뻔뻔하진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과일을 먹었다.
천지를 개벽할 작당 모의는 응당 거실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자고로 거창하게 시작한 일치고, 제대로 되는 예는 흔치 않았다. 대부분 시작만 창대하고 끝은 미미했다.
“창황은 어떻게 한 거냐?”
“아카데미 보고에서 에고소드를 주웠는데, 이게 영혼을 먹는 놈이더라고요. 물론 창황이 온전했다면 힘들었겠지만, 기습으로 약해진 상태라 식은 죽 먹기였죠.”
“……아!”
방금 아주 무서운 얘기가 지나갔는데, TV 예능을 보는 중이다. 대수롭지 않음을 떠나, 별거 아닌 일로 치부했다. 적으로 낙인이 찍히니, 죽음조차 희극이 되었다.
“창황은 죽었구나.”
“제 수족만 남은 거죠.”
권왕 못지않게 유경중도 깜짝 놀랐다. 창황을 제압한 과정을 듣기는 했지만, 숨겨진 내막에 무진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기습에 이은 다음 수까지 예측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저 나이 또래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심기였다.
“무공은 둘째 치고, 전투의 짜임새가 있구나. 특히 패륜아에게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던 점은 아주 좋았다.”
“기본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 기본도 못 하는 사람들 천지빼깔이다. 자기만 잘난 줄 알고 설치는 것보다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머리가 있어야 해.”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권왕과 지수는 동시에 헛기침했다.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데도, 왠지 모르게 정곡을 찔린 느낌이랄까? 마시던 콜라를 뿜을 뻔했다.
“배후가 그 정도로 대단하다면 당장 창황을 이용하는 건 현명하지 않아.”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알아채기 전까지는 창황을 배척하면서 약을 올린 후에 배신자를 써먹는 편이 나을 듯싶구나.”
“그래도 동생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가문을 위태롭게 했으면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지.”
가주의 냉혹한 결단에 권왕은 가슴이 저미었다. 가문을 배신했어도 형제였다. 배후를 유인하기 위해서 동생을 도구로 쓰려고 하다니,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나 버렸다.
“매정하게 보이느냐?”
“전혀요. 바른 결정입니다.”
유경중도 동생을 미끼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반성하는 기색이라도 있었다면. 동생은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탓을 자신과 아버지에게 돌렸다.
희망 회로라도 돌려 보자면.
“어쩌면 녀석 나름대로 회개하려고 일부러 미끼가 되려는 걸지도 모르지.”
유경운이 반성하여 잘못을 뉘우쳤다면 유경중은 갈등과 번민에 휩싸였을 것이다. 끝까지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선택이 자존심일 수도 있고, 가문을 위한 마지막 배려일 수도 있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가족이라서 이해하려는 것일 뿐, 무진은 악어의 눈물로 치부했다. 어차피 타인이고, 배신자를 신뢰하진 않는다. 사부님을 생각해서 살려 두기는 했으나, 여전히 형평성에 어긋났다. 죽여 버린 5명의 무인은 하늘에서도 원망하겠지.
“배후를 찾지 못하더라도, 가문의 배신자를 솎아 낼 필요는 있을 겁니다. 전쟁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하니까요.”
“생각이 있으면 지금 당장 행동에 나서진 않을 테지. 일단은 강하게 고삐를 조인 후, 시일을 봐서 경계를 풀 생각이다.”
“좋은 방법이네요.”
“그렇다고 확실한 방법은 아니지.”
“세상에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무진의 생도다운 겸손함에 권왕과 지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이 겸손해야 함은 마땅하나, 무진을 예로 들면 최악의 기만이었다.
생도임에도 무패를 자랑하는 전적만 봐도 그렇다. 전투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전적에 권왕과 창황이 들어간 이상, 비교는 무의미했다. 이미 국내를 따져도 무진을 이길 수 있을 만한 각성자가 없었다.
무진은 가주의 계획대로 창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창황을 소모성으로 써 버리기에는 아까웠고, 당장 배후를 찾아내기는 요원한 일이었다. 그럴 바엔 창황에 대한 의혹을 배제한 후, 뒤통수를 노리는 편이 이득이었다.
적의 적은 아군일 테니, 의혹이 있더라도 믿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믿음이 오래가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수의 아버님이라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거늘, 다리에서 주워 왔는지 심계가 남달랐다. 사부님의 아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현명함이었다.